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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서 알리자 (왕하 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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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알리자 (왕하 7:3-10)

뉴욕 맨해튼에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the Wall Street)'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9월 17일부터 시작된 반 월가 시위는 1%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99%가 분노를 표현하는 통로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은 금융권의 탐욕을 질타했고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시위가 계속되면서 이슈는 금융개혁만이 아니라 빈부격차, 실업난등 경제문제는 물론 환경, 교육, 마약, 전쟁 등 다양한 의제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일부 주류 매체들은 반 월가 시위를 애써 외면하거나 주도세력이 없는 시위여서 얼마 못가 스스로 사라질 것이라고 우습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위는 이제 로스앤젤레스, 보스톤, 워싱턴DC등으로 확산되고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런던, 동경, 서울, 타이페이, 홍콩 그리고 시드니에게 이르기까지 시위를 벌이며 소수가 지배하는 분배의 불평등을 지양하고 다 같이 나누자고 외칩니다. 

이번 시위를 두고 "자본주의 종말"이라든지 "시장 경제주의의 몰락"이라든지 하는 성급한 주장마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샌프란시스코의 경제학 교수인 Bruce Wydick은 미국이 사회의 근간이자 건국이념이기도 한 검소와 정직 그리고 투명성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벗어나 물질적인 가치만을 최고로 인정하려는 소비 물질주의에 빠졌다고 진단하면서 전 미국인들의 회개와 반성을 촉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2천 년 전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번 시위는 오랜 경기침체와 불투명한 미래를 인하여 좌절한 사람들의 불만이 표현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경제 침체, 건강의 침체, 정신적인 침체, 나아가서 영적 침체를 경험할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위기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인하여 넘어지지 않고 다시 한 번 신앙생활을 돌아보아 흐트러진 삶의 초점을 다시 주님께로 맞추면서 2011년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마리아 성안의 상황은 절망적입니다(6:24-33) 엘리사를 통해 조성된 평화는 잠시뿐이고 주전 850년경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을 때에 아람 왕 벤하닷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사마리아 성을 포위합니다. 물론 아람 편에서는 쳐들어 온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이 그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주의 백성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고 세상으로 나가려 할 때 하나님은 종종 막대기를 사용하십니다. 아람은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신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요즘 같으면 경제적으로 어렵게 하시든지, 건강을 치시든지, 상당 기간 동안 사람에게 시달리게 하십니다. 어느 것도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수학적으로 말한다면 역이 언제나 성립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업이 힘들어지고 건강이 나빠지고 사람에게 시달리는 것이 반드시 죄 때문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려고 잠시 믿는 자라도 어려움에 있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번에는 아람 군대의 공격을 엘리사를 통해 미리 알리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악을 인하여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람 군대가 성을 포위하자 외부로부터 물자 공급이 중단되어 사마리아 성은 생존의 위협을 받습니다. 엄청난 인플레가 생기고 민심이 흉흉해집니다. 식량사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나귀머리 하나에 팔십 세겔에 거래가 됩니다. 평소에는 나귀 머리는 고사하고 나귀 자체를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양식이 없다보니 나귀 머리조차 없어서 야단입니다. 노예 값이 약 30세겔 정도 나가는 것을 비교하면 나귀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라는 것은 대단히 높은 가격입니다. 합분태 4분의 1갑이 은 다섯 세겔에 팔립니다. 1갑(cab)은 한 세아의 1/6로서 1.2리터 정도에 해당됩니다. 합분태는 비둘기 똥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비둘기 똥 같이 생긴 콩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거들떠보지 않던 합분태 4분의 일 갑이 5세겔에 달한다는 것 역시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입니다. 이런 위기상황에도 물건의 값을 비싸게 매겨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성안에 양식이 거의 바닥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딱한 일이 벌어집니다. 

하루는 한 여인이 성벽 위를 걷는 여호람 왕에게 도와달라고 소리칩니다. 이에 왕은 화를 벌컥 내면서 여호와께서도 잠잠하신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곡식이 없는데 타작마당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포도가 없는데 포도주 틀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좌절된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도대체 무슨 일로 도와 달래느냐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여인이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두 이웃이 번갈아 가면서 아이들을 삶아 먹기로 했는데 어제 자신의 아이를 나누어 먹은 이웃이 오늘은 자기 아이를 감추고 내어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그 집의 아이를 약속대로 같이 삶아 먹도록 해달라고 왕에게 호소합니다.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자기 자식까지 먹어야 할 정도로 비참하게 되었습니까? 

레위기 26:29절을 보면 자녀를 잡아먹는 것은 심판의 결과인 저주로 묘사됩니다.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참담한 심정으로 자기 옷을 찢습니다. 왕의 찢겨진 옷 사이로 굵은 베옷이 보입니다. 왕도 이런 상황에서 베옷을 입고 나름대로 하나님께 매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끔찍한 일을 전해들은 여호람이 갑자기 분노합니다.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6:31) 하면서 성에 임한 환난의 원인을 엘리사에게 돌립니다. 엘리사가 아람의 공격을 알고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혹은 지난번에 아람 군대를 포로로 잡았을 때 엘리사가 그들을 죽이지 말고 돌려보내자고 했는데 그들이 다시 쳐들어 왔기에 그랬는지, 아니면 엘리사가 이런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하나님만 의지하자고 해서 기다렸는데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서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엘리사가 죽이고 싶도록 미워집니다. 왕은 엘리사가 있는 곳에 사자를 보내고 자기도 뒤따라갑니다. 엘리사는 장로들에게 문을 잠그고 왕의 사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자 왕은 엘리사에게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6:33)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왕은 하나님을 버린 후 바알이나 다른 우상에게 제사를 드릴 심산이었을 것입니다. 왕은 재앙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심판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구원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미워해 심판을 내리셨기 때문에 자신도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식의 오만한 태도입니다. 아무리 힘든 고난을 당할 지라도 하나님께 겸손하게 엎드리기에 늦은 때는 없습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엘리사가 회복을 예언합니다(7:1-2) 

백성들의 비참한 상황에 그 마음이 찢어지나 어찌할 줄 모르는 왕과 왕이 자기 목숨을 빼앗으려는 급박한 상황 중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엘리사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물론 엘리사도 백성의 비참함을 알고 그들에 대한 불쌍함으로 마음이 찢어졌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사에게 임합니다.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7:1). 

한 스아는 약 7리터 정도의 분량이고 한 세겔은 금전이나 은전의 최소 단위입니다. 단 하루 만에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위대한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마침 그 자리에 여호람 왕의 총애를 받는 한 장관이 있었습니다. 자기 계산으로는 사마리아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의 식량 문제가 하루 만에 해결된다고 하니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고 빈정댑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시고 곡식을 쏟아 부으실지라도 하루 만에 회복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판단을 더 신뢰합니다. 이에 엘리사는 그 장관을 향해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대답합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없게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지 쓸데없는 입방정을 떨어서는 안 됩니다. 입술의 열매를 지으시는 하나님께서 들으신 대로 갚아주십니다. 하나님의 복은 오직 믿는 자들만 받을 수 있습니다. 문둥병자들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7:3-10) 

지금도 문둥병자들이나 장애인들은 주변사람의 환영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예전에 문둥병자들은 성안에 살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총을 피해 성 바깥에 있는 동굴이나 골짜기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람 군대의 퇴각 소식을 처음 접한 사람들이 네 명의 문둥병자들입니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전쟁과 굶주림이 이어지자 그들의 인생은 더욱 절망적이 됩니다. 굶어 죽느니 차라리 칼에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그들은 원수들의 손에 인생을 던지기로 작정합니다. 아람 군대가 불쌍히 여겨 양식을 주면 사는 것이고 죽인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 안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둥병자들은 이미 낮아진 상태에서 한 번 더 자존심을 버리고 나아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내가 왕년에 어떤 사람이었는데,' '나는 절대 남에게 나의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내가 왜 먼저 머리를 숙여' 등등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고 현재의 상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어떤 경우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문제가 해결될 때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존심을 훌훌 털어버리고 도전할 때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자들은 해질 무렵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아람 군대에게 가려고 일어섭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하나님 홀로 싸우셔서 적군을 물리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holy war)입니다. 하나님은 벌판에 하늘 군대를 진군시키십니다. 음향효과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도 보게 하시고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듣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성도들에게는 구원과 능력이 되고, 원수들에게는 두려움과 멸망이 됩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병거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에 아람 군대는 완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아람 군사들은 이스라엘이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을 돈 주고 불러온 것으로 오해하고 다급하게 철수하느라 장막과 말과 나귀는 물론 진영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가버립니다. 아람 군대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문둥병자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지금은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그

들의 눈에는 산더미같이 쌓인 음식만 보입니다. 그들은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기를 반복합니다. 오랜만에 배가 터지도록 먹습니다. 그리고 물건을 닥치는 대로 열심히 챙깁니다. 상상만 해도 얼마나 신이 납니까? 꿈이라도 좋으니 나도 한번 저래보았으면 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퍼뜩 문둥병자들에게 한 생각이 스쳐갑니다. 성안에서 먹을 것이 없어 죽어 가는 동족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식을 잡아먹을 정도로 굶주리는데 자신들만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이 옳지 않다는 양심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날의 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사마리아 성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그들이 문둥병 때문에 성 밖으로 쫓겨나 온갖 고생을 한 것도 바로 이때를 위함이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이 아니었다면 성 안 사람들은 성 밖에 엄청난 양식이 쌓여 있는데도 굶어죽을 뻔 하였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행복한 것보다 남을 행복하게 할 때 그 기쁨이 더 큰 법입니다. 지체할 경우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 채 죽을 사람들이 더 있을 것이기에 그 밤에 달려갑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에게 손가락질하고 무시한 사람들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문지기는 문둥병자들로부터 아람 진영에 일어난 일을 전하여 듣습니다. 대적이 물러가고 자유와 풍요로운 복이 찾아왔다는 소식입니다. 

문지기는 즉시로 성 안에 알립니다. 엘리사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7:11-20) 여호람 왕은 아람 군대의 도망 소식을 들으면서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을 성 밖으로 유인해서 성을 빼앗으려는 유인작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때 왕의 신복중 하나가 건의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굶어죽게 될 텐데 죽을 각오를 하고 몇 사람을 보내서 확인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는 성중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말 다섯 필에 사람들을 태워 보내 사실 여부를 정탐할 것을 제안합니다. 왕이 허락하자 밤에 정탐꾼들이 나가 문둥병자들의 보고가 사실인지 확인합니다. 

얼마 전까지 사마리아를 둘러싸고 위협하던 원수들이 모두 도망쳐버리고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양식이 가득한 것을 직접 보고 확인했습니다. 아람 군대가 막대한 양식을 팽개치고 도망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안의 무리는 미친 듯이 성 밖으로 쏟아져 나갔습니다. 백성은 마음껏 아람 사람의 진을 노략했습니다. 네 명의 문둥병자에게 머물렀던 복과 기쁨이 성안 모든 사람에게 확대됩니다. 사망의 그늘에 있던 사마리아 성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자 성은 단번에 양식 문제와 경제 문제가 해결됩니다. 과연 그 다음날에는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 됩니다. 

본문은 놀라운 회복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된 결과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고 그것을 실제로 이루시는 분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부요와 기쁨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말씀을 믿지 않고 빈정거리던 장관은 성문을 지키다가 밀려드는 무리의 발에 밝혀 죽임을 당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보기는 했지만 누리지는 못합니다. 그의 비참한 죽음은 불신앙의 말로를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사마리아 성이 포위된 곳과 성안에 사망의 그림자가 가득했던 것이 왕과 백성의 불신앙의 결과였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하고 비웃는 자들 위에 임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비웃는 것이 얼마나 교만하고 위험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는 아멘으로 받고 순종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왕의 신하는 성문에서 백성의 발에 밟혀 죽었지만 마지막 날 불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발에 밟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스토리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현재 겪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다시 한 번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까? 사업하는 사람들마다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언제 이 불황이 끝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난국을 헤쳐 나갈 만한 뾰족한 해결책도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 수년 동안 오바마 행정부에서는 경제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모아 그 해법을 찾으려 했지만 확실한 답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럴 때 믿는 자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람 왕의 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게 되자 성내의 경제 형편은 참담했습니다. 배가 고파 자식들의 고기를 서로 잡아먹을 정도가 되었으니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엘리사는 이 문제가 단 하루 만에 해결되어 물가가 정상화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루 만에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개개인의 경제문제도 돌보아 주시지만 한 사회에 닥친 인플레나 공황과 같은 경제 위기도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건강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자녀에 관한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해결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루 만에 사마리아의 위기를 해결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상황에도 개입하셔서 복을 주기 원하십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위기가 오기 전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바알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바알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의 도움만으로는 이 험악한 세상에서 살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였습니다. 하나님 대신 바알을 의지하였기에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도리어 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허망한 것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그릇된 길로 갈 때 바른 길로 인도하시려고 그들을 징계하신 후에 건지십니다. 아람 군대가 공연히 쳐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작 말씀에 순종하였더라면 굶주림 속에 자식까지 잡아먹어야 하는 극한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진 후에 그것을 잘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터지기 전에 미리 예방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에 영적 기근이 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죄악됨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여호람 왕은 한 여인으로부터 백성들의 상황을 듣고 흥분하여 엘리사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왕으로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 것은 생각지 않고 모든 책임을 엘리사에게 전가하였습니다. 혹시 우리가 여호람과 같은 길에 서지는 않습니까? 내가 현재 당하는 고난이 누구 때문인지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찾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바알이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 하나님을 떠나 열심히 바알을 섬겨보았지만 결과는 죽음과 절망의 울부짖음뿐입니다. 여호와 외에 참 신이 없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분은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을 모두 구원하실 능력과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점도 없이 흠도 없이 바로 서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영적인 밤이 오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럴 때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룻 사이에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엘리사의 예언을 듣고도 믿지 않고 빈정대는 관리가 있었습니다. 그 신하의 태도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상태를 간접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과연 엘리사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회복되었으나 그 관리는 하나님이 베푸신 복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발에 밟혀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손한 태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도 성도를 가르치십니다. 고난은 높아진 마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는 고난조차 유익합니다. 그것은 고난 자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환경이나 상황을 초월하여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인간적으로는 아무 길이 없어 보이지만 말씀은 반드시 돌파구를 찾게 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 삽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말씀에 길이 있고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면 심각한 경제난도, 무서운 질병도 해결됩니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말씀 속에 담겨진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해주십니다. 

3) 받은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인플레 문제를 해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이 과정에 문둥병자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아람 진영에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양식과 보물을 취하면서 자기 것만 채우려는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동안 자신들을 무시하고 멸시했던 성안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문둥병자들은 섭섭했던 과거에 연연하거나, 적개심이나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롭게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 속에서 자신들을 맡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 누렸을 뿐 아니라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구원은 살고자 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나 필요성은 알지만 얻을 수 없다고 자포자기한 자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아람 군대의 자비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반면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나아오는 자들에게 확실한 은혜를 약속합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 삶이 풍성해집니다.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약속이 주어져도 알지 못하고 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3-15) 구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사명이 먼저 믿은 자들에게 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잠잠히 있는 것을 죄악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명감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데 사용됩니다. 

이런 자세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듣고 믿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정말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른 채 저주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북위 10도에서 40도 사이 즉 10/40 window에 해딩되는 지역은 세계 인구의 거의 2/3가 되는 40억명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가장 가난한 지역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만 구원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든지 다른 사람들이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삶을 통하여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미력하나마 값진 헌신으로 승화되기를 원합니다.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과 우리의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고 헌신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번 주일 토요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티화나 한인교회에 일일선교를 갑니다. 하루 동안에 얼마나 많은 일을 하겠습니까? 또한 처음이라 미흡하지만 작은 것부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역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움켜쥘 때보다 나눌 때가 더 아름답습니다. 작은 사랑의 실천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갚아주십니다. 보람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믿지 않아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궁극적으로 사람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문둥병자들이 하나님께 특별한 믿음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이라고 하며 절망 속에서 아람 군대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성안에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좀 한다고 우쭐대서는 안 됩니다. 

또 우리가 안 한다고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는 현재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감사함으로 감당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그저 평안한 삶만을 소망하기보다 고난을 통과해서라도 온전해지고 믿음 안에서 고난을 이길 힘을 얻도록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현실은 다소 어렵다 하더라도 보다 귀한 것, 영원한 것을 향하여 나아가며 주님 앞에 아름다운 섬김과 봉사의 열매를 보여드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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