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앙인의 위기 - 시험 (창 3:4-8)

첨부 1


신앙인의 위기 - 시험 (창 3:4-8)
  

우리 신앙인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시험과 유혹입니다. 이것이 왜 무서운가 하면 한번 시험에 걸리면 거의 7-80%가 무너지고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원래 시험이란 것은 넘어지는가, 아닌가 하고 한번 걸어보는 것입니다. 걸어보았는데 넘어지지 않으면 시험으로 끝나고, 걸려 넘어지면 그때부터 시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많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이 시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 시험을 두려워하거나 겁을 내지 말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사람은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입니다. 즉 말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 말을 통해서 의사를 전달하고 소통합니다. 그래서 어떤 말을 하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린 아이는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엄마라는 말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빠가 있어도 “엄마 어디 갔어요?”하고 묻습니다. 즐거울 때, 슬플 때, 외로울 때에 가장 많이 부르는 말도 엄마라는 말입니다. 

일생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엄마라는 말일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서양인들은 “굿 모닝!” “좋은 아침”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기지개를 켜며 “아이 죽겠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두 언어의 차이는 개념부터가 다릅니다. 그렇기에 어떤 말을 사용하고 어떤 대화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천지창조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가히 예술적입니다. 가장 좋은 환경에서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지창조 후에 아담과 하와가 제일 먼저 대화한 상대는 뱀이었습니다. 이 뱀이 사탄이었습니다. 이들이 첫 대화를 나눈 장소가 선악과나무 아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그때 나눈 대화의 내용은 상대방을 속이는 대화였습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그날 이들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행복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만남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뱀과의 만남은 참으로 불행한 만남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불행한 결과가 주어졌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도 아주 불행한 결과가 주어졌습니다. 그들이 그때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었더라면 인류문명이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시작된 이 대화의 부작용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 그 영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날 아담과 하와 그리고 뱀이 서로 나눈 대화는 참으로 불행한 대화였습니다. 그런데 더 불행한 것은 지금 이 시간에도 이와 같은 불행한 만남들과 대화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에선가 이 속고 속이는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화의 결과는 탄식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참과 거짓이 싸우면 언제나 참이 이겨야 하는데 그래야 사람들이 양심껏 살고 이 세상에서 거짓이 소멸 될 것인데 실제로 보면 거짓이 훨씬 더 많이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을 보면 다 속았다는 사람들뿐입니다. 신문이나 뉴스에도 모두 속았다는 이야기뿐입니다. 그것도 그냥 속은 것이 아니고 아주 크게 속아 넘어간 사람들뿐입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한번 속으면 다시는 속지 말아야 하는데 매번 똑같은 사건들이 작년에도 발생하였고 또 금년에도 발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자꾸만 똑같은 일들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아담과 뱀과의 대화 속에 나옵니다. 뱀이 하와를 향하여 제안하는 대화 속에는 몇 가지 속임수가 들어 있습니다. 오늘도 이 속임수 때문에 모두 속고 속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믿음

거짓에는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포장되고 거짓으로 꾸며진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 때문에 사람들이 자꾸만 속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고 묻습니다. 뱀이 하와를 한번 걸어보는 것입니다. 그때 하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그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뱀이 계속해서 시험하는 것을 보면 하와가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뱀이 그렇게 묻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을 보면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은 이와 같이 하와에게 믿음을 주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결코”라는 부사는 보다 더 큰 의지를 나타내는 “결단코”라는 말의 준말입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지만 “아니야, 먹어도 결단코 죽지 않아, 그러니 마음 놓고 따 먹으라.” 뱀이 하와에게 이런 믿음을 주었습니다. 모든 거짓에는 이런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속는 것입니다. 하와는 지금까지 선악과를 보기만 해도 두려움이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죄스러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뱀의 말을 듣고 보니 갑자기 먹어도 괜찮겠다는 믿음과 용기와 배짱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거짓이 지닌 힘이고 시험의 경로입니다. 

이 세상에는 참이 주는 확신도 있지만 거짓이 주는 확신도 있습니다. 이단을 보십시오. 이단들이 얼마나 확신에 차 있습니까? 그래서 모두 직장을 버리고, 가정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집을 팔아 가지고 들어가지 않습니까. 왜 배웠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넘어가는 것입니까. 바로 거짓에 확신과 믿음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짓이 가지는 힘이고 마력입니다. 사기꾼들은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호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넘어갑니다. 요즘 보이스피싱이라는 사기도 극성을 부리고 있는데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도 넘어가곤 합니다. 그들의 말에 믿음과 확신 그리고 신뢰감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짓이 지니는 힘입니다. 거짓에는 이런 힘과 마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와가 뱀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더 진짜 같음 

거짓이나 가짜는 더 진짜 같습니다. 그래서 쉽게 속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나니까 그 말이 하나님 말씀보다 더 권위 있게 들렸습니다. 6절을 보면 그 소리를 듣고 열매를 쳐다보니 이전에는 흉측하였고 무섭게 보였고 께름칙하게 보였을 것인데 이제는 탐스럽게 보이고 보암직하게 보이고 심지어는 먹음직하게 보였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뱀의 말이 더 진짜같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짓이 지닌 힘입니다. 조화를 보십시오. 조화가 더 진짜같이 보입니다. 예전에 어떤 권사님과 함께 심방을 갔습니다. 집에 아주 예쁜 꽃이 꽂혀 있었습니다. 

너무 싱싱하고 예뻐 보여서 냄새를 맡으려고 다가가다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습니다. 생화가 아니고 조화였기 때문입니다. 진짜보다 더 진짜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새들도 속아서 꽃인 줄 알고 찾아오기도 합니다. 신문에 자주 나오는 청와대 사칭사건도 그렇습니다. 수년전에도 청와대 사칭 사건이 있었습니다. 작년에도 있었고 올해도 있었고 지난달에도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아마 다음 달에도 또 발생하고 내년에도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거짓이 너무 진짜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시내에 나갔다가 길가에서 귤이 탐스럽게 달린 귤나무 가지들을 팔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가 귤이 처음 제주도에서 나올 때인데 얼마나 싱싱한지 귤 냄새가 주위를 진동하게 했습니다. 제주도를 개발하느라 불가불 귤나무를 베어 팔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저마다 한 가지씩 사느라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서 두 가지를 샀습니다. 뿌듯한 마음에 그것을 들고 버스를 탔더니 사람들이 그런 귀한 것을 어디서 샀느냐는 눈빛으로 모두 바라보았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자마자 누우면 딱 보이는 벽에 걸어두었습니다. 

그리고 눈만 뜨면 귤이 달린 나무 가지를 보고 좋아했습니다. 냄새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이 귤나무 가지를 보면서 행복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3일이 지난 어느 날 밤잠을 자는데 어디서 ‘퉁’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까 귤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귤이 저렇게 힘없이 떨어질 리가 없는데 하고 자세히 보니까 그 가지는 귤나무 가지가 아니고 사철나무 가지였습니다. 그 사철나무 가지 끝에 귤을 꼽아 붙여 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가 마르니까 귤이 가지에서 저절로 빠져서 떨어진 것입니다. 그날 밤 얼마나 웃었는지 기가 막혀서 웃었고 내가 감쪽같이 속아서 웃었고 그 속임수가 기발해서 또 웃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가짜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물건을 살 때 믿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물건을 살 때 이것이 진짜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주인은 100% 진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100%가 가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래서 감쪽같이 속은 것입니다. 뱀의 말이 하나님 말씀보다 더 권위 있게 들렸습니다. 

더 진짜같이 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거기는 가지 말라고 하면 꼭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도 혼자 가지 않고 꼭 몇 명을 데리고 갑니다. 목회자가 거기는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거기는 문제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시지를 던져도 숨어서라도 꼭 갑니다. 그곳에서 하는 말이 진짜 같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쪽같이 속아서 이상한 곳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것도 여러분들 속에 이 아담과 하와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장된 현혹 

사람들이 가짜에 속는 이유는 거짓에는 거짓이 주는 믿음 뿐 아니고 과장된 현혹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이 열매를 따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 라고만 말했다면 아담과 하와가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열매를 따 먹으나 안 먹으나 별로 이익이 없는데 왜 따 먹겠습니까? 그런데 뱀은 하와에게 과장된 현혹으로 유혹했습니다. 5절을 보면 사탄이 하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된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가 속아 넘어간 결정적인 핵심내용입니다. 

이 현혹 때문에 걸려든 것입니다. “먹기만 해 봐, 하나님처럼 돼.” 이 얼마나 매력적인 제안입니까? 그러니까 모두 이 지점에서 다 속는 것입니다. 거짓에는 이런 마력이 들어 있습니다. TV에 나오는 약 광고를 보십시오. 그 약을 사 먹으면 지금 아픈 병만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병까지 못 고칠 병이 없습니다. 병만 고치는 것이 아니고 천 년을 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무리 비싸도 믿고 사다가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과장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화장품 광고입니다. 

그냥 봐도 예쁜 여자를 등장시킵니다. 거기다 화장까지 해서 밝은 빛 아래 내 놓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마치 깎아놓은 조각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 화장품만 바르면 이렇게 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내 보냅니다. 그러면 모든 여성들은 순간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 이렇게 모두 현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낌없이 돈을 들여 사다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업하려면 여성을 상대로 해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현혹이 무엇입니까? 현혹은 이런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침울 해 있어서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까 돈을 떼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대답에서 그가 현혹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3부 이자를 준다고 해서 돈을 빌려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3부 이자를 준다고 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는 2부 이자를 주는데 당신에게만 3부 이자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현혹입니다. “당신에게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하지 말라”, 이것이 미끼이고 현혹입니다. 이자 많이 주는 곳은 100% 가짜입니다. 위험부담이 100%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주 무서운 현혹인줄도 모르고 그런 곳에만 찾아갑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데 그런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그래서 속는 것입니다. 

죄의 속성 – 공범 

죄에는 한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결코 죄는 혼자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공범이 있습니다. 프랑스 속담에 “죄 있는 곳에 여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여자가 그 나무의 실과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다”고 기록합니다. 하와가 열매를 따 먹고 나서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것이 보이고 부정적인 것이 보였습니다. 순간 겁이 나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혼자서 겁난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혹시 남편이 자신도 먹겠다고 해도 못 먹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남편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먹게 해서 공범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는 죽어도 혼자 죽지 않겠다는 행동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남편인 아담도 착했나봅니다. 아내가 주니까 그냥 받아먹었습니다. 받아먹다가 순간 하나님 말씀이 생각났는지 삼킬까 말까 순간 고민하며 삼킨 것이 그만 목에 걸려 오늘 모든 남자들이 목젖이 생겨났다는 속설 같은 말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가 있습니다. 누가 나를 유혹할 수 있습니다. 나를 현혹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 나를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모든 거짓과 속임과 현혹은 먼저 내 마음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이미 횡재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내 마음에 이미 하나님 같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들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누가 나를 유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런 내 마음을 읽고 내게 찾아와 한번 걸어보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먹고 눈이 뜨였다고 했습니다. 눈이 뜨이고 보니까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리고 아담부부는 숲속에 숨었습니다. 그때 그곳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3장 9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말은 아담과 하와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말의 원문을 보면 히브리어로 “아예 카”라는 말입니다. “네 중심이 어디 있느냐”, “왜 네 중심을 빼앗겼느냐” 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아담과 하와가 중심을 잃을 때 뱀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유혹했고, 그래서 그들이 실수하고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죄의 시작은 뱀이 아니고 아담 부부의 중심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내 마음속에 이미 이 죄의 싹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내 중심을 빼앗긴 채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사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우리에게 달려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 중심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이정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