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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뿌리는 수고, 거두는 기쁨 (시 1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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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까? 지난 9월 17일 통계청은 “2001년 생명표 작성결과”를 발표했다. 매 2년마다 발표되는 이 통계에 의하면 2001년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76.5세로 남자가 72.84세, 여자가 80.01세다. 1999년에 비해 남자는 1.13년, 여자는 0.79년, 10년 전보다는 남자 5.1년, 여자 4.1년이 각각 길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평균수명이 늘어나다보니 전에는 60세만 넘어도 장수했다고 해서 회갑잔치를 성대하게 했지만 요즘은 70세를 넘기는 것은 보통이어서 회갑잔치를 잘 하지 않고 칠순잔치를 성대하게 한다. 그리고 80세를 넘겨 사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다. 100세를 넘겨 사시는 분들도 TV 등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러나 사람이 오래 산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육체는 죽더라도 그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죽음 이후의 삶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영생이요 다른 하나는 영벌이다. 영생은 천국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고 영벌은 지옥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다. 똑같이 영원히 사는 것이지만 천국에 들어가서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하지만 지옥에 들어가서 사는 것은 영생이라고 하지 않고 영벌이라고 한다. 그것은 영원히 죄의 형벌을 받고 사는 것이기에 그것을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오래 살았는가 짧게 살았는가가 중요하지 않다. 부자로 살았는가 가난하게 살았는가, 많이 배웠는가 못 배웠는가, 높은 지위에 올라갔는가 그렇지 못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에 영생의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 영벌의 지옥에 들어갈 것인가이다. 왜냐하면 이 땅 위에서의 삶은 유한하지만 죽음 이후의 삶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이 영벌의 지옥에 들어가는가? 그것은 죄가 없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우리 모두가 죄인인데 과연 누가 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예수를 믿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왜인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은 사람만이 거룩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사람이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있고,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을까? 제일 먼저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땅에 씨를 뿌리고 심는 사람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10:13-15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면서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했고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이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는가? 바로 우리들이다. 먼저 예수를 믿은 우리들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4:48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하시면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우리 모두가 이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오늘 본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시이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러 올라가면서 부르는 찬송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이 시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바벨론 제국에 의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주넌 587년에 나라가 완전히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도 다 파괴되었고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 

1-3절은 그 포로생활에서 처음으로 풀려났던 때를 기억하며 노래하는 내용이다. 1절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희망이 없었다. 그들이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그들 스스로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벗어날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구원과 해방이 주어졌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정말로 꿈꾸는 것 같았고 웃으며 노래하며 찬양하게 되었다. 2절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헤였다.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포로생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신 것이었다. 3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지금 그 때를 생각하고 그 때의 감격을 다시 회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내가 스스로 죄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게 하시고 그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내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를 멸망에서 구원해 주셨다. 나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러분의 가슴에 구원의 감사와 감격이 살아 있는가?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가?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가득하고 찬양이 넘치는가?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찬양하며 살라.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놓임받고 돌아온 그들에게 한 가지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아직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깃이다. 실제로 바벨론으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꺼번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대략 세 번에 걸쳐서 돌아왔다. 맨 처음 전 537년에 돌아왔고 그 다음에 79년 뒤인 주전 458년에 돌아왔고 완전히 다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14년 후인 주전 444년이었다. 

오늘 말씀은 먼저 돌아온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그들도 속히 돌려보내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이다. 4절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여기서 ‘남방의 시내’라고 했는데 남방은 유대나라 남쪽의 네게브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네게브 지역은 아주 메마른 곳으로 건기에는 시냇물이 흐르던 곳이 전혀 물이 없이 바짝 말라버린다. 그러나 우기가 되면 많은 비가 와서 시냇물이 넘쳐 흐르게 된다. 바짝 마른 시내가 비가 오면 물이 넘쳐흐르듯이, 하나님께서 비를 주셔서 마른 시내가 물이 넘쳐 흐르듯이, 아직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동족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속히 돌려보내 주시기를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구원받아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며 살고 있지만,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생을 얻지 못하고 죄악 중에 살면서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내가 구원받았으니, 나는 이미 영생을 얻었으니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의 구원에 대해서 나는 아무 책임도 의무도 없는 것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 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말씀하셨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힘이나 노력이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아무런 값도 치르지 않고 하나님께 거저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거저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거저 나누어 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5,6절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바벨론의 포로들과 또 그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이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자세와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여기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씨를 뿌리는 농사로 비유하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를 살펴보자.

첫째, 씨앗이 있어야 한다. 농사를 지어서 곡식을 거두려면 먼저 밭에 뿌릴 씨앗이 있어야 한다. 밭만 있고 씨앗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뿌려야 할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가복음 4: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그러므로 내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구원의 도리, 복음의 핵심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5분 이내에 사람이 왜 구원받아야 하고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둘째, 밭이 있어야 한다. 씨앗만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씨를 뿌릴 밭이 있어야 한다. 밭을 준비해야 한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아무데나 뿌리지 않는다. 밭에 뿌려야 한다. 우리가 복음의 씨앗을 뿌릴 밭은 복음을 받을 사람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밭은 사람의 마음이다. 즉 복음을 듣는 사람의 마음이 곧 밭이다. 우리가 천국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들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즉 내가 전도할 대상자가 있어야 한다. 아무에게나 전하는 것이 아니라 들을 사람을 찾아서 정하고 그 사람의 마음에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예수를 전하겠다고 정해야 한다.

셋째, 씨를 밭에 뿌려야 한다. 씨앗을 준비하고 밭을 준비해 놓았다고 저절로 농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씨를 가지고 나가서 밭에 뿌려야 한다. 좋은 씨앗이라고 잘 간직해 두기만 해서는 안 된다. 씨앗을 가지고 나가서 밭에 뿌려야 한다. 씨룰 밭에 뿌리는 수고가 없이는 결코 열매를 거둘 수 없다. 
복음을 알았고 복음을 전할 대상자를 정했으면 그를 찾아가서 그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해야 한다. 예수생명 큰잔치 때에 교회로 나오라고 초청해야 한다. 그가 예수를 믿게 해달라고 기도만 하고 있으면 저절로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8:19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 마가복음 16:15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직접 일어나 나가서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넷째, 희생이 있어야 한다. 5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다”고 했고 6절에도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간다”고 했다. 왜 씨를 뿌리는데 눈물을 흘리게 되는가? 왜 씨를 뿌리면서 울어야 하는가? 씨를 뿌리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씨를 뿌리는 일에 방해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때로는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뿌린 씨가 날리기도 한다. 때로는 바람 때문에 흙먼지가 눈에 들어가기도 한다. 때로는 날씨가 너무 더워서 땀을 흘리게 되고 지치기도 한다. 때로는 밭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어서 그 밭을 갈기에 너무나 힘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를 반드시 뿌려야 한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씨를 뿌려야 한다. 밭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도 눈물을 흘리며 울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많은 어려움과 방해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조롱하고 괴롭히기도 한다. 아무리 수고를 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아서 속이 상해서 울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든 방해와 악조건을 이기고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눈물을 흘리며 울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고 복음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야 한다. 씨를 뿌리기만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농부는 없다. 씨를 뿌렸으면 그 씨가 잘 자라도록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벌레도 잡아주고 김도 매는 수고를 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것이지만 씨를 심는 것과 물을 주는 것은 사람이 해야 한다. 

복음의 씨앗을 뿌렸으면 그 씨앗이 잘 자라도록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야 한다. 그것은 사랑을 주는 것이다. 복음을 받을 사람에게 밭을 가는 심정으로 사랑을 주어야 한다. 복음을 받는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 복음을 들은 사람에게 계속해서 쉬지 않고 사랑을 베풀고 섬겨야 한다.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을 들을 사람을 위해서, 전도대상자를 위해서, 내 마음에 품고 있는 태신자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복음의 씨앗은 눈물로 뿌려야 한다. 눈물의 기도와 함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성서주석가 매튜 헨리는 “눈물을 흘리는 그 자체로 씨가 되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사랑으로 흘리는 눈물, 간절함으로 흘리는 눈물 그 자체가 씨앗이 되어서 축복의 열매, 구원의 열매, 은총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랑으로 흘린 눈물, 믿음으로 흘린 눈물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흘린 눈물은 반드시 기쁨과 웃음으로 갚아주시는 것이다.

여섯째, 인내해야 한다. 씨를 뿌린 후에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야 거두게 된다. 가을이 보리를 심은 것은 봄이 되어야 거두게 된다. 오늘 심고 내일 거둘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농부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농부는 씨를 뿌린 후에는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서 이삭이 열리고 결실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추수할 때가 되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서 5:7,8에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고 했다. 갈라디아서 6:9에도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끈질지게 전도하라. 끝까지 인내하며 쉬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열매 맺게 하신다.  

일곱째, 믿음과 기대를 가져야 한다. 씨를 뿌리는 농부는 씨를 뿌리면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을 믿고 기대하며 씨를 뿌린다. 이런 믿음과 기대가 없으면 씨를 뿌릴 수도 없고 희생할 수도 없고 물을 주고 거룸을 주는 수고를 할 수도 없고 끝까지 기다릴 수도 없다. 믿음과 기대 때문에 씨를 뿌린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셨다. 씨를 뿌리면 반드시 거두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며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의 씨앗을 뿌릴 때에 풍성한 열매를 거둘 그날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내가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되면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될 것이요 복음의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것을 믿고 기대하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나의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위대한 꿈을 꾸어야 한다. 이런 믿음과 기대를 가져야 열심히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이 일곱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씨를 뿌리는 것이다. 일단 씨를 뿌려야 열매를 기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입을 열어 예수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빌리 그래함목사님의 전도집회에서 50대의 사업가가 예수의 제자가 된 후에 이런 간증을 했다. “저는 오랜만에 교회에 나갔습니다. 뜻밖에도 제가 존경하는 선배가 그 교회의 장로님임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어째서 당신은 지난 23년 동안이나 나를 알면서도 한 번도 나에게 예수가 구세주이심을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행실이 온전하고 양심적인 사람이었으므로 구태여 교회를 나가고 예수의 제자가 되지 않아도 이 선배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즉 이 선배장로님은 나에게 예수를 굳이 믿지 않아도 된다는 벽이 되어온 것입니다.” 이 장로님은 23년 동안이나 알고 지내는 후배에게 한 번도 자기가 예수의 제자이며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지 않았다. 그가 착하고 바르게 살았으나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임을 밝히지 않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해서 본의 아니게 그가 예수를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바르고 진실하게 양심적으로만 살면 굳이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지 않아도 저절로 전도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나를 보고 예수를 믿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무리 내가 바르고 진실하게 양심적으로 살아도 사람들이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 것을 모른다면 그들이 나의 삶을 통해서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의 제자임을 그들이 알게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저 사람이 본래 인간성이 좋고 인격이 훌륭해서 저렇게 바르고 정직하게 행동한다”고 말하게 하지 말고 “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어서 남과는 다르게 산다”는 말을 들어야 전도가 된다. 뿐만 아니라 또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더라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내가 믿는 예수를 당신도 믿으라고, 예수만이 우리의 생명의 구주시라고 증거해야 한다. 그래야 복음의 열매가 맺어진다. 

1965년 Miss America선발대회에서 그해의 Miss America로 뽑힌 Van Dyke양이 왕관을 받으러 나오는데 그의 손에 예쁜 성경이 들려져 있었다. 사회자가 “미인의 장식품으로 성경이 사용된 것은 처음 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Van Dyke양은 “이 성경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입니다. 미스 아메리카가 되는 것보다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들고 나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분명히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을 분명히 믿는다면,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면 어찌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모든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삼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나의 구원에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눈물로 씨를 뿌려서 풍성히 거두는 기쁨을 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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