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교개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눅 5:27-39)

첨부 1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눅 5:27-39)
   
오늘은 종교개혁 494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지금으로부터 494년 전 1517년에 독일의 수도사 마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부르짖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에 저항하여 개혁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르며,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회를 우리말로는 개신교라고 부릅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신앙개혁의 의미를 되새겨 봅시다.   먼저, 개혁교회는 개혁하는 교회가 아니라 개혁되는 교회라는 말의 의미를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내가 또는 교회가 누구를 새롭게 바꾸는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혁의 주체가 되시고 내가 그리고 교회가 그의 말씀으로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것은 루터 자신이 표준이 되어 나는 옳고 너희는 틀렸으니 바꾸어야 한다고 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인 우리가 신앙의 표준인 주의 말씀으로부터 어긋났으니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말씀을 중심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외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개혁되어야 할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494년 전에 완성된 일회성 개혁운동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 주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교회가 개혁교회이며 건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지는 교회여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세관에 앉아 일하던 레위를 불러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레위는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하여 큰 잔치를 열었고 예수님이 레위의 집에 모인 동료 세리들과 많은 이웃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너희는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시느냐 하며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의 비난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사람에게만 쓸데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하심으로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그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고 깨끗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필요치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눈치가 없는 그들은 또 다른 질문으로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세례 요한과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그러한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도 하지 않고 늘 먹고 마십니까?   그것도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 한 자리에서 먹고 마시고 있으니 불경한 행동이 아닙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데 어찌 손님들에게 금식하라 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오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다른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이 없다.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 아니라 그 새 조각이 낡은 옷을 당기어 더 해어지게 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되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불필요하고 복잡한 전통에 매여 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새 옷조각이었고 새 포도주였습니다.   주님이 선포하신 천국복음과 삶의 원리는 옛 전통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마음에라야  담을 수 있는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변하지 않은채 복음을 받으려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역동적이고 강력한 복음의 능력을 낡아진 옛 사람의 마음이 감당할 수 없어 터지고 해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원하신 것은 복음으로 변화된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주의 말씀으로 새롭게 고쳐지는 것 이것이 개혁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신앙개혁의 원리를 찾아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신앙개혁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깨닫게 됩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종교 지도자의 권위를 내세우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장로들의 유전이나 전통을 더 앞세우고 거기에 못미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정죄하고 멸시했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정신은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도 지키지 않는 사소한 율법 조항들을 만들어 백성들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예를들어, 안식일 지키는 일과 금식이나 기도 등 겉으로 보이는 경건생활에 관한613개의 규칙들을 복잡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잘 지키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며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구약에 기록된 선지자들의 글을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예언의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예언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을 이루려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그 말씀을 제쳐두고 다른 것에서 신앙의 근거와 열매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 다른 것이란 조상적부터 전해지는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들이었습니다.   말씀 그 자체보다는 말씀을 해석한 613개의 복잡한 규칙과 조항들을 강조하여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수고하였고 백성들에게는 더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제사장이나 장로들, 서기관과 바리새인 등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누리고 소유하고 있는 권력과 물질, 가문과 직위 등으로 그 복잡한 조항들을 지킬만한 시간과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가난하고 힘이 없는 백성들은 이방 민족의 침략과 식민정치의 희생자들이었으니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 고단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화려하고 값진 옷을 걸치며 고상한 모양으로 성전을 드나들며 정기적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구제생활을 할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금식은 자신을 괴롭게 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한 것인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일반인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금식하려 하지 않아도 먹을 양식이 부족하여 끼니를 거르기 일수였으니 종교적인 의미의 금식기도는 기운이 없어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고 시장과 거리에서 은나팔을 불며 폼나게 자선을 베풀었지만 일반 백성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구제는 커녕 누군가 나에게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 없을까 목을 빼고 기다리는 형편이었습니다.  죽을 병으로 아파 신음하며, 몸을 다쳐 금방 치료받지 않으면 불구자가 될 형편이지만 의사를 찾아갈 여유가 없어 그럭저럭 살다가 평생 불구자로 살아야만 하는 가련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교의 유전과 전통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특별한 사람들이나 지킬 수 있었고 일반 백성들은 지키려 해도 지킬 수 없는 종교법이었으니 체념하고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백성들을 향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이라 비방하고 정죄하였습니다.   결국 유대교 지도자 계급 외에 일반 백성들은 죄인으로 낙인 찍혀 주눅이 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에 아무 기쁨과 소망이 없습니다.   무거운 멍에와 짐을 지고 의무감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런 세상에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 하시며 지치고 고단한 영혼들을 부르셨습니다.  

죄인 취급 당하고 설움 속에 살고 있는 백성들,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 주님은 그들을 부르셨고 함께 먹고 마시며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눈먼 자에게 빛을,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이 깨끗함을 입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을 살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께 고침받으러 찾아온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고 만나주셨고 소원대로 고쳐주셨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받고 따돌림 당하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고 그의 집에 들어가 세리들과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며 천국복음을 소개하셨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에도 불구자와 병자들이 고침받기를 원하면 거절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즉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비방거리가 되었고 미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명령하는 안식일 준수법과 정결법을 어겼다는 비방과 고소가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특히 안식일 문제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가장 예민한 율법 조항 중의 하나였으니 예수님의 안식일 병고침은 유대교 전통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죄악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안식일에 일하시는 주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눅6:5) 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의 정신을 제대로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질병으로 시달리는 환자들, 불구자로 평생을 살며 참다운 쉼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고쳐 자유하게 하는 것이 곧 안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고쳐 쉼을 주는 것이 곧 안식일에 할 일이라 말씀하심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의 비방을 부끄럽게 하셨고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소망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예수를 미워하고 죽이려 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조상들의 유전과 율법에 대항하는 반란과 선동이었으며 나사렛 예수는 유대교 입장에서 볼 때  이단아였습니다.   그러나 그 전통과 유전에 묶여 자유함이 없던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개혁자였습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삶은 막힌 담을 헐고 답답한 인생에 시원한 길을 열어주시는 개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복음은 율법 선생들의 가르침과 달랐습니다.   병고치심, 죄사함을 선포하심,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주심 등은 이제껏 알지 못하였고 누리지 못했던 새로운 삶이었으며 획기적인 신앙개혁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개혁자이셨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사사건건 예수께 책망을 들은 이유는 그들 자신이 스스로 율법의 표준이 되어 종교적인 전통과 유전을 고수하며 변화되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  영적 교만으로 가득 차 모세의 자리에 앉은 그들은 율법의 참 정신을 오해하였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위선적인 삶을 경건인양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율법의 주인이시며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은 사람을 소중하게 보시는데 바리새인은 오직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질병과 생활의 문제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을 보시고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일하시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저 높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전통과 형식만 고집하며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할 수 있습니다.    낡은 부대가 아깝다고 버리지 못하고 거기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포도주의 강력한 발효작용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부대가 터져버립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굳어진 습관과 전통에 매여 부자유스러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 물질봉사와 경건생활,  복음 전도와 선교 등 내 신앙을 훈련하고 자라가게 하는 활동들이 또 하나의 무거운 멍에와 짐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동료 교인들이나 목사의 시선을 의식하고 억지로 마음에도 없는 종교활동을 하느라 심신이 고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의 신앙생활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또 하나의 낡은 가죽부대가 되고 맙니다.   우리에게 참 자유와 기쁨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입어 살기 위해 우리는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할 때 개혁교회는 계속하여 자신을 개혁하는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교회가 자기 개혁을 멈추지 않기 위하여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달라는 그들의 비판과 충고를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선적이고 정확한 신앙개혁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좋은 전통이나 교회 밖에서 들려오는 조언을 귀담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개혁의 중심이며 진정한 신앙개혁자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으로 보여주신 모범을 말씀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사람들의 영혼을 향하고 있습니다.  목자도 없이 빈 들에서 방황하는 양들을 모으고 먹이는 선한 목자입니다.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으신 선한 목자입니다.  그 마음을 닮아 목자의 심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아끼고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값진 선물로 받아 날마다 기쁨으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새롭게 변하면 교회가 새로워집니다.   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날마다 새로움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이것 또한 신앙개혁의 소중한 모습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