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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련 속에서도 성숙할 수 있는가? (약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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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속에서도 성숙할 수 있는가? (약 1:2-4)


지난 여름에 케이블 채널 tvN의 오디션 프로그램인 "코리아 갓 탤런트"에 출연했던 22살 된 최성봉이라는 한 젊은이에게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네트즌들의 엄청난 시선과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국내외 언론 뉴스들이 보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현상은 얼마 전에 "나는 가수다"에 출연해서 '여러분'을 불렀던 임재범씨의 사건을 능가하는 신드롬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임재범씨 현상은 어디까지나 국내용이었다면, 최성봉씨의 사건은 국제용 글로벌 신드롬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CNN 유투브를 통해 최씨의 공연을 본 누리꾼은 전 세계에서 1,00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6월 미국의 ABC 방송은 그를 한국의 수잔 보일, 한국의 폴포츠로 소개한데 이어서 CNN은 그를 제2의 수잔 보일로 소개하면서 "실상은 수잔 보일을 넘어서 세계 재능쇼의 또 다른 열풍을 몰고 온 인물"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의 심상치 않은 이런 인기의 배경은 단순히 그의 노래 실력만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왔던 지난했던 그의 시련의 인생 역정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서 세살 때 고아원에 맡겨집니다.  그러나 고아원에서의 구타와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고아원을 도망쳐 나옵니다.  다섯 살부터 그는 나이트클럽을 떠돌면서 껌을 팔아 연명을 했습니다.  그는 공용 화장실이나 계단을 침실 삼아 잠을 자는 것이 하루살이 생활의 마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힘센 어른들에 의해서 이름 모를 섬으로 붙잡혀 갔다가 다시 도망쳐 나와 거리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10년 이상 껌과 박카스를 팔면서 거리를 거의 집으로 삼아 생활을 해 왔습니다.

일용직으로 품을 팔아 연명을 하면서도 그는 한 가지 꿈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꿈이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부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못한 채 화장실과 거리의 한 모퉁이에 앉아서 책을 읽으면서 검정고시를 합격했습니다.  한 번도 학교 문턱을 밟지 못하다가 마침내 대전의 어느 한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공부라는 것을 시작하고 음악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어느 날 그는 나이트클럽에서 일을 하다가 단순한 춤을 추는 음악이 아니라 진짜 클래식 성악을 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깊이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클래식 음반을 사서 그것을 계속해서 들으면서 노래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난 6월 어딘지 어색한 손짓과 불안한 눈빛, 그리고 더듬는 말투로 tvN 탤런트 쇼 무대에 등장해서 인사를 마친 후 노래를 시작합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넬라 판타지아'를 환상적인 목소리로 불러서 당시 그 자리에 심사 위원이었던 음악감독 박칼린, 배우 송윤아, 그리고 영화감독 장진을 비롯해서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과 전 세계의 시청자들을 울려버린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시련 속에서도 성숙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대답이 뭘까요?  대답은 "예스"입니다.  최성봉이라는 이 젊은이의 삶이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증명합니다.  시련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 때문에게 우리에게 환난이 면제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인 야고보서의 기자도 그 당시 신앙의 박해로 인하여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의 12지파와 모든 성도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 짤막한 본문에 '온전히'라는 단어가 세 번 이상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온전히'라는 말은 완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 원문에서 '온전하다'는 말은 본래 '성숙하다'는 뜻입니다.  시련이 바로 성숙의 통로임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시련은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과 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성숙의 삶을 약속하는 것일까요?  시련이 약속하는 것은 우리에게 시련이 주어질 때 그 시련에 올바르게 반응할 때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 있는 약속의 삶입니다.

첫째로, 시련은 믿음의 삶을 약속합니다.

본문 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여기에서 '믿음의 시련'이라고 한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이 경험하는 시련은 그냥 시련이 아니라 믿음의 시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시련'이라는 말은 희랍어 '도키미온', 혹은 '도키모스'라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본래 '도키모스'라는 이 단어는 이렇게 쓰여진 단어입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들이 진흙을 가지고 빚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정한 형태가 잘 빚어지면 뜨거운 불 속에 그것을 집어넣습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도자기를 불 속에서 꺼집어냅니다.  흠이 있는 것들은 깨버리고, 잘 구워진 것들을 향해서 익숙한 도공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도키모스!"  합격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련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이 단어의 배경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베드로전서 1장 7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여기에서 '불로 연단하여도'에서 '연단'이 바로 도키모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금처럼 귀하게 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련이라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 속에 들어간 도자기 중에는 쓸 만한 것이 있고, 쓰지 못할 버릴 것들이 있습니다.  쓸만한 것은 하나의 작품이 됩니다.  쓰지 못할 것은 쓰레기로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이 시련 속에서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이 구별됩니다.  시련이라는 불 속에서 참된 믿음은 더 진지한 믿음으로 연단 됩니다.  그렇지만 거짓된 믿음은 정체를 드러내고 파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므로 진지한 성도들에게 있어서 시련의 시간은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시련이 오거든 더욱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시련을 허용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매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하고 시련의 불 속을 통과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유명한 세계적인 전도자인 디엘 무디는 항상 설교를 할 때 찬양 사역자 한 사람을 동반했습니다.  그 가운데 생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날 생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보게, 참으로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많은데 그들이 환난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일어설 수 있는 찬송 하나를 만들어보게나"  드디어 찬송 한 곡이 작사가 되었습니다.  이 찬송은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하나인 543장입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세월 지나 갈수록 의지할 것 뿐 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

시편은 바로 이와 같은 시련이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야고보서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라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시간입니다.  시련 중에 마치 이 찬양의 가사처럼 우리가 주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앞에 나와 주를 의지한다면, 그리고 주를 신뢰한다면 그 시련의 밤이 지나고 밝은 아침이 왔을 때 우리의 주님은 여러분과 저를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도키모스, 합격!"  네 믿음, 너희들의 믿음은 합격이다.

이 불을 통과한 아름다운 작품으로서 우리가 합격된 것을 우리의 주인이 되신 주님께서 선포하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 어떤 시련을 통과하고 있다면 시련의 밤을 지나 주님 앞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작품으로 합격의 상을 받는 그런 성숙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시련의 밤이 왔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주를 의지하십시오.  시련은 믿음으로 올바로 반응하기만 하면 더욱 깊고 아름다운 삶을 선물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은 어떻게 성숙한 삶으로 인도할 수가 있습니까?

두 번째로, 시련은 인내의 삶을 약속합니다.

시련이 오면 우리 모두는 버티고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버티고 견디는 이것을 우리는 인내라고 말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시련이 없이 인내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성도 한 분이 자기가 도무지 인내심이 없다고 생각하여 기도 제목을 가지고 어느 날 목사님께 찾아가서 기도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제가 인내를 너무 못합니다.  제가 인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를 좀 해 주세요."  그래서 목사님이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 성도에게 인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여, 먼저 이 성도에게 시련을 보내 주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목사님의 옆구리를 쿡 찔렀습니다.  "목사님, 시련은 아니구요, 인내요."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시련은 없이 인내는 만들어지지 않거든요."

그렇습니다.  시련은 없이 인내는 약속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해야 할 인내는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수동적인 인내이고, 또 하나는 능동적인 인내입니다.  수동적인 인내는 할 수 없이 버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련의 과정을 통하여 적극적인 소망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인내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후자의 적극적인 인내에 초점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내를 적극적으로 이루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었을 때 결과를 소망하는 적극적인 마음으로 인내를 학습해 가는 것입니다.  인내를 잘 성취한 상태를 가리켜서 오늘 본문은 온전하고 구비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온전하고 구비된 인격의 모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인내한다면 우리가 사모하는 예수님의 그 인격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인내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대제사장을 호위하고 있었던 종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마도 그가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이 베드로가 참지를 못하고 검을 빼어서 이 종의 귀를 베어버립니다.  귀가 떨어진 순간 예수님께서는 그 귀를 주워서 떨어져 공포에 떨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귀를 붙여주시면서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눅 22:51)

그래서 훗날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 9절에서 그가 경험한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예수님은 정말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마지막에 십자가까지 참으셨던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말할 때 내 곁에 다가오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참아야 해!"

우리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인내를 이루어냈을 때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기억하십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선과 온유와 절제"  이 성령의 열매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홉 가지 열매를 모은 한 인격,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열매가 지향하는 유일한 인격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인내하고 오래 참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바로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그렇게 닮을 수 있도록 시련을 허용하시고 우리 곁에 서 계십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련의 시간에 잘 인내하심으로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닮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도록 기도하십시다.  기억하십시오.  시련은 바로 주님을 닮게 하는 성숙의 시간입니다.  시련은 인내의 삶을 학습하는 시간입니다.  시련이 왔습니까?  시련 앞에 직면해 있습니까?  잘 참으십시오.  이 시간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련이 오셨습니까?  잘 참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이 오셨습니까?  잘 참으십시오.

시련은 어떤 의미에서 저와 여러분에게 성숙의 삶을 약속합니까?

세 번째로, 시련은 기쁨의 삶을 약속합니다.

물론 시련 그 자체를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시련은 아픔입니다.  시련은 고통입니다.  어느 누구가 시련을 기뻐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시련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련을 잘 견디면 거기에는 성숙한 기쁨이 있습니다.  심오한 기쁨이 있습니다.  진지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기쁨은 피상적이고 감각적인 기쁨이 아니라 이것은 성숙된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이런 기쁨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시련을 당했을 때 시련을 잘 통과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게 될 그 소망을 바라본다면 시련이 아프지만 우리는 여전히 즐거움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5장 3절과 4절의 말씀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어떻게요?  마지막 소망 때문입니다.  주님을 닮아갈 빛나는 인격으로 서게 될 그 소망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프지만 그 환난 속에서도 여전히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심오한 즐거움, 이런 진지한 기쁨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도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 온전한 기쁨, 그것이 바로 성숙한 기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기라"는 말은 의지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지 않아도 그렇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시련은 아프지만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여기라"는 말은 "계산하라, 마음을 먹고 평가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감정적으로는 기뻐하기 어려워도 궁극적으로 이 시련이 내게 가져다 줄 유익을 생각하면서 의지적으로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의지적으로 기뻐하면 마음으로부터도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련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지한 기쁨은 시련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선물로 준비하십니다.  야고보서는 피상적이고 감각적이 아닌 온전한 기쁨을 우리들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쁨이야말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런 기쁨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험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바로 이런 기쁨을 이 땅에서 누리시면서 사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누가복음 10장 21절은 예수님의 일상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명예나 재물이 아니라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냥 인간적으로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만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땅의 어려움을 경험하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전하면서 최성봉이라는 젊은이의 이야기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처음 22년의 시련이 없었다면 그가 단 한 번의 무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처음 22년의 눈물이 없었다면 그는 마침내 웃는 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최성봉씨의 무대가 끝나는 그 순간 그 자리에 심사위원으로 앉아 있던 송윤아는 소감을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아주고 싶어요."  박칼린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안에는 악기가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악기가 터져 나왔으면 좋겠다."  뉴욕 타임즈의 한 기자는 그의 블로그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처음에 이 클립이 가짜인 줄 알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짜 최성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제 시련을 넘어서서 카루소처럼 노래한다."

그가 불렀던 노래의 제목 '넬라 판타지아'는 유명한 "미션"이라는 영화의 테마곡입니다.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통해서 불리워지는 미션 찬양입니다.  "넬라 판타지아 요 베도 운 몬도 주스또"로 시작되는 이 노래의 가사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환상 속에서 나는 올바른 세상이 보이네.  누구나 평화롭고 정직하게 살 수 있는 곳, 언제나 영원히 자유롭기를, 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사랑이 가득하기를.  환상 속에서 나는 밝은 세상이 보이네.  각자의 어둠이 너무 어둡지 않기를, 언제나 영혼이 자유하기를.  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

그의 인생에서 시궁창 같은 어둠을 경험했지만 그는 늘 넬라판타지아, 나의 환상, 나의 이상, 자신의 꿈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여름에 트위터와 인터넷 공간에는 그의 이야기로 뜨거운 여름을 더 뜨겁게 달구고 있었습니다.  몇 가지만 발췌하여 소개해 봅니다.  "진정성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담담한 표정, 눈물까지도 사치스러워서 그는 울지 못하는 것일까?"  "동영상 보고 감동 먹었음. 저렇게 살아왔는데 판타지아를 노래하고 있다니"  누군가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 새벽 이 동영상은 나를 엄청 울린다.  저는 안 울고 나를 울리는 나쁜 놈"

두 번째 무대에서 심사위원들이 그에게 가장 많이 주문한 것이 "좀 웃어 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얼굴을 펴는 것으로 웃음을 대신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환하게 웃지를 못했습니다.  아마도 대회는 끝나지 않았고 웃음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았고, 그가 웃을 수 있는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두 번째 무대를 통과하고 파이널리스트가 되면서 처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기뻐요, 정말 기뻐요."  그리고 그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작은 미소를 띄웠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미소 앞에 열광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웃었던 웃음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웃음이었는지,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기쁨이 얼마나 진지한 웃음이었는지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스페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거친 돌들이 많은 시내가 더욱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을 많이 당하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동족들에게서 버림을 당했습니다.  로마의 병정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는 하늘이 어둠으로 덮인 공간 속에서 매달려 여섯 시간이나 보내셔야만 했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분처럼 고통을 당하신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곡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는 마침내 이 고통을 거룩한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 구원의 영광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련은 성숙의 통로입니다.  시련은 기쁨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야고보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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