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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치확인 (롬 8: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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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확인 (롬 8:26-30)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절)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8,091m) 남벽 신(新)루트 등반 중 실종된 박영석 대장 일행을 찾기 위한 집중수색을 벌이고 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습니다. 마지막 교신 이후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지에 투입된 수색대들은 수없이 소리소리 지를 것입니다. “박영석, 네가 어디 있느냐? 신동민, 강기석, 너희들은 도대체 어디 있느냐?” 

‘네가 어디 있느냐?’ 태초부터 에덴동산에 이 소리가 울려 펴졌습니다. 제 자리를 떠난 아담을 애타게 찾으시는 음성입니다. 이 질문은 한 자연인이 아니라 인류의 대표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단지 어디 있느냐가 아닙니다. 뭘 하느냐? 어떤 생각을 하느냐? 누구와 함께 하느냐? 어디를 나아가느냐는 물음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물음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분이 있습니다. 설악동 자락에 위치한 한경직수양관에 들어서면 입구부터 ‘네가 어디 있느냐’란 현판이 방문객들을 맞습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의 친필입니다. 울퉁불퉁한 글씨체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물음이 설악동계곡을 휘감아 큰 울림으로 메아리가 되어 방문객들에게 들리는 듯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물음 앞에 정직합니까?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음성 앞에 정직하게 답할 수만 있다면 그 걸음은 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위치를 언제나 확인해야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나아가는 자야말로 진정 후회 없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 있단 말입니까? 로마서 8장 29, 30절을 주목해봅시다. 그 유명한 구원의 서정(序程)입니다.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하심, 영화롭게 하심이란 다섯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믿음의 경주자들이 예외 없이 통과해야 하는 지점들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 구원의 단계쯤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구원을 위한 출발지점은 ‘미리 아심’입니다. 이는 지적(知的)인 앎을 뛰어넘어 부부간의 깊은 교제,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동기는 오직 하나, 우리와 교제하고, 사랑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창세전에 미리 선택해 놓으셨습니다(엡 1:4). 

그 다음단계가 ‘부르심’입니다. 때가 되매 예수 믿도록 이끄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그분은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출 12:13). 

그 다음단계가 ‘영화롭게 하심’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다섯 단계 중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먼저는 부르심과 의롭다하심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롬 8:33-34). 물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예수’라는 의(義)의 옷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의롭다하심’에서 ‘영화롭게 하심’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의롭다하심과 영화롭게 하심 사이, 여기가 바로 우리의 위치입니다. 이제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상을 코앞에 둔 이 지점은 과연 어떤 곳입니까?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계 2:13). 

주님께서 말세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앞서 네 단계까지는 사탄이 전혀 개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위치, 즉 ‘의롭다하심’에서 ‘영화롭게 하심’의 단계로 나아가는 이 과정에는 복병(伏兵)이 숨어있습니다. 사탄의 집요한 공격, 훼방, 넘어뜨림, 유혹이 이어집니다(벧전 5:8). 택한 자들을 미혹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계 12:15-17). 사탄은 강온 전략, 햇볕, 바람을 적절히 구사합니다. 

얼마 전 제가 자전거를 잃어버렸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날 아침 이발을 하면서 한 순간도 자전거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습니다. 이발을 마치고 나오려고 하는데, 주인이 “목사님, 요구르트 하나 들고 가시지요?” 하는 것이 아닙니까? 받기 위해서 돌아서서 빨대를 꽂고 입에 대고, 요구르트를 빨면서 주인과 몇 마디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섰는데, 그 순간 없어진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 요구르트가 ‘150원’ 한답니다. 그것 좋다고 빨다가 큰 것 놓쳐버린 것입니다. 영적으로 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사탄이 이런 방법을 쓰겠구나! 밥풀떼기 하나 던져주고선 큰 것 빼앗아가는구나! 하지만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도구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에게 떡덩이로 다가왔던 사탄이 나중에 십자가까지 동원하여 넘어뜨리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사탄의 권좌’, 즉 영향력이 최고로 강력한 곳에 지금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위치를 가장 실감 있게 보여주는 말씀이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입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라고 보는 것이 제일 적합할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마귀를 뜻합니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성향을 한 달란트 받은 자가 그대로 고스란히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누구를 상징할까요? 우리들입니다. 왜 다섯 달란트, 세 달란트, 한 달란트라고 하지 않고 두 달란트라고 했을까요? 여기에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서있는 위치는 사탄의 위(位)가 있는 곳, 다시 말하면 사탄과 더 가까운 곳에 우리가 서있습니다. 그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5장의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누구를 바라보며, 누구의 모습을 닮기 원합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저 멀리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기 원합니다. ‘그같이 하여’(마 25:17).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결국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받은 칭찬과 상급을 똑같이 받아 누리는 자가 됩니다(마 25:21,23). 

사랑하는 여러분!
‘네가 어디 있느냐?’ 내 위치를 확인해야 합니다. 내 옆에 사탄이 더 가까이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근신하고 깨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빌 2:12). 로마서 8장 29, 30절에 ‘하나님’이란 주어가 여덟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어 가십니다. 반드시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경주하는 주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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