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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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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 (눅 18:9-14)


운동선수들에게 필요한 원리적인 운동철학이 있습니다. 운동을 잘하기 위해서, 또 운동을 잘하려면 이런 생각 이런 자세로 임해야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비단 운동만 아니라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성공하려면 이와 같은 원리를 생각하라는 철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영문 C자로 시작되는 세 단어를 요약해서 3C라고 표현합니다. Confidence, Concentration, Courage 이렇게 세 가지를 말합니다.Confidence 라는 것은 심리적인 안정을 말합니다. 

자기 능력에 대해 품고 있는 강한 확신이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고 이 마음의 안정이 육체도 힘을 얻게 하고, 정신력에도 도움을 줍니다. 중요한 일을 하면서 이런 걱정 저런 걱정을 가지고는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평화로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고로 언제나 마음이 평안하고 안정된 상태에 있어야만 무슨 일도 할 수 있고, 무슨 생각도 할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얘기입니다. 육체의 건강도 그렇지 않습니까? 

두 번째는 Concentration, 집중력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떤 환경, 어떤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히“머리가 좋다. 나쁘다.”를 많이 이야기하면서 구분 짓습니다만 여러분, 인간의 평균적인 지능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100점입니다. 그러니까 IQ가 100만 되면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래서 100 이하를 동년배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평균 이하로 보며, 100점 이상은 평균 이상인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IQ 점수의 분포도에 의하면 하위 2.3%가 70점 이하를 얻고, 상위 2.3%만이 130점 이상의 점수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약 95% 가량이 거의 평균치의 IQ 안에서 사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 평균치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어떤 이는 특별히 똑똑해 보이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 것처럼 보이느냐 말입니다. 여기에 바로 집중력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못하고도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집중력의 차이입니다. 그럼 젊은 한 때는 총기도 있었고, 기억력도 좋았는데 나이 먹은 지금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한탄하시는 어르신들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젊은 사람들은 기억력도 좋고, 배우면 금방 아는데 들어도 돌아서면 잊어먹고, 적어두고도 어디에 있는지 못 찾고..죽을 지경입니다. 지금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에 베델성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50이 넘은 권사님들과 집사님이 공부를 하는데 늘 그 소리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합니다. 더 좋아지려고 괜히 스트레스 받지 마십시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뇌세포가 죽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죽느냐 말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하는 게 많고 걱정과 염려거리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이것 저 것 걱정합니다. 살림 걱정, 남편걱정, 부인 걱정, 직장, 사업걱정에 자식걱정까지...그러다보니 한마디로 집중력이 흐트러집니다. 결국 이 떨어진 집중력이 기억력을 떨어뜨리고, 뇌세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집중력이 문제입니다. 집중력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C는 Courage 용기입니다. 결정적인 시간에는 결단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용기란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입니다. 어떤 사람은 매사를 자기의 판단력에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지식에 의지하기도 합니다. 또 여자들은 육감을 내세웁니다. “여자의 육감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뭐 이럽니다만 실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가하면 순전히 자기 느낌에만 중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판단하고 느끼기도 하고 예감도 있어야겠지만 마지막 결정은 의지적인 결단과 용기입니다. 그런데 그 결단의 기준이 무엇이냐? 바로 의입니다. 옳지 않은 것에 대한 결단을 용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용기란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는 최후의 것입니다. 옳은 것에 대한 판단과 옳다고 인정되는 것이면 결단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합니다. 항상 ‘느낌이 이러니 이렇고, 예감이 저러니 저렇다.’ 고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란 무엇입니까? 의란 우리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의롭게 사는 것,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여기 있는 우리가 지금 막 죽음을 맞이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죽는 시각인데 재산이 소용 있겠습니까? 죽는 순간에 장수한 것이 얼마나 보람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식이나 명예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설 것인가?” 하는 의의 문제만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까지 의가 있어야 하겠고, 그래야만 하나님 앞에 떳떳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그런데 의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의입니다. 나의 세계관, 나의 철학, 나의 경험, 나의 고집, 나의 양심에 따라 스스로 세운 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의 의외에는 어떤 것에도 침범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나름의 잣대입니다. 그런가 하면 둘째는 상대 적인 의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내가 참 궁금하거든요. 내가 더 낫다거나 더 못하다고 비교하게 되는 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반드시 내가 인정받고 싶어 하는 쪽의 의입니다. 말하자면 스스로 느끼는 행복감에 만족하기보다는 남에게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는데서 더 큰 만족감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의롭게 되기 위하여 노력한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칭해 주기를 은근히 바람으로 나타나는 문제 있는 삶입니다. 이건 행복이 아니라 불행입니다. 

의의 마지막 셋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가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이라는 한계성을 인정하고 내의의 불완전성도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며 그대로 어기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셔야 옳은 것이며, 그 인정을 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성실히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가장 바람직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마땅한 의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 세 가지의 의를 다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이 통합적인 의를 이루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나는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지를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때에는 나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인정해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내게도 옳고 하나님께서도 의롭다하시는데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외롭고 고독한 길을 가야합니다. 그러나 이 길이 바로 우리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하시고 내게도 의롭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이 길이 성도가 가야할 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바로 의에 대한 문제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를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에 말씀을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서로 명예도 다르고 위치도 다릅니다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갔다는 것이고 둘째 공통점은 둘 다 의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또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의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기도드린다고 하면서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자리에 서서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마땅히 들어 주실 것이라는 자기교만에 빠져 큰 소리로 될 수 있으면 길게 기도했습니다. 오직 그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자기가 잘한 것을 자랑하며, 자기 의를 내세울 것인가에 매여 있는 가치관의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겉모습뿐이었던 바리새인의 기도는 끝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고 맙니다. 

반면, 세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조차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기도할 자격도 없는 죄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처럼 앞자리에도 못 서고 멀리 서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은 “나는 무엇도 했고, 나는 무엇도 했으며...”라고 자기 자랑이 있었건만 세리는 할 자랑이 없었습니다. 말주변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어쩌면 해 놓은 일이 하나도 없었던 것도 아닐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나는 했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기에 너무나 부끄러워 생각조차 나지 않는 일입니다. 내세울만한 자기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기 의를 전적으로 부정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리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는 의롭다함을 얻고 기쁜 마음으로 성전을 나서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멋있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여인은 그저 흐느껴 울기만 했습니다. 어떤 환자는 소리만 질렀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없이 예수님의 처분만 기다렸습니다. 어떤 여인은 말없이 눈물로 그 발을 적셨습니다. 또 어떤 여인은 떼를 쓰며 매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세리는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응답 받았습니다. 그 응답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참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들의 기도에는 자기의 자랑, 즉 자기 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단순히 입으로만 드려지는 모양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몸으로 드려진 가치 있는 기도였습니다. 이것이 응답의 비결입니다. 

여러분, 신앙적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의, 자기의 자랑을 늘어놓기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로 모든 것을 내어놓지 못합니다. 언제나 되돌려 받을 수 있고 언제든지 철수 할 수 있는 만큼의 거리를 두고 신앙생활 합니다. 다행히 자기자랑이나 자기 의가 먹혀들면 발을 딛고 살지만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는 얼른 발을 빼고 돌아서는 비 신앙적인 모습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를 좀 돋보이게, 좀 더 낫게, 좀 더 거룩하게 보이고자하는 인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좀 특별하게 보이고 싶겠지만 그러나 여러분, 나는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도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만 하나님 앞에는 교만하기 그지없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많이 했다고 다 이루어집니까? 하나님께서 들으셔야 합니다. 내가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선행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선행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오늘 바리새인처럼 어떻게든 자기 의를 내세워서 하나님께로부터, 혹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내려는 <보상 심리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 것이 아니라 내가 내세우지 않아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희생적인 신앙가치관>으로 살아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세상은 하루도 제 자랑을 늘어놓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자랑, 내 의를 나타내는 불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적 가치관을<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에 두시기 바랍니다. 자기자랑 때문에 교만하지 말며, 자기 의로 인해 마땅한 상급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로운 삶을 사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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