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무 늦었습니다 (마 25:1-13)

첨부 1


너무 늦었습니다 (마 25:1-13)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


설교 한눈에 보기 

간추린 내용 

우리는 종종 해야할 일들을 미루거나 준비없이 있다가 일을 그르치거나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만다. 마땅히 해야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은 당장의 편안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지만, 세상적인 재미와 편리함만을 추구하다보면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게 된다. 그러나 편하고 쉬운 쪽을 선택해 미루다보면 결국 본문에 등장하는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마지막 때에 예수께서 우리를 알지 못한다고 거절하실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소화가 잘 안 돼서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혹은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또 얼마나 황당할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여인들이 있습니다. 혼인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 열 명의 처녀들이 등불을 켜고 준비하는데 다섯 처녀는 기름이 있어서 등불을 밝히고 혼인잔치에 들어갔지만,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올 때에 기름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들이 급히 기름을 구해가지고 혼인잔치에 들어가려고 하나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이제 문이 닫혔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를 위해서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해 보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미련한 다섯 처녀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너무 늦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기회를 이미 놓치고 만 것입니다. 종종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구로동 구청 앞이 논바닥이고, 쓰레기장이고, 사람들이 돌아보지도 않는 땅이었는데 그 때 내가 땅을 사놓았더라면 좋았을텐데”하는 것입니다. 기회를 놓쳤다, 지금은 너무 늦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그런데 땅 값이 쌀 때에 사지 못해서 너무 늦은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우리의 건강상태에 대해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또,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당신은 너무 늦었소”라는 말씀을 듣는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대체 어떻게 이런 결과가 오는 것입니까? 
지금 당장 신랑이 오면 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유심히 볼 텐데 신랑이 더디 옵니다. 오는데 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자 기다리는 사람은 설마 설마 하면서 뒤로 미루게 됩니다. 왜 우리 인생에 있어서 치명적인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판정을 받게 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설마 설마 하면서, 중요한 일을 뒤로 미루다가 결국에는 “당신은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판정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미루지 마십시오. 뒤로 미루다가는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최종 판정을 받고 심히 괴로워할 것입니다. 일년 356일 중에 씨를 뿌릴 수 있는 날은 단 7일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기회를 잡지 못하고 미루면 일년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추수를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십시오.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할 것인가?” 지금 충성하지 않으면 언제 충성하고, 지금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언제할 것인가? 간혹 성도분들 중에 “사업이 조금 나아지면 충성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하지 않으면 언제할 것인가?” 결국에는 주님에게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판정을 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일을 맡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만이 큰 일에도 충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큰 일을 맡아도 역시 ‘이것보다 더 큰 일에 충성하지’하면서 계속해서 뒤로 미루게 됩니다. 결국에는 미루는 것도 습관이 되어서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룬 적이 있습니까?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하며,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가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전 11:4). 여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미루는 버릇을 극복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즉각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 데 대한 모든 변명을 그치는 것입니다. 말은 좀 미루어도 상관없지만, 행동을 미루면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의 교회가 교회 건물을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교인 중에는 경건하지만 재정적으로는 궁핍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목사님이 심방을 갈 때마다 “제가 돈이 많았다면 교회 건축을 위해 풍성한 헌금을 드렸을 텐데요” 라며 안타까워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은 정말로 자기가 했던 말대로 갑자기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주 많은 재산을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그 사실을 본인이 자기의 입으로 직접 말해서 온 교회가 알게 되었습니다. 몇 주 후에 목사님이 그 교인의 집에 심방을 간 자리에서 그가 “돈이 많았다면 교회 건축을 위해 풍성한 헌금을…”하고 말하곤 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정말 이상해요. 저에게 돈이 없었을 때에는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돈이 생기게 되니까 드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마음의 성향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도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그 마음이 생길 때에 즉시 해야합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뒤로 미루고 미루면 결국 주님께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말씀을 듣고 괴로워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중요한 일을 뒤로 미루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오늘을 편하게 지내기 위해서 입니다. 신랑이 오지 않자 졸게 되고 잠에 들게 됩니다. 사람은 편한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설정이 되어 있습니다. 나 자신을 스스로 훈련시키고, 누군가에 의해서 자극을 받지 않으면 계속해서 미루고 뒤처지고, 결국에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최후의 통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오늘 편하게 지내고 싶어서 운동을 뒤로 미룹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에는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편리하고 재미있는 쪽으로 생활이 기울어지다보니 신앙생활을 미루게 됩니다. 깨어서 기름이 떨어지지는 않았는가 살펴보는 것보다는 졸고 잠자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내가 편하고 쉬운 쪽으로, 재미있는 쪽을 선택하며 살다가는 결국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최후의 통보를 받게 됩니다.

편하고 쉬운 쪽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재미있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뒤로 미루고, 편하고, 재미있고, 쉬운 쪽을 택하다 보면 우리의 인생은 결국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늦기 전에 무엇을 준비해야할까요?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나 모두 등을 들고 있었습니다. 미련한 처녀는 기름이 떨어져서 결국 불이 꺼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는 기름이 있으니 등에 계속해서 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우리가 준비해야할 것은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심령에 복음의 불이 꺼지지는 않았는가 늘 주의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같이 한 자리에 예배를 드려도 이 중에 껍데기만 와서 앉아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등은 갖고 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속에 기름을 다 허비하고 이미 불이 꺼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내 속에 불이 꺼지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건물이 마치 등이라면 교회에도, 강단에도 불이 꺼지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불이 타오를 수 있도록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은 대충 믿다가 나중에 열심히 밀어보자, 이런 생각은 오늘부로 싹 지우십시오. 

“내 마음에 복음의 불이 다시 타오르게 하옵소서. 내 마음에 열정의 불이 다시 타오르게 하옵소서. 내 마음에 충성의 불이 다시 타오르게 하옵소서.”

그런데 분명한 것은 타오르는 열정이 바르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열정의 불을 태우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은 등산에 목숨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건강을 위해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청소년들 중에는 게임 중독에 걸려서 게임에 목숨을 걸고 게임을 향하여 열정의 불을 태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퇴폐를 향한 것에 목숨을 걸고 열정을 불태우기도 합니다.

역사를 깊이 연구한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문명의 끝은 열정이 퇴폐를 향한 열정으로 바뀌면서 그 시대의 막을 내린다. 그 문명의 막을 내린다.” 참으로 소중한 말입니다. 열정이 퇴폐를 향하여 불을 태울 때 그 나라가 망하고, 그 시대가 망하고, 그 문명이 망하게 됩니다.

시편 말씀에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연 어느 때까지 우리의 세월을 허비하는 것입니까?

불이 타오르는 열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열정이 무엇을 향하였는가가 중요합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을 맞으려는 열정으로 우리가 타오를 때에 우리의 인생은 축복의 인생이 됩니다. 성공하는 인생이 됩니다. 보람있는 인생이 됩니다.


예화

어느 대장장이가 최고의 대장장이가 되기 위해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서 다양한 기술을 익혔습니다. 세밀하게 잘 만드는 장인으로 훈련을 받고 이제는 어디서든지 자신감 있게 일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훈련과정을 마치고 나오는 중에 거리에 붙은 광고가 눈에 띄었습니다. 왕궁에 왕이 쓰는 물건을 만드는 대장장이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대장장이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해왔는데 왕궁에서 자신의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는 즉시 왕궁에 가서 결국 왕의 물건을 만드는 대장장이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불과 며칠도 견디지도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미 전에 있던 대장장이가 그만 둔 후라 대장간의 풀무불이 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불을 다시 살려서 자신의 기술을 마음껏 발휘해야 하는데 이 사람은 다양한 기술은 배웠지만 꺼진 불을 다시 피우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너무 기본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불 피우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아무 것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 좋은 기술이 아무 쓸모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실력이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재주가 좋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예수를 향한 열정이 없다면 결국 우리의 인생은 왕궁에서 쫓겨나는 대장장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예수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열정을 불태워 보십시오.

너무 늦게 기름을 준비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급하게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소서…”라고 간절히 애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당신은 너무 늦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인생의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부터 내 속에 꺼진 불을 다시 태운다면 늦지 않습니다. 오늘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의 불, 충성의 불이 계속해 타오르기를 축원합니다. (곽주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