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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의 정권교체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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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정권교체 (갈 2:20)

제가 전에 자주 가던 식당을 가보았더니 간판이 바뀌었습니다. 
알고 보니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그러니 메뉴도 일부 바뀌고 종원업도 바뀌었습니다. 식당 내부 인테리어도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문제는 식당의 핵심인 “음식의 맛”이 예전만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벌써 6개월이 지났으니 지금도 그 식당이 영업을 계속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런 음식 맛으로는 견디어 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서울시장이 교체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시정이 많이 바뀔 것입니다. 임명직에 있는 많은 분들이 자리가 떠나게 될 것이고 새시장이 임명하는 사람이 차지할 것입니다. 제가 듣기로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바뀌면 새로 임명하는 자리만 3천개정도 된답니다. 이중 약 1000개 정도는 상원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워진 3천명에 의해서 또 임명되는 자리까지 합하면 약 5만 명 정도가 바뀐다 합니다. 이처럼 주인이 바뀌면 많은 것이 바뀌고 변화됩니다. 

모든 만물에는 주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지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의심 없이 믿습니다. 그분이 창조하셨고 그분이 운행하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통치권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 것이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많은 사람이 자기의 주인은 ‘자신’이라 생각하고 삽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이라면 분명하게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고백했던 것을 아시지요? 

따라서 합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멘?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면 그 순간 주인이 바뀝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생의 구주로 모셔드렸다는 말은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는데,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주인이 된 것입니다. 아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인 것처럼 살지만 실상은 보이지 않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단이 주인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지배하에 있었던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그 순간이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치적인 용어로 “신앙의 정권교체”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드린다는 의미는 내 인생의 권력을 예수님께로 이양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정권교체(政權交替)란 말뜻이 뭐지요? 정치권력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면 우리는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아멘?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다시 한 번 다 같이 읽읍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이 내 주인이고 그분이 내 전인격을 통제하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서 주님이 강조하시는 것이 뭡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안에”“살리는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이런 말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있습니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까? 우리 안에 살리는 영이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우리 주인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 주인이십니다.  

요한복음 14:20절을 보세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하시고 주님 안에 우리가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성공실패 여부는 누가 내 속에서 주인이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내 주인인가?” “그리스도가 내 주인인가?” 

그래서 성숙한 믿음이란 내 안에 그리스도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내 안에서 하나님과 일체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생각이 주님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내 발걸음이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모든 삶은 내 안에 그리스도를 가득 채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노력할 일도 있으나 나는 나를 주님께 내어 드리기만 하면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내속에 예수님이 없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289장에도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야 사람다운 삶을 삽니다. 결국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하여 우리가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영적 정권교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나요? 여러분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을 확신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20절 초반을 보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사도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바울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분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입니다. 죽을 자가 아니고 죽은 자입니다. 이미 끝났습니다. 죽어버렸습니다.  

십자가 못 박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서 십자가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통, 굴욕, 치욕, 사명, 직분 등 여러 가지를 의미합니다. 과거 십자가는 사형 틀입니다. 극악한 죄수를 처형할 때 쓰이는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십자가는 소름끼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우리 죄값을 대신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때부터 십자가는 내가 죽은 장소를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그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십자가에 함께 죽은 자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그 순간 그 십자가가 여러분의 십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은 내가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죽은 자입니다.  

에베소서2장1절 이하를 보세요.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여러분! 이런 구절을 읽으면 가슴이 떨려야 합니다.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그랬던 우리가 어떻게 되었다고요? 

5절을 다시 보세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할렐루야! 
살리셨습니다. 주님이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고 영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십자가에 죽어야 하나요?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 값은 피를 흘려야 치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죄인은 “정령 죽어야” 합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당신이 지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살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보세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라고 해놓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살았다는 말입니까? 죽었다는 말입니까? 죽었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십자가에 죽었고 그리스도로 새롭게 산사람은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나 이런 말 할 수 없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하나가 되고, 죽음을 극복해야 이런 말이 가능합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죽었습니다. 옛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기에 주인이 여러분이 아닙니다. 이미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둘째로 알아야 할 것은

2. 내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여 주인이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합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에 이제 내안에는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고, 내가 죽음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삶을 의미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나의 주인으로 내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아직도 덜 죽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힘들고 아프고 시험 들고 온갖 쇼를 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었습니까? 여러분은 십자가에 죽었습니까? 왜 대답이 분명하지 않지요? 

아직 덜 죽었습니까? 아주 죽어야 하는데 덜 죽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주인노릇하려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안 죽은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요. 안 죽는데 어쩌라고요? 죽었다고 믿어요. 그리고 나를 포기하세요.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주님이 주인입니다.  

‘귀신이 산다’는 영화가 있습디다. 
귀신이 내 안에 사는 사람은 귀신이 시키는 대로 말합니다. 내 안에 귀신의 소리를 냅니다. 귀신의 생각대로 생각합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을 보세요. 두려워 떨고 제정신이 아닙니다. 

귀신은 실존합니다. 어떤 분은 “귀신이 있긴 뭐가 있어” 하는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런 소리 하면 안 됩니다. 귀신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귀신 들린 사람은 귀신에 종노릇합니다. 꼼짝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채워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야합니다. 그분이 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입에서는 그분을 찬송하는 소리가 나야하고 그분의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면 그리스도가 시키는 대로 할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성령강림이후에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으니 그는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그가 달라졌습니다. 

그가 주님을 증거합니다. 공회 앞에서도 당당하게 전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런 모습을 보고 “성령 충만”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말은 그리스도로 가득 찬 사람의 모습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이고 진리의 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내안에 가득한 사람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사람 참 많이 봅니다. 바울사도 그리스도로 충만할 때 성령이 그를 이끌었습니다. 스데반이 그리스도로 충만할 때 죽음을 두려워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안에 있는 사람은 달라집니다. 

저는 요즘 길을 지나가다 보면 홍보용 사람 모양의 풍선을 자주 봅니다. 에드에어라 하는 것입니다. 펄럭이는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지나가다 보니 바람이 빠져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계가 고장이 났는지, 전기가 나갔는지 처참하게 깔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 모면서 우리 그리스도인 모습을 생각해 봤습니다. 바람이 들어있으면 펄럭이지만 바람이 빠지면 쭈그려져집니다.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빠지면 바람 빠진 풍선에 불과합니다. 처참합니다. 아무것도 못합니다. 무기력합니다. 그리스도가 내안에서 빠지면 아무 보잘 것 없는 인간이 됩니다. 그저 사악한 죄인의 한 사람일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사람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위인전이 아닙니다.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셨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 속에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계속에서 내속에 그리스도가 있음을 알게 하고 그분을 힘입어 살라 합니다.  

왜 예수 믿는 것이 힘듭니까? 

왜 교회 다니는 것이 힘이 듭니까? 그분이 빠진 상태에서 내 육신의 힘으로 살려 하니 그렇습니다. 그분이 내속에 들어오도록 모셔 드려야합니다. 그런데 안 모시어 들입니다. 문밖에 세워둡니다. 그러니 힘든 것입니다.  

535장 찬송가를 아시지요? 
(1)주 예수 대문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밖에 세워두니 참 나의 수치라

(2)문 두드리는 손은 못 박힌 손이요 또 가시 면류관은 그 이마 둘렀네.
이처럼 기다리심 참 사랑이로다 문 굳게 닫아두니 한없는 네 죄라

(3)주예수 간곡하게 원하는 말씀이 네죄로 죽은 나를 너 박대할 쏘냐
나 죄를 회개 하고 곧 문을 엽니다 드셔서 좌정하사 떠나지 마소서 아멘  

여러분의 주님은 여러분 속에 계신가요? 아니면 문밖에 서 계신가요?  


3. 그러면 우리는 어찌 살아야 하나요? 

사도 바울은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한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므로 완전히 변화 되었습니다. 그가 갈라디아서 6:14에서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 하니라” 

자기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인생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우리도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면 신앙생활이 간단합니다. 

그런데 자아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에 자존심이 상합니다. 교회에서 대우 못 받으면 상처를 받습니다. 결국 교회에서 생기는 모든 아픔과 고통은 십자가에 죽지 않아서 생기는 것입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마태복음 16:24에서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조건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1)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2)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깊이 살펴보면 이 둘은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부인이 뭡니까?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포기하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면 십자가는 절대로 지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2:4절에도 우리 주님은 죽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십니다.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열매를 맺습니다.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죽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목 메달아 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심령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생사의 복잡한 문제와 실패, 그리고 치명적인 실수들은 대부분 중심을 잃고 흔들렸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중심을 잃으면 큰 사고가 납니다. 자전거도 중심을 잃으면 넘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중심을 잃고 흔들릴 때는 모든 행동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심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의 삶의 중심은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내가” 중심이 되면 여지없이 흔들리고 내가 중심이 되면 넘어집니다. 

우리 성도의 삶의 중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내안에 들어와 거하시여 내 중심이 되어주시면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지 않고 삽니다. 그리고 자기가 중심입니다. 인간 중심, 물질 중심, 세상 중심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늘 요동을 칩니다. 
늘 불안하고 흔들립니다. 왜일까요? 사람은 늘 변하기 때문입니다. 환경도 늘 변합니다. 

어느 날은 이것이 좋았다가 어느 날은 저것이 좋습니다. 어느 날은 기분이 좋았다가 어느 날은 괜히 기분이 안 좋습니다. 특히 여성분들은 그렇습니다. 
그러니 사람 중심으로 신앙생활하면 반듯이 실족합니다. 그러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중심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문제의 원인은 남이 아닌 내게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죽어야 합니다. 육신의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속에 주님은 거하십니다. 우리는 그 주님만 의지하고 성령을 힘입어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처럼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내 속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직도 내가 움켜잡고 있는 그 주권을 주님께 내어 드리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명령하는 대로 순종하고 그분이 시키는 대로 사시길 축원합니다. 

“주님! 주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나를 다스려 주세요. 나를 새롭게 해주세요. 내속에 정한 마음을 허락해 주세요.” 부르짖어야 합니다. 

명심할 것은 여러분의 주인은 여러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여러분의 주인입니다. 이미 정권이 교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분께 주권을 돌려드리고 그분만이 나의 통치자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문밖에 세워두지 말고 모셔 들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은 여러분 속에 들어오셔서 왕이 되시고 여러분의 모든 삶을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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