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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머나 교회에게 (계 2:8-11)

첨부 1


본문: 요한계시록 2:8~11
제목: 서머나 교회에게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나의 교회!

2. 서머나 교회에게

계시록 2: 8-11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저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Introduction

계속해서 편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편지를 보내는 이유가 참 여러 가지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보내는 목적과 더불어서,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은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인 빅토르 위고가 쓴 책입니다. 정말 하찮은 범죄로 인해 19년을 감옥에서 살았던 사랑의 이야기 있습니다.
정원사로 일하면서 온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한 가장이,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막 구운 
빵이 진열되어 있는 빵집 앞을 지나다 그것을 훔치게 된 이야기로 시작하지요. '레 미제라블'이라는 말뜻이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이후 내용은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빅토르 위고가 그 소설을 쓰고는 궁금했습니다. 이런 소설이 잘 팔렸는지. . .
그래서 출판사에 편지를 했답니다."?" 출판사에서 답신이 온 것도 아주 간단했습니다. "!"
무슨 뜻이었을까요?
"이 책이 잘 팔립니까?" 그랬더니 "의외로 잘 팔리네요!"라는 의미였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편지가 기네스북에 기록된 가장 짧은 편지였다고 합니다.

편지를 쓰는 사람이나 답장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목적 혹은 의도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올바로 이해해야 오해도 없고, 긍정적인 일들이 발생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 중에 "젊은 부부학교"가 있습니다. 하루는 진행하는 목사님이 모든 남자들에게 "여보 사랑해!"라는 문자를 아내에게 보내도록 했고, 바로 오는 반응을 서루 나누어 봤답니다. 이런 내용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온 응답은 "응 나도 사랑해요. . .고마워요. 성경공부 잘 마치고 운전 조심히 오세요" 이 때 일제히 '오 오 하며 자신들은 어떤 답을 받을지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답장이었답니다. 
"성경공부 제대로 하는 거 같네. . ." 그런데 이제부터가 재미있는 반응들입니다. 
"오냐. . 이제 철 좀 들어라!"
"뭐야! 나 몰래 무슨 사고 친 거야? 솔직히 말해 어서!"
"말로 대충 때울 생각 마!" 알고 봤더니 내일이 아내 생일이었답니다.
"왜? 목사님이 시키디?"
그래도 응답을 받은 사람들은 조금 낫습니다. 끝내 응답을 받지 못한 한 아빠는 너무나 쓸쓸하게 돌아갔다고 하네요.
그래서 집에 가서 아내에게 물었답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보냈는데 왜 답장 안해?"
그랬더니 심드렁하게 아내가 그러더랍니다. 
"아? 그거 당신이 보낸 거였어? 스팸 인줄 알고 지웠어!"

편지와 그 답은 그 사람의 상황과 관계를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현재 그 교회가 처한 상황과,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에 대하여 우리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에베소라는 도시가 가지는 지리적인 특징은 소 아시아지역의 무역과 문화, 그리고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기에 매우 번영한 곳이었고 종교적으로도 아데미라는 풍요와 축복을 상징을 하는 여신을 숭배하는 곳이었기에 매우 타락한 곳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편지를 받기를 "우상숭배를 거절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한 너희들의 수고와 행위와 인내를 내가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첫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버렸다는 첫 사랑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는 예수 안에서 맺어진 성도들 사이에 가져야 했던 신뢰와 섬김의 모습을 의미하기도 하고, 예수 안에서 처음 가졌던 구원의 감격을 의미하기도 하고, 주님 앞에 온전히 헌신하고 자 다짐했던 믿음의 첫 경험들 이런 모든 것들을 주님은 첫 사랑이라고 말씀을 하셨고 에베소 교회에게 너희가 이런 은혜의 첫 경험들을 버렸다고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권고하시길 "은혜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라, 그리고 첫 사랑을 회복하라"고 권고하셨음을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편지 2번째로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편지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에베소 교회에서 북쪽으로 8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항구 도시입니다. 이 서머나는 지금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에베소와는 달리 지금도 무역과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크게 쓰임을 받고 있는 도시입니다. 사도요한이 이 편지를 쓸 당시에만도 인구가 2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 도시였다 하니 이 도시가 얼마나 크고 화려한 도시였던가? 알게 됩니다. 이 서머나는 지금 터키의 "이즈미르"라고 하는 도시입니다.

서머나라는 말의 뜻은 향료인 "미르"를 의미합니다. 이 "미르"라는 향료는 집안에 배여 있는 냄새를 제거하는데 사용하기도 하고 시체에 넣는 방부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엄청난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한 이 서머나 교회의 모습은 썩어질 세상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방부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한 아름다운 교회였고,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향기로운 향유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이 서머나 교회는 누구에 의해서 언제, 어떻게 세워졌는지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추측하기는 행19장에 에베소 교회를 중심으로 3년 가까이 선교사역에 온 정성을 기울였던 바울 선교의 한 열매가 아니었겠는가? 하고 추측을 할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남달랐던 이 서머나 교회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매우 신앙이 건전한 교회였고 영적으로 성숙한 교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는 질책과 책망의 글은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위로와 격려 그리고 믿음으로 이 길 경우에 주시겠다는 축복의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참으로 좋은 교회의 모습을 가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희랍신화를 보면 한 섬에 사이렌(Siren)이라는 여신이 있습니다. 그 여신은 배가 섬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환상적인 노래로 배를 침몰시켜서 오디세우스(Odysseus)는 뱃사공들의 귀를 틀어막아 겨우 그 섬을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오르페우스(Orpheus)라는 노래하는 신은 자기가 탄 배의 뱃사공들을 위해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그러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도 뱃사공들은 오르페우스의 노래를 들으며 가볍게 그 섬을 지나갔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당시에 있었던 박해가 피해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박해의 순간에도 그들이 바라보아야 하는 것, 지켜야 하는 믿음이 그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들어야 하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서머나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

8. .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오늘 본문 계1:8절에서 주님은 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계실까요? 
서머나 교회에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자신을 다시 소개하신 주님은 또한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은 죄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은 처음에도 서머나 교회도 함께 하셨지만 마지막에도 함께 하실 분이십니다.
그 분은 살아계셔서 지금도 서머나 교회에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서머나 교회가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그냥 놔두시지 않으십니다. 
1세기 당시의 서머나 교회는 한마디로 고난 받는 교회였습니다. 고난 받는 교회 성도들에게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님의 모습보다 더 위로가 되고 더 용기를 주는 이미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고난 중에 최악의 고난은 죽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죽음에서 다시 사셨습니다. 죽음을 승리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분, 죽음의 승리자이시고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는 분 곧 역사의 주인 되신 분이 서머나 교회를 향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서머나는 예나 지금이나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현재의 지명은 이즈밀(Izmir)이라고 불리 우는데 터키에서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과거 사도시대에도 에베소에 필적할 만한 큰 도시여서 "아시아의 보석"이라고 불리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교회의 소망은 로마제국의 부요가 아닌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책망이 없고 칭찬만 있는 교회였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고 순교까지 하는 성도들에게 무슨 책망을 하시겠습니까? 다만 칭찬과 격려를 주실 뿐이었습니다. 칭찬은 "네가 복음 때문에 환난당하고 물질적으로 궁핍함을 견디는 것을 내가 안다"(9절)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궁핍은 상대적 가난 정도가 아닌 거의 헐벗고 굶주린 수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네가 부요한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알아주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내 인생이 아무리 환난의 연속이어도 그 환난이 환난 당할만한 가치만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내 인생의 주인이신 주께서 알아주신다면 견딜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의 환난과 고통이 가치 있는 일이며, 그 고난이 영원한 것을 위한 일시적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아무리 우리를 괴롭게 하고 힘든 상황에 처하게 한다 할지라도, 주님이 알아주시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 .your pain and poverty - constant pain, dire poverty. . ."
한 번에 끝나는 고통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입니다.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끔찍한 가난입니다. 
주님이 알아주시는 것으로 우리에게 소망이 될 수 있는 지 말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불렀던 신앙의 고백이 있습니다. 사실 고난의 시간들이 신앙을 신앙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힘은 고난 가운데서 신앙을 지키고, 세상이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알아주시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고통 가운데 신앙의 고백이 값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이 찬송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 .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제 조금 더 자세하게 서머나 교회가 당한 환난과 궁핍의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칭찬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9절에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환란"이라는 말은 서머나 교회에 닥친 종교적인 환란을 의미합니다. 우상숭배를 거절함으로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그 엄청난 핍박과 고난을 의미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환란을 "affliction"또는 "tribulation"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심신의 고통, 괴로움" 또는 "시련"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서머나 교회가 당한 시련은 바로 믿음 생활 잘 하려고 하는데서 오는 핍박과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데,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데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면 뭔가 잘 못된 것이죠. 
우리가 믿음의 거룩함을 지키다 당한 고통이 무엇인가요?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고통의 흔적 말입니다. 그런데 그 흔적을 우리 주님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한ㄹ "궁핍"이라는 말에 조금 더 묵상해 보겠습니다. 
왜 서머나의 교인들이 궁핍할까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일까요? 적어도 오늘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한 궁핍함일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당한 궁핍함이 있으신가요?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다가 당하게 되는 가난함을 경험해 보셨나요?

당시 서머나는 물질적으로 매우 풍성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물질의 풍요는 황제를 숭배하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권리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숭배를 거절하며 풍성한 동시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란 너무나 제한된 것이었습니다.
가난은 어쩌면 그들이 지닌 흔적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당하는 환란과 궁핍을 가지고 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실상은 너희가 부유한 자"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 적으로는 너희가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부유한 자라는 사실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너희가 궁핍하여 마음껏 먹을 수도 없고 마음껏 쓸 수 없어 힘이 들지라도 이런 것은 잠시 잠깐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눅12:13절 이하에 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해도 농사가 얼마나 잘 되었는지 그는 스스로 만족하면서 "잘 먹고 잘 놀고 잘 쉬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가르켜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리하면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혹시 교회와 우리들이 그런 어리석은 부자는 아닐까요?
우리들이 가진 것을 가지고, 혹시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이런 사람은 없습니까? 성경은 이 사람을 향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혹시 물질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권면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저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지난 일본의 대 재앙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동경 만나교회의 김광현 선교사에게서 온 메일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일본인 성도가 교회에 오더니 하소연을 하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는 살인자인가요? 어떻게 아버지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나요?”
우리는 간혹 그런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마귀가 하나님의 사람을 시험하여 환난을 받게 하실 수 있나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이 모든 환난을 면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가 두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고난과 순교의 일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며, 고난이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마귀가 “저희 가운데 몇 사람”을 “십일 동안” 환난을 받게 할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성경이 이 부분을 훨씬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 . .The Devils about to throw you in jail for a time of testing - ten days. It won't last forever."

우리가 믿는 것이 있습니다. 이 고난이 영원히 게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귀”가 누구 입니까? 마귀는 자신이 흉악한 모습으로 나타나 마귀라고 떠들지 않습니다.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선한 탈을 쓰고, 우리를 위로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우리를 영원한 지옥으로 이끄는 자들입니다. 
당시에 마귀는 구체적으로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기독교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 역사적 배경이 필요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극심한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체의 제사 의무를 면제 받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의 정책 중에 하나가 소위 '팍스 로마나'라는 평화 정책을 가지고 문화를 존중해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일체의 제사 의무를 면제 받고 있었는데, 기독교인들 때문에 자신들이 해를 받을까 두려워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더욱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중상 모략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과의 차별화를 통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면서 보호받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이런 일들은 지금 우리 교회에서도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제가 언젠가 군산에 집회를 갔을 때, 잘 지은 교회가 허가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장 큰 원인이 주변에 있는 교회들이 그 교회를 반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 때문에 자신의 교회가 받게 될 어려움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위선인데 말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같은 기독교인들 때문에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가 병으로 죽으면 다른 목사가 좋아하고, 주변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면 이웃 교회가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보다는 지금 우리가 누릴 것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바로 서머나 교회가 그런 이유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충성의 면류관이 있다!
오늘 본문에서 약속하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죽도록 충성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죽도록”이 무슨 말입니까? 중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로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 자신이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버림 받을 것에 대하여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 그래서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 

딤후 4:7절 이하에 보시면 하나님의 나라 사역을 위하여 온갖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한 바울사도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정리하면서 고백하길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에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의에 면류관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고 준비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충성과 봉사를 다 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디모데 후서 4장 10절에, “너는 내게 속히 오라. . .데마는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데마도 처음에는 열심히 바울을 도와주고 따랐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떠나 갔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처음에는 충성스러운 것 같은데,
조금만 시련이 와도, 사실 시련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인지 모릅니다. 자신에게 오는 어려움, 자신이 생각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시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충성”은,

그래서 시간이 지나봐야 아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몇 달, 몇 해를 열심히 충성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한 자리를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제일 두려운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그 목사님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목사로서 듣는 가장 두려운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저 사람도 참 좋은 교인이었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이야기 입니까?
한참 잘 나가는 사람의 편에 서서 돕는 조력자가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려운 때 자리를 지키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시험이 와야, “죽도록”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들었을 이야기 이지만 서머나의 이야기는 폴리갑을 통해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주후 156년 경 유명한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86세의 나이에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가 순교의 직전에 서게 됩니다. 원형극장의 총독 앞에서 회유를 받습니다. "목숨이 아깝지 않으냐! . . 시저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 .그리스도를 욕하라!" 그러자 폴리갑은 이렇게 말합니다. 
"86년 동안 그분을 섬겼고 그 분은 내게 잘못하신 일이 하나도 없소. 그런데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이오"

총독이 다그칩니다. "시저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못하겠느냐? . . .내게는 사나운 맹수들이 있다. 네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맹수들 앞에 던져 버리겠다."
"맹수들을 부르시오."
"네가 매수들을 얕보니ㅣ 불로 죽여 주겠다.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말이다.
폴리갑은 화형대에서 묶기를 거부하고 순교를 당합니다.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지만 바람이 불어 불길이 그에게 닿지 않아 고통을 당하자 한 병사가 칼로 찔러 그를 죽였고 고통이 끝이 났습니다.

폴리갑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증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은 참된 교회의 보증수표다!"라는 사실 말입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2절을 보세요.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빌립보서 1장 29절 말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서머나 교회가 주는 교훈과 축복의 말씀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서머나 교회를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 중에 첫 번째는 “확실한 신앙 고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시간의 말씀하고도 이어지는 부분인데 신앙의 문제는 첫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얼마 전에 방글라데시 선교사로 가 있는 박천록 목사님의 [사명]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불교신자로 살다가 폐병 말기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금식기도를 하던 중에 고침을 받고 방글라데시로 보내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답니다. 
죽을 목숨을 살려 주셨는데 남겨진 생애를 아낌없이 충성하겠노라고,
그런데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낍니다. 학교를 세우고 전도를 하고 사람들이 모였는데, 교회의 물건을 다 훔쳐가는 사람들,
그곳은 교통수단으로 닉샤라는 사람이 끄는 인력거를 타는데, 바가지를 씌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사랑할 수 없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도하러 찾아간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답니다. 비가 새는 집 안은 진흙이 질척거리는데 열병으로 거적위에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이 처음에 했던 신앙 고백을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대부분이 이슬람교도들이기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주저했던 자신의 모습도 보게 되었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연장시켜준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의 모습을 보기 시작하면서 사랑하게 되고,
그의 확실한 신앙고백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확실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렇게 살면 죽을 것 같은데,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입니다. 
또한 확실한 신앙고백의 근거는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의 자존감이 아닐까요?
서머나에서 로마인들,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조차 핍박을 받으면서도 견딜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선택받은 자로서의 자존감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꺾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지금의 현실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무지한 자들입니까?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저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둘째 사망이 없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이 선물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들을 때 
무식한 이야기 입니까? 크리스천들은 잘 되면 하나님의 은혜고, 고난을 당할 때면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 . 정말 그러신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해 우리
에게 참 생명이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
이 실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실망이 부활의 사건으로 인해 완전하게 반전되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으시지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꾸 한 눈을 팔면 뒤에서 아이들 모르게 숨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당황해 합니다. 어쩔 줄 모릅니다. 하지만 뒤에서 부모님은 그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지 않
습니까? 그리고 필요한 순간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나요“?
서머나 교회를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경험들이 우리들에게 사명이 됩니다. 우리들에게 힘이 됩니다. 
어느 날, 남편을 잃은 한 젊은 여성이 목사님에게 찾아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어떻게 살지요?” 
목사님이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다가 결국 한 마디 했습니다. 
“어떡하긴요. 기도하며 살아야죠.” 
그러자 젊은 과부가 답답하다는 듯이 “목사님은 제 심정을 너무 몰라요.”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도 그 심정을 잘 알 수 없어서 답답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로 그녀를 위로할까 고민하다가 일찍이 남편을 잃은 한 여자 집사님을 급히 불렀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급히 와서 젊은 여성을 위로했습니다. 
“자매님! 혼자 살아도 살만 해요. 용기를 내세요.” 
그 말을 듣고 그 여성이 위로받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고난과 실패를 겪어본 사람은 해줄 말이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산입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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