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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을 입었으니 (골 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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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을 입었으니 (골 3:1-11)


흔히 말하는 성공하는 비결 중에 '자신의 역할모델(role model)을 정해 놓고 따라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자기가 닮고 싶어 하는 성숙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 혹은 자기가 이루고 싶어 하는 목표를 이미 성취한 사람 한 명을 정해 놓고 마치 자기가 이미 그 사람이 된 것처럼 흉내 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역할모델의 옷차림이라든지 말씨부터 시작해서 그 사람의 생활 습관, 취미, 대인관계의 요령 등 그 무엇이든지 지금 당장 따라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모방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자기도 바로 그 사람과 똑같은 위치나 수준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될 원칙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번 새겨 들을만한,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비록 아직 현실적으로는 말단사원이지만 자기가 마치 이미 사장이 된 것처럼 생각하고 사장의 일처리 방법, 사장의 시간관리, 사장의 대인관계를 흉내 낸다면, 적어도 그런 위치에 도달하는 시간만큼은 틀림없이 짧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모델이 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면 어쨌든 이미 슈퍼모델이 된 사람을 하나 자신의 역할모델로 정해 놓고 그녀의 매너, 걸음걸이, 옷차림의 개성 등을 모방해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시도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남을 잘 모방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수준을 높이는 것은 사실 우리 기독신자들에게 가장 잘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이 인간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그야말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완벽하신 역할모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바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하신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의 본론은 '기독론' 즉 예수 그리스도가 그 주제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성도가 신행일치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역할모델로 삼고 본받으려 하는 노력이 필수적인 것을 크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성화, 즉 '예수님과 똑같은 상태에 이르는 영화'가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종목표이므로 거기에 도달하기 위하여 바로 지금부터 우리가 예수님을 모방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본받고 따라하기 시작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새 사람을 입게 되는' 성화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방입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 기독신자가 예수님을 흉내 냄으로써 새 사람이 되어 가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새 사람은 예수님처럼 위엣 것만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 1절로 4절에 기록하기를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 신자가 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신자는 '죄에 대하여 죽는 것'뿐만 아니라, 중생하고 영생하게 되는 이 '새 생명의 살리심'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신자라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잘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을 공유하는 존재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일단 제쳐 놓고 우선 나 자신이 과연 그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엄청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 증거 중에 하나가 바로 "위엣 것을 찾는" 영적 사고 작용입니다.
예수님과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공유하게 될 사람이라면, 이 현세에서도 일단 예수님을 따라할 수 있는 것을 따라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자신도 '땅엣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위엣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 "찾으라"는 말은 '관심을 두라' 혹은 '추구하라'는 뜻으로서, 우리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지대한 관심사나 목표가 오로지 '위엣 것'들만 되는 생각의 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땅엣 것들을 생각지 말라"는 말은 세상일들은 완전히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이 둘을 합하면, 이전처럼 땅에 있는 것들만 좋아하고 추구하고 계산하던 버릇을 버리고 이제는 위에 있는 영의 세계, 영원한 것,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관한 일들을 자신의 사고 작용 속에 채워 넣으라는 말씀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방식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항상 '위엣 것을 생각하는' 접근방식으로 사고하셨던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동안에 보여 주셨던 특징 중에 하나였습니다.
'떡과 명예와 세상 권세'로 유혹하는 마귀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하나님의 유일하심'만을 먼저 생각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병자들이 당신을 찾아올 때마다 그들의 '육신의 병'만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까지 구원받았음'을 빠짐없이 선포해 주셨던 주님이셨습니다.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실 만큼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계셨으면서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던 주님이셨던 것입니다.

실로 '땅엣 것'만 보이고 '세상적인 현실'만 주위를 압도적으로 에워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항상 '위엣 것'만을 생각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본받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이것부터 모방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저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 지금 나 자신이 맞이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처지에 계신다고 상상을 해 보면서, 예수님과 똑같은 시각(視覺)에서 사건을 판단하고 예수님과 똑같은 입장에서 일을 대처해 나가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성도가 그런 멋진 사고방식을 습관화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생명이 그 주님 안에서 완전히 안전보장되어 있음을 확신하는 성도입니다.
바로 3절에 기록된 대로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은 후에 우리의 생명은 놀랍게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감추었다'는 말은 몰래 숨겨 놓았다는 뜻이 아니라 안전하게 잘 보전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지극히 '안전한 곳'에 보전해 놓으셨고, 더구나 그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 놓으셨다면 더 이상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 사실을 확신하는 신자는 이제 이 세상에서 자신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 것인지를 염려하느라고 골치를 썩힐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죽은 후의 일 역시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즉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생명을 이처럼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 놓고 안심할 수 있게 되면 그런 성도는 자연히 이제 여유를 가지고 항상 '위엣 것'만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영적인 일'과 '주님의 나라'만 생각하면서 사는 성도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는" 자리 곧 '성화의 완성'과 함께 영생을 누리는 자리에 반드시 도달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 즉 중생을 받은 새 사람은 이처럼 먼저 자기의 사고방식, 사고작용 자체를 아예 '예수님 식'으로 만들어 가야만 합니다.
사장이 되고 싶은 사람이 사장처럼 생각하려고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의 몸으로 영생에 이르고자 하는 성도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법을 그대로 흉내 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아예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실로 경이롭고도 황공무지한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옛날의 나라면 도저히 못했을 생각, 옛날의 나라면 꿈도 꾸지 않았을 판단, 옛날의 나라면 어림도 없었을 기도 제목 - 이런 것들이 예수님을 역할모델로 삼고 따라 가시는 신자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체험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안전보장되어 있음'을 확신함으로써 '땅의 근심 걱정'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이제부터는 오직 예수님처럼 '위엣 것, 하나님의 일, 하늘나라의 소망'만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의 형상을 좇는 새 사람은 전혀 죄가 없으신 예수님처럼 자기도 죄를 벗어버리게 됩니다.

본문 5절로부터 9절의 말씀에 "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새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덧입어야' 하지만 또한 "벗어 버려야 할" 것도 있습니다.
이 '벗다'라는 단어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아니라 '꼭 벗어 없애야 할 것을 벗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바로 "옛사람과 그 행위"야말로 그처럼 반드시 벗어 없애 버려야만 할 옷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기 옷처럼 날마다 입고 살던 악한 행위'들은 그 악의 수위를 좀 약하게 낮춘다든지 그 악의 모습을 적당히 다른 모습으로 변환시키는 식으로 '바꾸어서' 될 일이 아니라, 무조건 완전히 '제거해야만' 할 대상입니다.
바로 그런 문맥이 5절로부터 9절까지 이어지고 있는 까닭에 그 서두에서부터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아주 강력한 어조로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벗어 버리라'는 명령은 곧 '죽이라'는 명령과 말만 다르지 뜻은 똑같은 것입니다.

그처럼 주님의 형상을 좇아가는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꼭 없애 놓고 보아야 할, 일단 완전히 죽여 버려야 할 '옛사람의 악한 행위'들이란 과연 어떤 것들입니까?
우선 5절에 보면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라고 열거하고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악한 행위들과 나중에 8절과 9절에 언급되는 악행들을 비교해 보면 이것들이 일종의 역(逆)점층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조금 덜 악하게 보이는 행위'부터 시작해서 '누가 보아도 명백히 악한 행위'로 나아가지 않고 그 반대의 순서로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나타나는 "음란"은 '음행'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며, 이 단어의 헬라어의 기본적 의미는 '창녀와 행음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부정"이란 단어는 좀 더 일반적인 '성적 죄악'들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즉 앞의 '음란'은 '육체적 접촉'이 곧바로 상기되는 음행인 반면에, '부정'은 '음란한 마음'까지 포함되는 광범위한 음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자가 '새 사람'이 되기 위하여 악한 행위들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나간다고 한다면, 제일 먼저 가장 대표적이면서 명백한 죄에 해당되는 '육체적 음란'부터 완전히 벗어 버려야만 그 다음에 '마음으로 간음하는 죄'를 벗는 수준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욕"은 '욕망'이란 뜻의 말인데,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곧 이어서 "악한 정욕"이라고 부가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적 욕망'을 비롯하여 '물질적 욕망'에 이르기까지 모든 악한 욕심들을 통틀어 가리키는 것으로서, 앞에 나왔던 음행보다는 완전히 벗어 버리기가 좀 더 어려운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심"은 특별히 '물질적인 욕심'을 강조하는 말로서, 이것까지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은 한 단계 더 어려운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음란'을 벗은 사람이라면 '탐심'쯤은 그냥 남겨 두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물론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우상 숭배" 즉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심각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8절에 이어지는 죄들은 그보다 더 흔하면서 반면에 완전히 벗어 버리기는 더 어려운 것들입니다.
"분과 악의와 훼방과 입으로 하는 부끄러운 말"들은 대체로 사람이 자신의 욱하는 성질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함부로 말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9절에 제일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거짓말", 이것은 정말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저지르는 죄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닮아 간다는 것은 바로 이처럼 '가장 명백한 악행인 까닭에 비교적 덜 범하는 죄'부터 시작해서 '악한 정도가 조금 덜하고 누구나 다 있음직한 죄'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벗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처럼 악한 행위의 '가장 두꺼운 옷'들부터 시작해서 '얇은 꺼풀'들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벗어나감으로써 진정한 '성화의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살인'이나 '간음'의 죄가 있으면 지금 당장 그것부터 완전히 제거해 버려야 하고, 그것이 청산되면 더 나아가서 '정욕'과 '물질욕'으로 인하여 범하게 되는 악행도 없애 버려야 하고, 그것을 다 고치고 나면 또 그 밑에 아직 남아 있는 '급한 성격'과 '실언' 때문에 저지르는 일상적인 죄까지도 극히 조심하게 됨으로써 점점 더 '그리스도의 형상'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나 자신의 '옛사람'에게서 '벗겨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다 벗겨 내고 '죽여야' 할 것들을 완전히 죽여 버려야 합니다.
어제 벗었다고 생각했던 죄가 오늘 또 입혀져 있으면 주저 말고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또 다시 벗어 버려야 하며, 이미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으면 딴 생각하지 말고 철저하게 죽여 버려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하고 옛사람의 악한 행위들을 계속 입고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하나님께로부터 '진노의 징벌'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다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던" 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사람'을 입은 자는 그 '주님의 형상'까지 구석구석 닮고 싶어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슈퍼모델을 자기의 성공 모델로 삼고 있는 모델 지망생들은 물론 따라해야 할 것도 많겠지만 '없애야 할 것'들도 많을 것입니다.
얼굴에 사마귀가 있으면 수술을 해서 제거해 버리고, 눈썹까지도 화장에 방해가 된다면서 면도를 하거나 아예 완전히 뽑아 버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오로지 더 예뻐지기 위해서 그처럼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없애야 할 것을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라면 그처럼 '영광 중'에 서게 될 자리에 결코 어울리지 않을 더러운 모습을 지금부터 하나씩 하나씩, 제일 크고 흉한 것부터 차례대로 없애 나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음란' 같이 뚜렷한 악행은 '수술'을 해서라도 완전히 제거해야만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그런 '가장 큰 흉터'를 없애고 나면 그 다음에는 '욕심' 같은 '주근깨'들이 이전보다는 더 돋보이게 눈에 띄게 될 것이고 그것 또한 수술을 하든지 화장을 하든지 어떻게 해서라도 지워 버릴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옛 사람과 그 행위'들을 벗겨 나가기 시작하면, 예전에는 전혀 보이지도 않던 '모공'까지 신경이 쓰이게 됩니다.
즉 이전에는 대수롭게 않게 넘겼던 자신의 사소한 언행이나 성격까지도 이제는 '너무나 보기 싫어져서' 그것들까지도 깨끗하게 지워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점점 더 세심하게 단장하고 날이 갈수록 조금씩 더 깨끗해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신랑 되는 주님을 맞이할 '순결하고도 아름다운 신부'로 준비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께 조금도 없는 죄'를 자신의 삶 속에서도 하나씩 벗어 버리고 완전히 죽임으로써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무리가 아니라 '천국의 혼인잔치'에 함께 들어가는 '영화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완벽하고도 멋진 최상의 '역할모델'을 모시게 된 것은 사실 천지창조 때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바로 본문 10절에서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일깨워 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처음 창조 받을 때부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좇아서' 즉 문자 그대로 '하나님을 모델로 삼고'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피조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속성'을 부분적으로 공유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 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타락하고 말았는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다시 한 번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 과정'입니다.
원래 우리를 창조해 주셨던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서 "지식에까지 새롭게" 즉 겉모습 뿐 아니라 속사람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성자 하나님'을 본받아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생각, 예수님을 닮는 생활 - 바로 이 길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은 인간 창조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던 모습을 회복할 뿐 아니라 이제는 아예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영화의 상태'에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있는 모델이며 이 얼마나 은혜로운 모방입니까?  계속해서 본문 11절에 "11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사람을 자신의 역할모델로 삼고 모방하려는 자들은 결국 자기가 그래도 남보다는 조금 더 낫다고 서로들 착각하고 교만하는 '도토리 키재기'의 인생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새 사람이 되고자 하는 성도끼리는 민족이 다르고 출신 지역이 틀리고 사회적 배경이 전혀 딴판이라 하더라도 결코 "분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고와 생활은 온통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꽉 차 있어서 위를 보아도, 옆을 보아도, 어디를 보아도 '나와 비교되는 사람'이 아니라 '만유되시며 만유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조단의 사진을 걸어 놓고 자기도 그런 스타플레이어가 될 것을 꿈꾸는 것이나, 유명한 표지 모델이 선전하는 화장품을 바르며 자기도 그렇게 예쁜 여인이 되었으면 하고 한숨 쉬는 것 따위를 어찌 이와 같은 '기독신자의 성화'의 삶에 비교나 할 수 있겠습니까?

찰스 쉘던이 쓴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In His Steps)라는 책에 보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What Would Jesus Do?)라는 유명한 문장이 계속 반복됩니다.
즉 기독신자가 매사에 '예수님이라면 내가 처한 이런 경우에, 내가 맞이한 이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가정해 보면 보다 더 옳게 판단하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악'을 생각하시거나 '죄'를 짓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은 죄와 전혀 상관이 없으신, 완벽하게 무흠무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도 점점 더 성화될 수밖에 없고 결국은 바로 '그 예수님과 똑같은 형상으로 화하는' 영화에까지 반드시 도달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빈부와 지위고하의 사람들이 같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도 서로 아무 질투나 싸움 없이 진정한 영적 화평과 조화를 이루는 '교회생활의 은혜'와 창조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던 모습보다 더욱 완벽한 단계로 나아가는 '성화의 축복'이 바로 우리 기독신자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앙생활의 역할모델'로 삼고서 본받아 사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는 마음'과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생활'을 통하여 세상과도 성별되는 '거룩한 성도'로 살다가 저 천국에서는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영원히 살게 되는 성도들이 꼭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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