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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강도를 만난 사람 -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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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강도를 만난 사람 -  (눅 10:25-37)
 
 
세상에는 다양한 인종과 개성을 가진 사람이 섞여서 살고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혈연이나 지연이나 학연에 따라서, 또는 비슷한 성격이나 취미에 따라서 가까운 이웃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이웃은 이런 통상적인 관계를 벗어나 언어나 종족이나 국경에 제한 없는 이웃을 가집니다. 그런 이웃은 자기와의 관계에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강령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길을 가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 중에 강도를 만나 버려져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중심입니다. 예루살렘을 등지고 여리고로 갔다는 것은 지역이나 공간의 이동이라기보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1)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은 산 위에 세워진 도시로서 해발 700m의 높은 지역에 위치한 곳입니다. 그 곳에 비하여 여리고는 지중해 수면보다 400m 나 낮은 사해와 비슷한 곳입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 거리가 35km 정도임을 감안하면 수직으로 1,000m 낙차가 생기는 길을 계속 내려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 것은 영적인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보통 인간이 사는 세상을 낮은 곳으로 표현하고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 보좌를 높은 곳으로 표현하곤 합니다(사 66:1).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우러러보고 그 곳으로 향하여 올라가는 삶을 지향하였습니다. 다윗은 그의 시편에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하고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불렀습니다(시 122:2).

2) 영적인 것을 포기하고 육적인 것을 찾는 삶입니다.

‘예루살렘’이란 이름의 뜻은 샬롬(Shalom) 곧 ‘평화’입니다. 평화는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라고 하였습니다(사 9:6). 구약시대 선민 이스라엘의 노래 가운데 시온을 향하거나 시온을 사모하는 내용이 많이 있는데(시 84:5, 137:1) 이는 모두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성전이 신약적으로는 예수님을 묘사하기도 합니다(요 2:21). 

한편 여리고는 물질과 번영의 상징으로 육체적인 만족의 도시입니다(수 6:20-21). 하나님의 백성은 육신적인 욕망을 멀리하고 신령한 축복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물질문명의 도시인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올라 온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한편 약속의 땅 베들레헴을 등지고 물질을 찾아 모압으로 갔던 나오미의 가정은 낭패와 몰락의 표본이 되었습니다(룻 1:1-5).

3) 자기의 사명을 저버리는 사람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달아나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요나 1:3에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욥바에서 배를 타고 출항했을 때 바다에는 큰 폭풍이 일어나고 배가 깨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바다 속에 던져졌고 큰고기 뱃속에서 삼일 밤낮을 지내게 되었습니다(욘 1:17).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이사야 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고 그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와 찬송을 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곳입니다. 이와 같은 고귀한 사명을 망각하고 자기 길로 가는 불쌍한 사람에게 바른 길로 인도해줄 이웃이 필요합니다.

2. 강도를 만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는 폭력으로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빼앗는 도둑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를 ‘마귀’라고 해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유형무형의 강도가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듭니다.

1) 옷을 벗겼습니다.

30절에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라고 하였습니다. 옷 벗김을 당했다는 것은 극도의 수치와 모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옷은 몸을 감싸고 보호하는 기능과 함께 사람의 신분과 품위를 나타내는 영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강도가 먼저 그 사람의 옷부터 벗긴 것을 보면 우선 그 옷이 탐나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사람에게 모욕을 주고 인격을 짓밟아 버리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무덤 사이에 있던 사람은 군대 귀신에 의하여 옷을 벗긴 채 맨몸으로 돌아 다녔습니다(눅 8:27). 솔로몬의 연인 술람미도 밤에 거리에서 야경꾼들에게 겉옷을 벗겼다고 했습니다(아 5:7). 성경에는 성도들의 착한 행실을 깨끗한 세마포로 비유하였습니다(계 19:8).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의 옷을 벗기면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계 3:18).

2) 거의 죽도록 때렸습니다.

강도는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러 거의 죽을 지경이 되도록 때렸습니다. 강도는 주먹뿐만 아니라 흉기를 소지하고 있어서, 재산을 강탈하기 위해서 폭력과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자입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여러 가지 무기와 다양한 방법으로 생명을 위협합니다. 무신론적 세상 권력을 이용하여 교회와 성도를 탄압하기도 하고, 이단과 거짓 선생들로 신앙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옛날 동방의 의인으로 불리는 욥에게도 사탄이라는 강도의 횡포가 덮쳤습니다. 순식간에 그 많은 재산과 자녀를 빼앗아가고 그것도 모자라서 욥의 몸에 악창이 나게 하여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게 만들었습니다(욥 2:7-8)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안으로는 유형무형의 강도에게 맞아서 쓰러지거나 죽음 직전의 상태에 있습니다.

3) 버림을 당했습니다.

30절에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쓰레기나 오물처럼 쓸모없고 가치 없는 것은 내다 버립니다. 어떤 물건이든지 새로 샀거나 요긴하게 쓰일 때는 소중하게 보관하다가도 낡고 효용 가치가 떨어지면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며 폐기처분해 버립니다. 그렇지만 물건이 아닌 사람을 그렇게 취급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자식이 부모를 버리기도 하고 부모가 자기 자식을 내다버리는 불행한 사태를 연출하곤 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였습니다(마 16:26).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을 따라서 지은 사람을 함부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버림받은 인간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요 3:16). 

3.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옛말에 ‘정승이 죽으면 문상이 없고 정승의 개가 죽으면 문상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권세가 있거나 재물이 많거나 유명세를 타는 사람에게는 많은 이웃이 몰려들지만 가난하고 병들고 이름 없이 버려진 사람에게는 있던 이웃도 떠나가 버립니다.

1) 소외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취급을 받고 사람들에게서 외면당하는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후 “건강한 자에게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마 9:12-13). 이는 오늘날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사람이 우리가 찾아가고 섬겨주어야 될 이웃이 되는가를 분명하게 일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외된 이웃을 찾아가고 섬기는 것을 주님께 대한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40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죽어 가는 사람입니다.

여기 강도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는 외딴 곳에서 죽은 시체처럼 버려져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들 중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못 본 척 비켜갔지만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다가가서 상처를 싸매고 치료하여 주막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돌봐주지 않으면 그대로 죽어갈 사람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 곳곳에 이처럼 죽음에 방치된 사람들이 이웃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웃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18년 동안 귀신에 시달리며 허리를 펴지 못하는 여인을 고쳐주신 것을 보고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했다고 문제 삼았습니다(눅 13:10-17). 죽어가는 생명은 방치해놓고도 이웃 사랑을 외치는 형식 종교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영혼의 생명이 절박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죄와 마귀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마귀는 맹수가 어린 양을 유린하듯이 순진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벧전 5:8). 곳곳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이 구원의 손길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하고 부르짖었습니다(시 3:1).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찾아내고 다가가야 될 이웃은 영혼의 갈급함 때문에 하나님의 손길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칫 미신이나 잘못된 이단에 빠져 영혼을 사냥하는 마귀에게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복음 전도를 통하여 이들을 구하여 내는 것이 절실하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5:20에는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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