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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한이웃 (눅 10: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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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이웃 (눅 10:30-37)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부터 한량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받은 것을 가지고 이웃에게 베푸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5:40).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이웃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하게 하신 다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강도를 만나서 죽어 가는 사람은 죄와 마귀의 권세에 짓눌린 세상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못 본 척 피해 가지만 가까이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주막에 데리고 가서 끝까지 돌봐주게 하는 사람이 선한 이웃입니다. 그런 이웃의 덕분으로 회복된 사람은 저도 가서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주어야만 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들의 세상에서 선한 이웃의 사역은 주님의 교회가 전개해야 될 요긴한 사명입니다.

1.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에게 율법의 핵심 교훈을 물었습니다. 그는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라고 하였습니다(27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며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창조원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창 1:1). 성경에 나오는 창조 기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2:18에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하시고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부부가 되고 그 사이에서 자녀가 나게 되어 가정을 이루고 가정들이 모여서 사회와 국가로 공동체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과 만물들도 다 인간과 함께 공존하게 하신 것입니다(창 1:28). 창조주 하나님의 요구는 지구 위에 사는 사람들이 언어나 종족이나 국경에 차별 없이 모두가 다 서로 돕고 사랑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행 17:26-28).

2)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입니다.

인간 세계에 죄가 들어온 이후 온갖 불행스러운 일들이 이어집니다. 재난과 질병과 사고와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마귀가 활동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미혹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길을 가게 됩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정욕대로 행동하게 되면서 싸움과 다툼이 생기고 전쟁과 같은 비극이 연출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심판도 작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세계의 불행을 치유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지상에 세워진 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대행하는 기관입니다. 교회가 전개하는 선한 이웃의 운동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3) 교회나 성도는 청지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청지기의 사명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리를 행사하면서 제게 맡겨진 일들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자입니다(눅 12:42-43). 그렇지만 청지기는 어디까지나 주인에게 위임받은 관리자일 뿐이고 주인은 아닙니다. 주인이 맡겨준 재산을 가지고 주인이 기뻐하는 일에 사용하여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말씀하실 때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자기의 사욕을 위하여 허비했다는데 준엄한 심판을 명했습니다. 반면에 그것을 가지고 친구를 위하여 선용한 것을 칭찬하였습니다(눅 16:9).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서 오늘날 소위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Nobbless Oblige)’을 요구하게 됩니다. 곧 많이 받은 자는 많이 베풀어야 되는 원리입니다. 성경은 어려운 이웃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께 보답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5:40).
 
2) 적극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34절에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백 마디의 말보다도 한 가지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야고보는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약 2:26). 사도 바울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3:2). 이는 모두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접근하여 포도주와 기름으로 그의 상처를 치료하고 싸매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짐승에 태워 주막에까지 데리고 가서 돌봐 주었습니다(34절). 이는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체휼(體恤)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히 4:15).

3) 끝까지 돌보는 책임성입니다.

35절에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주막에 데리고 가서 밤새 돌봐 주고 다음날 아침 떠나기 전 주막 주인에게 그 사람의 사후 문제를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다 자기가 담당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을 돕거나 구제할 때 자기 이름과 선행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지만 이 사람은 자기의 흔적을 전혀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제하는 일을 일회용으로 하고 그치지만 이 사람은 끝까지 책임 있게 돌봐 주었습니다. 요한복음 13:1에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3. 선한 이웃의 전형(典型)

강도가 지나간 여리고 길에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유대인 사회에서 존경의 대상이며 신분을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멸시의 대상일 뿐 아니라 이름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 53:3에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2. 이웃을 살피는 일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세 종류의 이웃이 있었습니다. 옷을 벗기고 죽을 지경이 되도록 때리고 빼앗아간 강도는 악한 이웃입니다. 그 앞으로 지나가면서도 못 본 척 피해간 제사장과 레위 사람도 역시 나쁜 이웃입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선한 이웃입니다.

1)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 33절에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라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보고도 앞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를 외면해 버렸지만 이 사마리아 사람은 첫눈에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았을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오히려 혐오감을 느끼며 멀리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지만 남의 불행을 보고 자기의 일처럼 생각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성령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신 말씀은 여기에 해당됩니다(마 5:7). 탕자의 아버지도 돌아오는 아들을 보았을 때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눅 15:20).
 
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요 1:10-11). 이사야 42:2에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존귀하신 분이지만 자기를 드러내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종의 모습으로 낮추어 사람들을 섬겼습니다(빌 2:6-7). 죽음아래 노출된 인간들을 위하여 기름과 포도주가 아닌 자기의 피로 씻어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히 9:12).

2)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역사와 사건과 인물들은 대부분 신약시대에 펼쳐질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상징적 계시가 됩니다. 여호수아 때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공용지로 구별한 도피성이 있습니다. 요단강 동편과 서편에 각각 세 곳씩 지정된 이 성읍은 이스라엘사람 가운데 부지중에 살인자가 되어 복수자에게 쫓기는 사람이 피하여 들어가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수 20:1-9). 오늘날 교회를 도피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도피성은 인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거나 찾아가기가 힘들어서는 안 됩니다(신 19:6).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항상 닦아서 급할 때 쉽게 접근하도록 배려하게 하였습니다(신 19:3).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하는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힘들고 지친 심령에게 손쉬운 이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구속받은 성도들입니다.

성경은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엡 1:1).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요(빌 2:5), 그리스도와 멍에를 같이 메고 십자가의 삶을 실천하는 자입니다(마 11:29). 이름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그 마음의 상태나 생활의 양식이 그리스도의 성향과 전혀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같은 경우일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런 부류였습니다(마 23:27).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20:28).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는 성도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강도 만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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