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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으로 살라 (갈 5: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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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살라 (갈 5:16-26)


1. 성령의 기름부으심

오늘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란 주제의 시리즈 설교를 마칩니다. 그동안의 말씀을 정리해봅니다. 성령의 생기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마른 뼈가 살아납니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집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실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고 어둡다 하더라도, 시대의 등불을 밝히는 엘리야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는 무너진 제단 곧 예배를 회복했습니다. 예배가 회복될 때, 성령의 불이 내려왔습니다. 

엘리사처럼, 끝까지 은혜를 사모하고,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크게 사모하는 사람이 시대의 지도자로 쓰임받습니다. 교회는 성령공동체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는 교회가 바로 우리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기 위해서 눈에 비늘이 벗어져야 하듯이, 우리 눈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이라는 비늘이 벗어질 때, 비로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보게 되고, 그분의 도우심을 받으며 사는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2. 성령의 사람

우리는 모두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6:11)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이란, 성령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생명을 주는 영, 살리는 영입니다. 

창세기 1: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혼돈, 공허, 흑암 가운데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운행하셨습니다. 여기에 “운행하다”란 단어는 그 뜻이 새가 날개로 알을 품는 것을 뜻합니다. 새가 알을 품으면, 거기에서 새끼가 태어나듯이, 성령 하나님께서 혼돈, 공허, 흑암의 세상을 품으시니, 혼돈, 공허,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생기고, 하늘이 생기고, 만물이 창조되어 질서정연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성령은 오늘도 우리를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품듯이,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품으시므로, 우리 안의 어둠, 혼돈, 불안, 공허가 사라질 것입니다. 빛으로, 질서로, 평안으로, 충만한 기쁨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3. 성령으로 살 것이냐, 육체를 따라 살 것이냐?

그런데, 우리의 실제 생활을 보면, 늘 성령으로 살지는 못하는 연약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 안에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하는 것을 봅니다. 
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마음에는 성령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과 육체의 욕망대로 살고자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마치, 텔레비전 방송 저녁9시 뉴스 시간에 KBS 뉴스를 볼 것이냐, MBC 뉴스를 볼 것이냐, 채널을 어디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화면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채널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욕망대로 살 것인가?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결과에 대하여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스란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행복하면 행복한대로 우리가 선택을 잘 한 것이고, 불행하면 선택을 잘못하였기에 불행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령을 따라 사시기를 바랍니다.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9세기 영국의 소설가 스티븐슨이 쓴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어린 시절에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소설은 인간의 이중성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런던에 사는 지킬 박사는 학식과 인품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어느 날 먹으면 도덕심이 없는 추악하고 잔인한 인간(하이드 씨)으로 변신하는 약을 발명합니다. 이 약을 복용하면 선한 지킬박사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악마 하이드씨로 변신합니다. 약을 복용하는 횟수가 거듭되는 동안, 이제는 약을 쓰지 않아도 하이드씨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되고, 마침내 영원히 지킬 박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살인을 하고 자살함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같은 이중인격자들이 있습니다. 모범 사원으로 알려져 사장으로부터 칭찬을 받아 승진에 승진을 거듭한 어느 엘리트 회사원이 회사의 공금을 수십억 가로채어 도박으로 다 날려버려 구속된 사건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란 소설이 나온 1886년의 영국은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전, 전세계에 걸친 광범위한 식민지로 생산성이 급속히 상승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빈부 격차의 확대, 불평등의 심화, 폭력적인 식민통치 등으로 사회 갈등이 급속히 커지고 있었고, 가진 자의 탐욕과 위선이 사회의 건강성을 짓밟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스티븐슨은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통해 풍요의 시대에 찾아오는 불청객인 인간의 이중성을 고발한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이중적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용어로 설명하면, 우리 모두의 마음에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이 있는 동시에 타락한 아담의 죄된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는 예의바르고 번듯한 신사이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혼자만의 세계에서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악마의 화신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살 것입니까, 아니면 육체의 욕망대로 살 것입니까? 
성령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거룩함으로, 사랑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4. 육체의 일들 vs 성령의 열매

로마서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평상시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이것이 그 사람의 인격 됨됨이입니다. 
육체의 욕망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에서의 자랑을 늘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사망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늘 생각하는 사람은 그에게는 생명과 평안이 임합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 때,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19-21절을 봅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반면에, 성령을 따라 살면, 성령으로 살면, 어떤 열매를 맺습니까?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가 9가지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어를 보면, 열매를 단수형으로 사용했습니다. 9가지가 결국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기쁨이 넘칩니다. 사랑은 화평을 불러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비로운 것이며, 사랑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끝까지 충성합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온유하고 절제할 줄 압니다. 이것은 사랑장이란 별칭이 붙은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 9가지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입니다. 
이 아홉가지 열매는 성령께서 맺어주십니다. 성령의 사람인 우리가 성령으로 살고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성령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는 자연적으로 맺어집니다. 

5. 성령으로 살라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예수님을 우리의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하여 달리신 주님의 십자가에 우리의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못 박았습니다. 
육체의 정욕이나 탐심이 일어날 때, 우리는 자신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해야 합니다. “나의 정욕과 탐심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렇게 선포하는 순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활동하십니다. 
내 마음은 성령님께 집중하게 됩니다. 악한 생각, 나쁜 마음, 더러운 습관은 그 순간에 떠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25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날마다 살아갈 힘과 에너지를 성령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모든 삶의 근원이십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으로 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행한다”고 할 때, “행한다”는 단어는 줄을 맞추어 걷는다, 나란히 걷는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사람인 우리는 성령님과 나란히 걷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도록 우리의 삶을 성령님께 맡겨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성령님과 함께 걷는 여러분, 여러분의 경영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 반드시 성공하는 인생, 승리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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