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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를 들으시고 형통케 하옵소서 (느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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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들으시고 형통케 하옵소서 (느 1:1-11)


어떤 일이 복잡하게 얽혀 있거나 좀처럼 진전이 되지 않을 때에는 무언가 '실마리를 푸는 방법'이나 '돌파구를 여는 길'을 찾아내야 합니다.
아무리 헝클어진 실타래라 할지라도 일단 '실마리'를 찾아내면 조금씩 하나하나 풀어나갈 수 있으며, 아무리 꽉 막혀 있는 난관이라 할지라도 일단 '돌파구' 하나만 뚫어내고 나면 그것을 점점 더 넓혀 가면서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실마리'와 '돌파구'라는 것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 역시 그런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전 587년에 남조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망한 이후 예루살렘은 70년 가까이 폐허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벨론 제국이 페르시아 제국에 의하여 망하게 되었을 때,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새 주인이 된 그 페르시아, 즉 바사 제국의 왕들은 그간 포로가 되어 있었던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세 차례에 걸쳐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1차와 2차 포로귀환 때에 돌아왔던 유다 백성들은 갖은 고난 속에서도 성전 재건에 착수하여 주전 516년에 이를 완성했지만, 예루살렘 성벽은 주위 민족들의 방해로 여전히 재건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소식이 그때까지 고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있던 느헤미야에게 전해지게 되었는데, 바로 본문 1절부터 4절에 "1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 2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3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4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고 기록된 내용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느헤미야의 동생 "하나니"는 제2차 포로귀환 시에 유다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페르시아로 돌아와서 자기 형에게 고국의 비참한 상황을 전해 주었습니다.
즉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 즉 바벨론으로 잡혀 오지 않고 그곳에 계속 남아 있던 소수의 유다 백성들은 주변 이방 민족들에 의하여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성"과 "성문"들은 "소화(燒火)"된 상태 즉 여전히 불탄 폐허 그대로 남아 있다고 알려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비보를 전해들은 느헤미야는 크게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국 유다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호기를 70년이나 기다린 끝에 드디어 얻게 되어서 이미 두 차례에 걸쳐서 수만 명의 유다인들이 고국으로 귀환했는데도 정작 본격적인 국가재건운동은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서조차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런 답답한 현실 때문에 느헤미야는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그저 주저앉아서 한탄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조국 재건을 위하여 무언가 자기가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그처럼 어떤 '실마리를 풀고 돌파구를 뚫는' 방법이 절실한 상황에서 느헤미야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바로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결국은 느헤미야로 하여금 일국을 재건해내는 엄청난 과업을 완수하게 만드는 첫걸음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인생이나 신앙생활이 어떤 문제에 얽히거나 난관에 빠지게 될 때에 그것을 능히 해결해내기 위하여 과연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문제해결을 위한 기도에는 먼저 '하나님께 죄 용서를 간구하는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5절부터 7절에 "5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7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느헤미야는 그의 기도를 그 얼마나 겸손하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그는 "이스라엘의 범죄함을 자복"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범죄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했던 죄'였습니다.
바로 남조 유다 말기에 대부분의 유다 백성들이 함께 저질렀던 죄였으며 그들은 그 죄로 인하여 바벨론에게 망하고 포로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느헤미야는 이 회개기도를 드리면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유다가 망하게 될 당시에 느헤미야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지 아니면 태어났다 해도 아주 어린 나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 불순종의 범죄'에 함께 가담할 기회도 없었으며 당연히 유다가 망하게 된 책임도 그에게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내'가 범죄했고 내가 포함된 '나의 혈육'들과 나의 혈육들이 속한 '내 동족'이 다 같이 범죄했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조국이 그와 같은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된 원인이 바로 자기들의 죄에 있음을 먼저 직시하고 있었으며 그 죄의 용서부터가 선행되어야만 만사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국 재건을 두고 기도할 때 제일 먼저 자기 민족의 죄를 두고 회개기도부터 드렸던 것이며, 그 기도에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제일 먼저 언급하는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기도를 그저 남의 죄를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시간으로만 착각하는 교인들이 간혹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사장이 저를 너무 닦달하는 바람에 제가 못 살겠습니다", "하나님, 저 교인이 저를 해코지하는 바람에 무척 괴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손 좀 봐 주십시오."라고 자기 딴에는 아주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눈 뜬 장님'이나 되는 줄 아십니까?
그렇게 일일이 일러바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벌써부터 훤히 다 알고 계십니다.
자기 미운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고자질하는 것은 결코 참된 기도가 아니라 그저 스스로 '한풀이'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지적하는 것보다 먼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부터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5장 25절에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 허물" 즉 우리 자신의 죄가 '좋은 것'들 즉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들이 우리에게 내려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이미 문제해결의 '실마리'부터 전혀 찾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 잘 풀리지 않고 계속 꼬이기만 한다면 일단 자기 속에 숨어 있는 어떤 죄가 '좋은 것'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진지하게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무언가가 우리 가정의 화목을 가로막고 있고 무엇인가가 내 사업의 축복을 방해하고 있다면 그 원인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가 아닌지를 정말 겸손하게 돌이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주일학교에서 내가 맡은 반에 학생들이 점점 줄어들고 경향교회에서 내가 맡은 교구가 좀처럼 부흥이 되지 않는다면 '다른 교역자'나 '조직체계'를 탓하기 전에 '나의 무능과 불충' 그리고 '그렇게 핑계거리만 찾는 나의 교만'이야말로 진짜 장애물이 아닌지 바로 이것부터 회개하면서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일반적인 순서는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것'이 제일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바로 따라와야 하는 것이 곧 '죄 자복과 회개'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자신의 죄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고서 그 어떤 '간구와 도고'를 하나님께 올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말도 안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드릴 때 우선 자신의 죄를 두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기도부터 시작하지 아니하면 그런 기도란 이미 시작부터 '꽉 막힌' 기도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 어떤 '열린 문'의 축복이 따라올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민족'을 두고 기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 기독신자'들의 죄부터 자복하고 '남'을 고발하기 전에 오직 '내 죄'부터 겸손히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회개할 때에 바로 그 죄로 인하여 얽히고 막혀 있던 문제가 드디어 풀리고 뚫리기 시작하는 은혜를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문제해결을 위한 기도에는 '택자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8절 이하 10절에 "8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9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10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아까 5절에서도 느헤미야는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라고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 언약이란 이스라엘이 언제든지 회개만 하면 당장 그 모든 것들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회개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일찍이 일러 주셨던 말씀을 지금 여기서 느헤미야가 되새기고 있는데, 바로 "내게로 돌아와서"라는 말이 '회심'을 가리키는 것이며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이란 곧 회개 후의 '순종'을 가리킵니다.
  
즉 당신께서 "열국 중에 흩어" 놓으신 유다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열매가 따르는 참된 회개'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해 주시고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 즉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오도록 해 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라는 말은, 옛날 출애굽 시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셨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현재 유다 백성에게도 그런 구원을 또 한 번 내려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처럼 느헤미야는 회개하고 용서를 비는 자에게는 반드시 은혜 베풀어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약속의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라고 하나님의 은혜가 발동되어 이스라엘이 다시 구원을 얻고 조국을 재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자신 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셔야 한다고 요구할 아무 권리가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해 주시도록 그 분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그 어떤 조그마한 이유 같은 것도 제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쪽의 어떤 공로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건방지기 짝이 없는 신성모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수밖에 없는 확고부동한 근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변개치 못하실 언약'입니다.
참 기가 막힐 정도로 놀랍지 않습니까?
일단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다시 용납해 주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민과 택자를 향하여 스스로 맺으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실로 우리는 그 얼마나 든든한 '기도 응답의 보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기도를 올리는 우리 쪽의 어떤 자세나 조건 때문이 아니라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 쪽에서 당신의 택하신 자들을 절대로 못 본 체하시거나 버리실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 즉 당신의 선한 일을 위하여 친히 쓰실 종들의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 즉 이 세상 만민들 가운데 당신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뽑아 놓으신 선민의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구속사를 완성해 가고 계십니다.
애당초 우리를 십자가의 '큰 권능'과 그리스도 예수의 '강한 손'으로 '구속'해 주신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니, 그 예정해 놓으신 모든 계획을 도중에 변경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풀리지 않는 문제', '꽉 막혀 있는 답답한 상황'에 부딪히게 될 때에 바로 이런 하나님의 언약을 철저히 믿고 의지하면서 기도를 드려야만 합니다.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문제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나의 지혜로는 무슨 아이디어조차 떠오르지 않는 난제라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조금만 힘써 주시기만 하면 순식간에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그저 '하나님의 불변하는 언약'에만 의지하면서 기도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를 향한 어쩔 수 없는 본성'이 여지없이 발동되면서 당장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개인과 가정과 직장과 사업처에서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환난과 시험을 당할 때에 그럴수록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변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굳게 붙잡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문제해결을 위한 기도에는 '남은 인생 전부를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서약'이 따라야 합니다. 

11절에 기록하기를 "11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라는 언급은 조국 유다의 회복과 재건을 위한 느헤미야의 이 기도에 함께 참여한 '기도의 동역자'들이 있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이어서 느헤미야는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했는데, 여기 "이 사람"이란 느헤미야가 모시고 있던 바사왕 아닥사스다 1세를 가리킵니다.
이 기도를 드릴 당시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었으며, 아까 1절에서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라고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왕의 술 관원'이라 하면 그것은 무슨 '술 시중꾼' 같은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고대 왕가에서는 종종 음료수에 독약을 넣어 사람을 암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래서 왕의 술 관원은 왕에게 드려지는 모든 음료수를 철저히 관장할 뿐 아니라 그것을 왕에게 바치기 직전에 자기가 직접 시음해 보고 혹시라도 독이 들어 있지 않는지를 최종적으로 확인해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나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그 음료에 독이 있으면 자기 자신이 왕 대신 죽게 될 것을 각오하고 섬기는 직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술 관원은 왕에게 있어서는 곧 자기 생명의 직속 책임자나 마찬가지였고 따라서 신임 또한 매우 두터운 자라야 했으며, 비교하자면 오늘날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나 경호실장과 맞먹을만한 높은 자리였습니다.

실로 놀라운 것은 느헤미야가 비록 이방나라이기는 하지만 그토록 높은 지위에 올라 육신적으로는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을 부귀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그 어려운 하나님의 일에 쓰이고 싶어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게 쉽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누가 만일 미국의 대통령 보좌관쯤 되는 직책에 올라 아무 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었더라면 조국 대한민국에서 꼭 해야 할 중대한 하나님의 일이 있다고 해서 그 모든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귀국을 결심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하여 자신의 남은 인생 전체를 완전히 헌신할 것을 각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헌신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먼저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과 협조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느헤미야는 이제 자신이 바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그 중대한 하나님의 일에 사용될 수 있도록 합당한 여건과 기회를 허락해 주십사고 아주 구체적으로 기도를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난관을 돌파해내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헌신의 서원을 빠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테니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결하십시오.'라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떠맡기기만' 하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당신의 일을 진행시켜 나가십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그처럼 '기도를 올리는 나'를 선한 도구로, 의의 병기로 사용하시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그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쓰임 받는 사람 될 것을 서원하면서, 그 사명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 또한 내려 주십사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저 내 몸이 편해지기 위해서, 내 인생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이것저것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을 기도라고 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기도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가운데 자신의 몸을 바로 그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고자 하는 서원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신자를 당신의 뜻을 위해 마음껏 쓰시기 위하여 필요한 '형통의 은혜'를 반드시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조건을 내걸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을 믿는다면 그 응답에 감사하는 어떤 반응이 따라와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헌신의 서원은 그런 응답에 대하여 미리 감사하는 마음으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상황이 어렵고 앞길이 막막해 보일수록 무조건 자기의 필요만을 위하여 떼를 쓰는 기도가 아니라 '정말 이 몸밖에 드릴 것 없으니 이 몸을 주께 바칩니다.'라고 헌신의 서원을 올림으로써,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성도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쓰시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내려주시는 축복의 응답을 꼭 받고야 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불신자들조차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실제로 하늘이 무너진다면 그 어디에 빠져나갈 구멍이 있겠습니까만,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그런 속담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도 피할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풀지 못할 만큼 '꼬인 일'이란 없습니다.
기도가 뚫어내지 못할 만큼 '막힌 일'이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이며 '만사해결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도 해 보지 않고 미리 포기하는 것은 정말 바보짓입니다.
기도도 하지 않았으면서 하나님을 원망만 하는 것은 더더욱 미련한 행위입니다.
기도할 줄은 모르고 그저 답답하고 막막하다고 슬퍼하며 울고만 있는 것은 그야말로 완전히 망하는 길을 스스로 재촉할 뿐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역시 한 명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두고 '주께 고하여 아뢸 줄 모르는' 자는 끝까지 거기에서 헤어날 길이 없지만, 오직 '부질없이 낙심 말고 주께 기도 드리는' 성도는 '근심이 변하여 감사가 되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반드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괴로운 시험이 닥칠 때일수록 먼저 자신의 숨은 죄를 찾아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굳게 의지하며 남은 생애 전부를 헌신하는 가운데 간절히 기도드림으로써 반드시 '피할 길'을 열어 주시며 '만사형통'으로 인도해 주시는 응답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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