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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3) (사 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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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3) (사 50:4-9)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일본질이십니다.
본문에 말씀하시는 이가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결정적인 근거가 본문 6절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수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성경을 자신에게 적용시켰습니다. 
누가복음 18절 31-32절에 『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고 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여호와의 종으로서 그리스도를 세 번째 나타내심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충성이 4-5절에 나타납니다. 그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이 6절에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승리가 7-9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의 스승이십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하시면서도 친히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을 다했습니다(요 13:14). 

Ⅰ. 그리스도의 충성된 사역입니다.

1) 그는 학자였습니다.
본문 50장 4절에 『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 『 학자 』를 뜻하는 『 림무딤 』은 "배운 자"를 의미합니다.i 
이 말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조용하게 가르치는 학자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28절에 『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사람의 심령 골수를 쪼개어 새롭게 합니다.
본문에 『 곤핍한 자 』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친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소생한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했습니다. 
본문에 『 아침마다 깨우친다 』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동행하시고 교통하신다"는 말입니다.
또 『 나의 귀를 깨우치신다 』는 말은 귀를 통하여 들려주신다는 말인데 "순종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시편 40편 6절에 『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고 했습니다. 
귀를 통하여 들려주시고 들은 것을 말하게 하시는 것이 이미 기독교가 타율주의 종교, 혹은 계시종교라는 의미입니다.
듣지 못하면 깨우칠 수 없고 깨우치지 못하면 말할 수 없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들어야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그것을 말로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롬 10:9).

따라서 듣지 못하면 믿지 못하고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듣지 못합니다(롬 10:14-16).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많이 배워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오해하고 신령한 것에만 치우쳐 있는 반지식주의는 절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잠언 15장 23절에 『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지식이 풍부해야 합니다.

2)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본문 50장 5절에 『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라고 했습니다. 
『 나의 귀를 열으셨다 』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순종하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수행할 때 그리스도는 거역하지도 않고 그 말씀이 지키기가 힘들고 두려워서 뒤로 물러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 완성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였으나 후회도 없으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8-9절에 『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라고 했습니다. 

Ⅱ. 그리스도의 수난입니다.

1) 침묵하는 수난입니다.
본문 50장 6절에 『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사역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6장 67절에 『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6절에 『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절에 『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고 했습니다. 

2) 인격모욕의 수난입니다.
본문 50장 6절에 『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라고 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 수염 』은 인격과 신분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수염을 자르는 것과 뽑는 것을 최고의 모욕으로 여겼습니다.
누가복음 18장 32절에 『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모욕적인 형벌입니다.
느헤미야 13장 25절에 『 내가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로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라고 했습니다. 

3) 능동적인 수난이었습니다.
본문 50장 6절에 『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모두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난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자원하신(voluntarily) 순종은 그 수난 자체에서 속죄적 완성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65절에 『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5절에 『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모든 수난을 당하시면서 굽히거나 타협하지 아니한 것은 그 수난 자체를 능동적으로 감수했기 때문입니다.

Ⅲ. 승리를 확신하는 그리스도입니다.

1) 도우심을 확신했습니다.
본문 50장 7절에 『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라고 했습니다. 
본문 50장 9절에 『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삼위일체의 대표이신 성부와 택자의 대표이신 성자 사이에 맺으신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예정된 고난입니다.
누가복음 22장 42-43절에 『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고 했습니다.

2) 인내하는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50장 7절에 『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내하시고 잠잠하시므로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고통이 따르더라도 사명수행을 위해 끝까지 굳센 각오를 했다는 말입니다. 
에스겔 3장 8-9절에 『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32-33절에 『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에 『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50장 8절에 『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은 여기 『 의롭다 하심 』은 죄인을 의롭다 칭하는 칭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메시아의 의롭고 무죄하신 품성을 인정하고 증거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 『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변화산에 영광을 목도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에 『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고 했습니다. 

빌라도 아내의 입을 통하여 증거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9절에 『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고 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친히 목도한 로마 백부장교의 입을 통하여 증거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7절에 『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라고 했습니다. 
이 모두는 그리스도의 전 공생애가 하나님의 약속가운데 되어졌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그의 의로우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4) 그리스도는 심판의 주이십니다. 
본문 50장 8절에 『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미 바알 미쉬파티,)라는 말은 "누가 나의 재판관이냐"(Who is jurisdiction)라는 뜻입니다. 
"재판관이 누구냐?"가 아니라 "나의 의로움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나의 불의함을 신고하기 위하여 재판을 걸어오는 자가 누구냐? 라는 말입니다. 그 누가 소송을 해도 결국 메시야 자신의 의로움이 인정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이 의가 되시고 의로움이 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심판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 22절에 『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7절에 『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 『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심판의 주가 되어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영감 받은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1절에 『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성도들은 학자의 혀가 되어야 합니다. 학자는 "배운 자", "가르침을 받는 자"라는 말입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배운 말씀만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세상의 지혜를 더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성도들도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의뢰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올 때 그 고난을 괴로워만 하지 말고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혜안이 요구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 자유를 누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6절에 『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최후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를 다시 송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기 때문입니다(롬 8:33).

이제 우리를 다시 정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34).
이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고통과 핍박과 위험과 죽음 가운데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기 때문입니다(롬 8:35-37).
로마서 8장 38-39절에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고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교회를 회생 불가능한 말기 암 상태라고 진단합니다. 대단히 암울한 진단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죤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프린스톤 신학교 100주년 기념 연설문에서 말하기를 "교회는 현대 사상의 강력한 물줄기가 돌보는 이 없이 흘러가도록 허락만 하고 그 조류의 뒷전에서 자신의 사역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의 이김은 잠시일 뿐이다. 현대 문화의 거대한 조류는 조만간 교회의 보잘것없는 조수마저 삼켜버리고 말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승리의 영광을 홀로 차지할 것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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