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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큰 시험은 큰 믿음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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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병욱 목사(삼일교회)

시험은 믿음을 낳는다. 작은 시험은 작은 믿음을 낳는다. 큰 시험은 큰 믿음을 낳는다. 무엇이 큰 시험인가? 제일 쉬운 시험은 인과관계가 있는 시험이다. 이유를 알 수 있는 시험이다. 납득할 수 있는 시험이다.

말씀을 떠나살다가 큰 시련을 만났다. 그러면 돌아가면 된다. 아무리 시련의 크기가 크다 할지라도 이것은 쉬운 시험이다. 탕자의 시험은 쉬운 시험이다.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외국에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주는 자가 없었다. 정답은 간단하다. 아버지께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교만하고 기고만장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무너졌다. 내가 마음이 높았구나, 주 안에서 겸손해야겠구나 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엎드리면 된다. 이 모든 것은 납득과 이해와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쉬운 시험, 작은 시험이다.

큰 시험은 납득이 되지 않는 시험이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만들어 준다고 했는데, 이삭을 죽이면 어떻게 하나?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죽이라는 제사를 명하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해도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는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숫양으로 모든 긴장과 갈등은 풀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증명된다.

아합을 피해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던 엘리야에게 시돈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합리성과 논리를 따지면 이것은 무모한 명령이다. 시돈은 어떤 곳인가? 엘리야의 대적 이세벨의 고향이다. 적대적인 장소를 도피처로 삼는 것은 무모하다. 찾아간 집은 과부의 집이었다. 혼자 사는 엘리야에게 오해가 따를 수 있는 과부 집에 간다는 것은 이상하다. 게다가 그 과부는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었다. 몸을 의탁하려면 넉넉한 집에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명령이다.

납득도 어렵고, 이해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엘리야는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라’는 명령에 그대로 순종한다. 우리는 자주 왜를 묻고, 무엇 때문인가를 묻는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왜 애굽에서 끌고 나왔냐고 물었다. 성경은 이것을 질문으로 여기지 않고 원망으로 여긴다.

결국 원망하던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다 죽는다. 100% 이해되고 납득되어야 움직인다고 한다면, 자기 수준으로만 살겠다는 의미다. 나보다 더 높은 수준, 하나님의 수준으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의 이해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우리는 알고 가는 것이 아니다. 믿고 가는 것이다.

순종의 사람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남은 가루로 자기를 위한 떡을 만들라고 명한다. 사르밧의 과부는 마지막 양식을 엘리야에게 주는 순종을 한다. 그래서 가뭄이 끝날 때까지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다. 생명이 생명을 낳고, 순종이 순종을 낳은 것이다. 사르밧의 과부의 순종이 그렇게 힘든 것이었나?

사실 아무것도 아닌, 매우 가벼운 순종이다. 마귀는 성도들을 착각하게 만든다. 굶어죽게 되었다. 한끼 먹고 죽으나, 안 먹고 죽으나 무슨 차이가 있는가? 순종이 어려워 보이는 이유는 배고픈 느낌과 한끼의 밥을 비교했기 때문이다. 순종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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