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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므로 하나 됨을 지키십시오 (엡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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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하나 됨을 지키십시오 (엡 4:1-3) 

: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래 전, 심방을 가서 찬송을 부르다가 겪은 일입니다.
그 때 부른 찬송은 지금의 찬송가로 544장 ‘울어도 못하네’였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하며 1절을 힘차게 불었습니다.

2절을 불렀습니다.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여기까지 불렀는데 제 옆에서 함께 찬송을 부르시던 권사님이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왜 힘쓰면 안 돼! 힘써야지!”

‘힘써도 못하네’ 찬송을 부르다가 함께 심방 간 권사님이 힘쓰면 된다고 소리를 지르시니 예배가 잠시 중지되었습니다.

심방을 간 그 가정은 소리를 지른 권사님의 친척뻘 되는 가정이었습니다. 권사님은 이 가정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서 남들이 도와주는 것이나 받아먹고 사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우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울어도 못한다고, 힘써도 못한다는 찬송으로 부르니 권사님 마음에 열불이 났던 것입니다.

그 권사님은 오래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지금도 이 찬송을 부르면 그 권사님이 생각이 납니다.

우리에게는 울어도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씻는 일입니다. 죄를 씻는 일은 울어도 못합니다. 힘써도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나게 하는 일은 힘써도 못합니다. 참아도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흉한 죄에 빠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참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씻고 다시 나게 하고 죽음에서 다시 사는 일은 울어도 힘써도 참아도 못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오직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야만 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그런데 우리에게는 울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히스기야처럼 울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애통하게 여기며 회개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녀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울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재능을 다하여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또한 참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어 믿어야만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믿는 우리들이 힘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행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엡 4:1)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 내용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2)입니다. 겸손함과 온유함 그리고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함은 그리스도인들이 덕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겸손함과 온유함 그리고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함으로써 이루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겸손하고 온유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무엇을 위하여 오래참고 서로 용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결과로써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삶으로써 이루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3절 말씀입니다.
: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행하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통하여 이루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V. 하나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말은 ‘힘쓰라’는 말입니다. ‘힘쓰다[spoudavzw/스푸다조]’는 ‘서두르다’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서둘러서 빨리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노력하다, 애쓰다, 부지런히 하다’라는 뜻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노력하다’ 보다 강한 표현으로서 어떤 목적을 향한 진지하고 열심 있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1. 힘써야 합니다.

뒤로 미루지 말고 서둘러 힘써야 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런 일은 힘써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공부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경영자는 경영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노동자는 일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실천하며 전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였다. 그 재판관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고 하였다.(눅 18:2-5)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 18:6-8a)

예수님은 우리에게 힘써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천국 시민으로써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힘써야 할 것에 힘쓴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힘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가 두 번째 주목하여야 할 말은 지키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지키라[threvw/테레오]’는 눈을 떼지 않고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과는 다릅니다. 군인이 요새나 진지를 지키는 것과도 다릅니다.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돌보며 보호하는 것입니다. 애정을 가지고 눈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2. 지키는 것을 힘써야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쓰이고 지켜보게 되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중요합니다. 더욱이 다른 것에 비하여 먼저 서둘러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면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힘써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온유와 겸손 그리고 오래 참음과 용납으로 힘써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가 세 번째로 관심을 가져야 할 말은 ‘하나 되게 한 것’입니다. ‘하나 되게 하신 것[eJnovth"/헤노테스]’은 만장일치입니다. 연합을 이루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키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었으니 그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3.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을 힘써야 합니다.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은 우리가 힘써서 하나가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가정이 하나 되게 하고, 사회가 하나 되게 하고, 민족이 하나 되는 통일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계신 예수님은 비장한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예수님은 이어서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예수님의 소원은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끼리 하나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였습니다. 죄를 가진 인간과 죄가 없으신 하나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없애 주기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위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심으로 그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는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하나가 된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힘써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가 되었다는 것에 눈을 떼지 않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여야만 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얻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은혜로 시작한 것이 공로를 주장하는 것으로 흐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떨어져 믿음 없는 사람처럼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을 떼지 않고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신 분은 누구이십니까?
: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가 네 번째로 관심을 가져야 할 말은 ‘성령[pneu'ma/프뉴마]’입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또한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4.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을 힘써야 합니다.

하나 됨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 됨은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하나 됨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하나 됨은 궁극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옛날 한 선비가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갔다가 거울 하나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이 거울을 자랑스럽게 아내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거울을 보는 순간 아내는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젊은 여자의 모습이 불쑥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남편이 서울에 가더니 젊은 첩을 얻어왔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는 그럴 리가 있겠느냐며 거울을 보니 거기에는 늙은 할머니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건넛마을 할머니가 마실 와서 여기 있네!” 하였습니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시아버지가 무엇을 가지고 수다를 떠냐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이번에는 늙은 할머니 대신 늙은 할아버지 모습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시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더니 두 무릎을 꿇고 말씨도 공손히 “아버님, 무슨 일이 있으시기에 이렇게 현령 하셨습니까?”하며 절을 했습니다. 

며느리는 분명히 젊은 첩의 모습을 보았는데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싶어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여전히 아까의 젊은 첩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화가 치민 며느리는 거울을 내어 던져 버렸습니다. 결국 거울은 깨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거울은 자기의 얼굴을 비출 뿐입니다. 자기 얼굴을 드러내면 하나 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교회가 하나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도 끊임없이 여러 가지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그러니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바로 그 사람들의 속에 있는 속사람의 모습입니다. 바로 각 사람의 속에 계신 성령님이 같은 분이시기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라는 것은 그 사람들 속에 같은 성령님께서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는 동일하신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당신 안에 계신 성령님께 문안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까?
: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다섯 번째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말은 ‘매는 줄’입니다. 여기에서 ‘매는 줄[suvndesmo"/쉰데스모스]’은 ‘연결하는 선, 끈’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서로 묶어 주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연합시키는 원리를 가리킵니다. 성령님께는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5. 매는 줄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을 힘써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끈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혈연, 지연, 학연 등등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만나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눕니다. 고향을 묻습니다. 같은 고향이면 출신 학교를 묻습니다. 같은 학교면 졸업 연도를 묻습니다. 여기까지는 피차 존댓말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졸업 연도가 밝혀지면 바로 한 쪽은 반말로 들어갑니다. 다른 쪽은 깍듯이 존댓말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같은 끈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통합을 어렵게 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자기 식구 챙기기가 비리의 온상이 되기도 합니다. 연고주의가 사회적 역기능이 되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만든 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끈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도록 묶어주신 끈은 무엇입니까?
: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가 여섯 번째 마지막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말은 평안입니다. 여기에서 ‘평안[eijrhvnh/에이레네]’은 구약의 ‘샬롬’입니다. 이것은 국가적으로 평온한 상태, 전쟁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성령님께서 주는 행복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입니다. 평화의 복음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6. 평안의 줄로 매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을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끈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당당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을 묶어주는 끈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화해를 이루셨습니다(2:14-18). 

어느 임금님에게 개가 있었습니다. 이 개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임금님은 이 개에게 도리도리를 시키는 사람에게는 상금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상금을 얻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마지막 한사람이 남았습니다.

임금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이 개를 도리도리하게 할 자신이 있는가?”
“물론이옵니다. 폐하!”
“자 어서 시작해보게!”

그 사람은 준비해 온 보자기에서 주먹만 한 돌을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힘껏 개를 향하여 날렸습니다. 개는 깨갱거리면서 임금님 뒤로 숨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개에게 물었습니다.

“또 맞을래?”

개는 안 맞겠다고 냉큼 도리도리 짓을 하였습니다. 드디어 도리도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뒤에 부작용이 났습니다. 그 때부터 도리도리만 할 줄 알지 끄덕끄덕은 전혀 하지 못하였습니다. 

임금님은 다시 명하였습니다. 이 개에게 끄덕 끄덕일 수 있게 하는 사람에게 후한 상금을 내린다고 방을 붙였습니다. 

방이 붙자마자 도리도리 사건의 그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그러고 이 한마디를 내뱉고 상금을 챙겨갔습니다. 그 말은?

“너 나 누군지 알지?”

이 이야기는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뒷맛이 개운치를 않습니다. 그냥 웃고 지나가는 이야기기는 한데 방법이 너무 폭력적입니다. 우리의 지난 시대에 간혹 어께에 힘을 주고 눈을 부라리면서 ‘너 나 알지!’하는 방법으로 휘어잡아 잡아끄는 끈이 사회에 있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쉽게 하나 되게 할 수가 있었으나 비인격적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편안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매를 맞으심으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으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하나가 되었습니다. 삶의 모양이 다르고 신앙의 형식이 달라도 같은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중요한 관심입니다. 이것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힘써 지켜야 하는 것을 힘써 지키지 않으면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훼방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여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분열과 다툼으로 몰아가려는 도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하나 됨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 됨에 관심을 가지고 힘써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온유와 겸손과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하나 됨을 힘써 지킴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하나 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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