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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과분함을 넘어 (고후 1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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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분함을 넘어 (고후 12:8-10)
 

1. 불만 혹은 불평

성도 여러분, 어떤 시설이나 기관, 혹은 특정 프로그램이나 제품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설문지들이 많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학교와 교육에 대한 학부모 만족도 조사’, 어떤 상품에 대한 만족도 등이 그런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만약 누군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삶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그런데요. 이 만족도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 다른 것 같습니다. 지난 2009년 월간 <목회와 신학>이 전국 2백40여명의 목회자를 대상으로 <부부생활 만족도 조사>를 했었는데 그 결과, 우리나라 3,40대 목회자들은 대체적으로 아내에 대한 만족도가 높으며, 자신이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조사 대상자의 53.5%가 아내에 대해 만족하거나, 33.5%가 매우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응답자의 87%가 사모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으며, 자신이 아내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최근 가정사역단체 <하이패밀리>가 전국 교회 사모 37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 자신이 행복하다고 응답한 사모는 겨우 8.7%인데 반해, 자신이 불행하다고 응답한 사모는 18.2%였습니다. ‘불행한 사모’가 ‘행복한 사모’보다 두 배 이상 많다는 것이죠. 그리고 나머지 73.1%의 사모는 “그냥” 혹은 “보통”이라고 답했는데요. 이것을 전문가들은 사모이기 때문에 “그냥” 혹은 “보통”이라고 했지 실제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같이 사는 부부도 만족도 행복도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에게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에 만족하십니까? 단어와 어감을 조금 달리한다면, 혹시 불만을 갖고 계신 것, 불평하고 있는 것은 없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약함에 대한 것일 수 있고, 여러분이 가지지 못한 것, 즉 결핍이나 부족한 것에 대한 것일 수 있으며, 남들과 비교해 볼 때 그들보다 못한 것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지난날의 실수나 실패에 대한 불만이나 불평일 수도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여러분의 배우자, 혹은 자녀에 대한 불만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자 하는 것은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과 관계된 그 모든 것에 대해 이러저러한 불만이나 불평이 전혀 없냐, 모든 것에 다 만족하고 계시냐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저는 어떨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보시기에 저는 모든 것에 대해 만족하고 사는 것 같습니까? 지난 화요일 밤, 잠을 자지 못하고 거의 뜬 눈으로 지샜습니다. 잠이 안오니까 사람이 부정적이 되더라고요. ‘난 왜 이런가? 난 왜 여기 있는가?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 동기들은 어떻게 사역하고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저를 때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제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에 대해 하나님의 참으심, 용서, 그리고 그 위에다 과분한 은혜까지 주셔서 제가 받고 누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 숨 쉬는 것만도 은혜구나! 지금 곁에 아내가 잠들어 있고, 아이들이 나름 잘 살고 있으며, 부모님들이 강건하시고, 교회가 안정된 … 이 모든 것이 내게는 과분한 은혜구나!’이 깨달음으로 인하여 갑자기 정신이 버쩍 들면서 더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얼른 새벽기도 와서 오늘 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어떤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 그래서 불만과 불평을 아무리 쏟아내도 당연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도대체 그의 형편은 어떠했을까요? 그리고 그 가운데서 그가 보여준 삶의 태도는 어떠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을 본문을 통하여 찾으시면서 여러분이 받은 은혜를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2. 감당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 만족하다!

1) 바울의 자랑?

위대한 주님의 사도 바울은 당시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곤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과 유대인이 아닌, 이방지역에서 이방인들만 상대하여 사역할 뿐 아니라, 계속 땅 끝으로 가려고 하는 것에 대해 유대인들은 ‘혹시 그가 정통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천성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닐까?’하는 그의 정체성에 대한 오해와 비난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 사도가 ‘유대적 기독교, 즉 율법적인 기독교와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서 복음의 본질에 대해 비난했습니다. 

또 ‘바울은 사도가 아닐 것’이라고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일군이 될 수 있느냐?’하는 그의 직분, 즉 그의 사도성에 대해서도 비난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의 이런 악의에 찬 비난에 대해서 바울은 세상 모든 문제와 사람에 관한 일이 다 그렇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그 내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나아가 영적인 성격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알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름답고 선한 것보다는 악하고 부정적인 것이 더 빨리 번지지 않습니까?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의 말이 얼마나 강력했든지, 바울이 아무리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도 없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조금 색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던 일로서, 그 비난에 맞대항해서 일일이 답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1장 16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그리고 17절,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자신이 자기 자랑이나 늘어놓는 어리석은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 그리고 성도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주님께서도 원치 않는 일이지만, 그렇지만 마치 ‘자랑’처럼 자신을 변호해 보겠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기 자랑을 해보겠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정말 바울을 형편없는 사람으로 여길 뿐 아니라, 바울을 그렇게 보는 것 때문에 바울이 전한 복음과 그의 사역까지 平價切下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일부 사람들의 바울에 대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의심으로 인하여 바울 자신이나 자신의 사역이 무시당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도 무시당하고 있었기에, 바울은 그들의 방식대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자랑을 한 번 해 보겠노라면서 나선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바울의 자랑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적이나 상대방을 기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과 그에 휩쓸린 교인들이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 바울을 바라보아서 그것 때문에 주님과 복음에 손상이 가는 일을 바로 잡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2) ‘고난과 약함과 가시’ 자랑

그러면 바울이 자랑한 것이 무엇입니까? 

➀ 첫째, 자신은 정통 유대인이라는 겁니다. 바울이 이방사회만 싸돌아다니고 이방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등, 계속 주변만 맴도니까 유대인들이 바울의 출신 성분을 의심했지만, 사실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정통 이스라엘 사람, 순수한 아브라함의 자손, 즉 이방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혈통이라고 말합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父系와 母系 쪽으로 순수한 유대인 혈통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정말 내세울만한 자랑거리였습니다.

➁ 두 번째, 바울은 자신이 성도들과 떨어져 있을 때나 혹은 편지로서는 아주 강력한 영성과 리더십을 발휘하지만, 실제로는 별 볼 없는 존재요, 스스로 모순된 사람이요, 따라서 사역자으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러운 사람이라는 지적에 대해서 반박했습니다. 그 반박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넘치도록 수고했고 지금도 수고하고 있다는 것, 즉 이미 무너졌거나 부러졌거나 꺼져버렸을 것인데도 여전히 자기 사역을 잘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주님의 일군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의 바울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우선 그는 자신이 수도 없이 옥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감옥 생활을 해 본 사람은 감옥의 매운 맛을 압니다. 누구든 한 번 겪은 지옥의 고통을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주 감옥을 들락날락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매를 얼마나 맞았는지 그 수를 셀 수도 없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여러 번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40에서 하나 감한 매”, 즉 39대를 때리는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이것은 죄수를 결박하여 기둥에 묶고 그 옷을 벗겨 어깨와 가슴을 때리는 형벌로서, 당시 죄수들은 39대를 다 맞기 전에 숨을 거둘 정도로 악랄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 번 笞杖으로 맞았습니다. 가죽 끈에다 납덩어리를 매달아 때리는 것으로 주로 노예들에게나 가하던 형벌이지만, 그조차 너무나 잔인하여 금지되었던 것인데, 바울은 이 笞杖을 세 번이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돌에 맞아 죽을 뻔 한 적도 있었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파선한 배에서 일주일 밤낮을 지낸 적도 있었습니다. 갑작스런 홍수로 불어난 강에서 익사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행자들을 노리는 강도를 만나서 당한 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同族인 유대인들에게 당한 위험스러운 순간도 있었고,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 등 그가 겪은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외에도 사람으로부터 당한 고난, 특히 ‘형제’라고 다가온 자들에게 당한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이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당한 고난이 어떻습니까? 그 하나 하나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바울은 왜 이런 고난을 당했습니까? 그의 팔자가 드세어서 그렇습니까? 과거 예수 믿기 전 행실이 아주 나빠서 그렇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고난은 특별히 바울에게만 주어진 고난이었을까요? 바울이 자신이 겪은 고난을 말하는 의도는 주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고난을 만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부득불 자랑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자랑할만한 것은 못된다고 말하는 것이죠.

➂ 바울이 자신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일군임을 주장하는 세 번째의 것은 11장 28절 이후에 있습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즉 자신이 지금까지 받은 고난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이 ‘따로 있다’고 표현합니다. 또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엄청난 무게로 바울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눌러서 마치 질식하여 죽을 것만 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염려였습니다. ‘어느 교회, 어느 성도가 혹시 실족하지는 않았을까?’ ‘교회 안에 분파가 생긴 것이 다시 하나로 합쳐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까?’ ‘어떤 거짓 교사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성도들이 미혹을 받아 교회를 떠났는가?’ …. 이런 염려가 사역하다가 만난 고난이나 자연재해보다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바울이 참된 그리스도의 일군이라는 증거이지 않습니까?

➃ 바울이 마지막으로 자랑은 아니지만, 그가 내세우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11장 30절과 12장 5절과 9절이 말하는 “약한 것”과 12장 7절에 있는 “육체에 가시”라는 것입니다. 먼저 “약한 것”이란 헬라어로 “아스데네이라”라고 하는데요, 이것은 4복음서에서 예수님에게 병고침을 받으러 온 사람들의 ‘질병’을 뜻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약한 것”이란 육체적 약함, 즉 여러 가지 질병을 의미하며, 그 질병으로 인하여 무기력하고 힘 없고 허약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가시”라는 것입니다. 이 “가시”는 성경원어로 “스콜롭스”라고 하는데요, 그 의미는 ‘뾰쪽한 것’, ‘말뚝’, “뾰쪽한 창”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경의 “가시”라는 말은 ‘아주 작은 생선뼈나 혹은 아주 작은 뭔가가 몸에 박혀 고통을 주는 정도’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 말을 원문에 맞추어 직역하면 ‘바울의 몸에 말뚝이나 혹은 뾰쪽한 창이 박혀 있어서 그것 때문에 고통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표현이 짐작이 되십니까? 

몸에 큰 창 같은 것이 하나 박힌 채로 살아가는 고통, 그것이 얼마나 크고 심했든지 바울은 그것을 “사탄의 사자”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고후 12:7). 이 말은 이 가시가 그에게 큰 시험거리로서 영적인 문제까지도 일으키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육신에 박혀서 그토록 그를 괴롭게 하고 약하게 만들었던 ‘가시’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루터나 칼로비우스 같은 학자들은 이 “가시”를 구체적으로 ‘무엇이다’라고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바울이 직접적으로 사탄의 공격을 받았던 그 무엇이었다고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니스와 어거스틴은 ‘가시’는 바울의 마음에 있었던 음욕, 즉 육신의 정욕이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혼자 살았던 바울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이 불같이 치밀어 오르는 욕정이었다는 것이죠. 크리소스톰이나 칼빈은 ‘가시’는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날카롭고도 치명적인 방해와 비난의 화살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어쩌다 한 번 듣는 비난과 저주도 잘 잊혀지지 않고 고통을 주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자주 자신을 향하여 이런 저런 비난을 해대는 것 때문에 바울의 심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현대에 와서 많은 학자들은 크리소스톰이나 칼빈의 견해를 발전시켜 이 ‘가시’는 바울에게 일어났던 히스테리나 우울증 등 정신적인 질병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이것이 바울을 괴롭힌 편두통일 것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간질병이었을 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앓았던 심한 眼科的인 疾患이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육신에 있었던 이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사탄의 사자”라고 할 만큼 지독한 고통이자 영적인 시험거리였다는 것, 그의 사역과 생활에 엄청난 지장을 주었다는 것, 그래서 그것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라는 것, 따라서 바울에게 최대의 약점이자 장애물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가시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보다 그것 때문에 자신이 얻게 된 것, 그것 때문에 누리게 된 복을 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가시 때문에 얻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9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것은 주님께서 특별하게 바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족하다”는 말은 ‘충분하다, 넉넉하다, 적당하다’는 말의 수동태입니다. 즉 바울은 그 가시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난을 당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로 인하여 정말 만족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비록 자신이 기도한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복된 일입니까? 주님의 음성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부족하고 모자라고 불편한 것 때문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그 만큼 만족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두 번째로 바울이 이 가시로 인하여 깨달은 것을 9절 하반절,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역시 바울에게 직접적으로 들려주신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내용은 바울의 약함으로 인하여 바울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웠으며, 그것 때문에 몸도 마음도 약해졌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더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을 더욱 의지하는 바울에게 놀라운 능력으로 채워주셨습니다. 분명히 그 문제 때문에, 그 가시 때문에, 그 어려움, 그 아픔 때문에 안 될 일인데도, 일이 성사되고, 불가능한 일이 현실이 되는 등,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그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면서 바울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만약 자신에게 있었던 그 가시가 없었더라면 결코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에게도 이런 가시, 즉 치명적인 약점이자 장애물이 되는 것이 있습니까? 바울처럼 “육체에 가시”라고 할 만한 것이 될지는 모르지만, 제게도 치명적이 약점이 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젊을 때부터 기도해왔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주님의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험과 깨달음과 고백을 통해 제가 확신하는 것은 ‘저의 가시도 제게 주님의 음성을 듣게 만들어줄 것이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것, 그래서 그 가시로 인하여 정말 기뻐할 수 있게 되리라는 소망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3. 과분해 함을 넘어!

말씀을 맺겠습니다. 너무나 열악하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주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사역하던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그렇게 수고하고 고생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저주라는 것에 대해 한풀이 하듯이 호소하는 것입니까? 물론 그가 스스로 어리석다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하려는 듯 보였으나 실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과 직분 수행을 변호했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 그리고 자신의 약함이나 가시 등에 대해 말한 뒤, 결론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만족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현실이 불만족 투성이이지만 그래도 만족한다는 위대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만족한다는 것이 바울의 최종 고백이 아닙니다. 바울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과 “자랑”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실까요?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 그러므로 … 기뻐하노니.”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크게 기뻐함”은 성경 원어로는 한 단어입니다. 즉 우리 말로는 “큰”과 “기쁨”이 나뉘어져 있지만, 사실은 한 단어라는 말이죠. 그것은 ‘최상의 기쁨, 가장 큰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이 그렇다는 말입니까?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 복음과 교회 때문에 당하는 고난, 육신의 약함과 가시 등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랑한다”는 말은 ‘뽐낸다, 우쭐거린다’는 뜻입니다. 그가 뽐내고 우쭐거린 것은 자신의 약함과 가시였습니다. 사실 이 표현은 ‘反語法’입니다. 바울이 실제로 자랑했다는 말이 아니라, 굳이 내세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 복음과 교회 때문에 당하는 고난, 육신의 약함과 가시 등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이런 표현을 통하여 말하려는 결론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자신을 향한 그 엄청난 반대와 비난, 그 가운데서도 계속 되는 주님과 복음을 위한 고난, 그리고 육신의 약함과 가시 등에 대해 만족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크게 기뻐하고 적극적으로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 삶의 고난, 육신의 질병이나 약함, 그리고 인생과 신앙의 가시가 되는 것에 대해 전전긍긍해 하면서 괴로워하고 숨기기보다 바울처럼 그로 인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능력을 맛보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만족할 수 없는 것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도구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만드는 초청장이 된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기뻐하고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여러분의 삶이 이와 같이 되시기 바랍니다. 도무지 만족할 수 없는 것, 불만을 터뜨리고 불평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그 문제들로 인하여 분에 넘치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시고, 더 나아가 그것을 자랑하고 알리는 자리까지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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