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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주님을 모시는가? (눅 7: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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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주님을 모시는가? (눅 7:36-50)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는가? 눅5:32을 보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눅7:34에서 자신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려 하니 죄인을 가까이 하는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죄인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에게 잃어버린 존재다. 하나님과 단절되고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고 가장 소외된 자로 사는 자가 죄인들이다. 예수님은 여리고를 지나가시다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다. 뭇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수근거렸다. 

눅19:7을 보면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고 하였다. 어찌 의로우신 예수가 수많은 사람들이 죄인으로 따돌리고 쳐다보지도 않는 세리장의 집으로 들어가시는가? 

예수님은 눅19:9에서 삭개오를 향해 말씀하신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를 소외시켜서는 안된다. 우리의 형제요, 우리의 가족 구성원이다. 죄인에 대한 변화된 신분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눅19:10에서 위대한 말씀을 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분명하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보라. 오늘 이야기의 시작은 의인의 집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한 바리새인, 즉 시몬이라 불리는 이 의인의 집에 예수가 들어가셨을 때 죄인인 동네의 한 여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울며 눈물로 발을 씻기고 향유를 부었다. 

이 사건 앞에서 의로운 자라 일컬어지는 시몬은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라고 생각한다. 더러운 죄인의 눈물과 향유를 무가치하게 보는 의인의 마음이다. 그때 예수님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진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둘 다 탕감을 받으면 누가 더 탕감해 준 이를 사랑하겠는가?”라고 말씀하시니 의로운 시몬은 “많이 탕감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신다. 구원을 얻은 자가 의로운 자가 아니고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다. 신앙 생활의 감격을 더 많이 느끼는 자는 시몬이 아니고 죄인이라 불리는 여인이다. 

눅7:44에서부터 상세하게 기록된 의로운 자 시몬과 죄인인 한 여자가 주님을 대하는 것을 보자. 두 사람은 어떻게 주님을 모시고 있는가?  

1. 의인 시몬에겐 형식만 있고 동네 여인에게는 감격이 있다.

눅7:44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언제나 사람들에게 의로운 자로 존경 받고 경건의 모습을 갖춘 시몬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지만 기본적으로 손님을 맞아 행하는 발 씻을 물조차 준비하지 않았다. 시몬은 자기 의의 교만에 빠진 체 손님을 영접하는 기본적 의무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죄인인 여자는 눈물로 발 씻을 물을 대신한다. 머리털로 수건을 대신하여 씻는다. 

죄인이 소외된 자의 눈으로 예수를 볼 때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온 자다. 이 여인이 언제, 어디서 주님과 만났는지는 잘 모른다. 

어떤 학자는 귀신 들렸던 마리아가 고침을 받고 새 사람이 된 감격으로 발을 씻긴 것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누가복음이 독특하게 전해주는 이 동네의 한 죄 지은 여인은 형식을 뛰어넘었다. 대야가 없어도, 수건이 없어도 눈물과 머리털로 대야와 수건을 대신하고 주님을 이 집의 진정한 손님으로 환영하고 대접하였다. 허나 시몬은 의인이라는 착각에 걸려서 주님을 환영하지 못한다. 죄인은 주님을 감격으로 환영하며 주님 곁에 다가가지만 의인인 줄 아는 시몬은 주님과 대등하다는 자신의 교만에 빠졌다. 

  
2. 의인 시몬에게는 친절한 인사조차 없고 여인에게는 겸손한 사랑의 엎드림이 있다.

의인이 예수님과 식사를 하려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대접하기 위함인가? 논쟁하기 위함인가? 예수의 흠과 티를 책잡기 위함인가? 섬겨드리기 위함인가? 자기 의로 무장된 시몬은 입도 맞추지 않았다.

눅7: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하였다. 입을 맞추고 문안하는 것은 일상의 인사다. 그 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친절한 인사도 의인에게는 없다. 

신앙 생활에서 의인이라는 의식이 장애물이 된다. 그래서 주님께 허리를 굽히기 어렵다. 바리새인인 시몬은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인으로서 예수님의 의에 비교해 보려고 자기 집에 청한 것이다. 거기에 무슨 입맞춤이 있는가? 내가 의롭다고 자처하는 자들은 자기 의에 빠져서 주님을 바라보지 못한다. 자신의 옮음만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죄인인 사람은 자신을 굽힌다. 자기 자신이 어찌 주님 앞에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는가? 죄인인 사람은 누구나 주께 허리를 굽혔다.

사랑은 위대한 분 앞에 서 있는 경외감이다. 허리를 굽히고 싶어진다. 허리 굽힘,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도덕론자들은 할 수 없다. 오직 죄를 발견한 사람, 그리고 그 죄를 씻어주신 은혜를 받은 사람, 그는 엎드려 주님의 발에 입을 대는 사랑의 인사로 기뻐한다. 

나는 몇 년전 필리핀 선교대회에 갔었는데, 그곳에 사람들이 대략 3~4천명 정도 모였었다.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는데 손을 잡고 그 손을 자신의 이마에 가져간다. 존경의 표시다. 오늘 이 여인의 엎드림 속에는 존경심과 겸손이 있다. 뜨거운 사랑을 표현하는 열정의 입맞춤이 있다. 우리에게 이런 여인과 같은 주님에 대한 존경심이 있는가? 사랑의 엎드림이 있는가?
  

3. 의인 시몬에게는 희생도 없고 여인에게는 자신을 깨뜨리는 희생이 있다.

눅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의인이라 자처하는 자는 신앙의 감격을 경험하기 어렵다. 배고픈 자가 빵의 고마움을 알고 병든 자가 의원의 고마움을 알 듯 구원에 대해 의인은 감격이 없으나 죄인은 감격이 있다. 속죄, 은혜, 사랑, 감격은 신앙적 감격이다. 이 세상 어디서도 찾기 어렵고 만나기 어렵다. 세상의 감격은 출세, 성공, 성취, 결혼, 취직 등의 감격인데 이 감격은 오래가지 못한다. 더 새로운 탐욕과 욕심이라는 것 때문에 감격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을 붙잡아야 다시 안심이 된다. 이처럼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의인으로 자처하는 이는 신앙적 감격이 찾아오기 어렵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해, 주님을 위해 희생하기 어렵다. 어찌 주님의 머리에 감람유라도 부을 수 있겠는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나무 한 그루도 심지 못하고 교회를 위한 건축 헌금도 한 번 못하는 것은 부끄러움이다. 어쩌면 바리새인의 의로써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인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주님께 향유를 부었다. 옥합 향유는 자신의 정체성이다.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죄와 허물 속에 사는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님! 속회의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 그 체험을 가지고 있다면 더 붓고 더 부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나의 주인이시고 주님은 나의 구원자이시고 주님은 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롬5:20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은혜가 넘쳐나기에 주님에게 드릴 수 있음이 기쁨이다. 옥합 향유를 쏟을 수 있음이 기쁨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의 의로써 의인인 줄 아는 자들은 은혜가 무엇인지, 감격이 무엇인지, 용서받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이러므로 교회 안에서 감격의 눈물과 사랑의 수고와 희생적인 드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들이고 죄에서 구원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눅7:47을 보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주님은 바리새인의 집에서 동네의 여인을 총평한 것이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예수 그 이름 속에 감격이 있는가? 주님과 입맞추는 교제를 한다면 사랑으로 나아가는가? 주님을 위해 머리되신 주님의 교회의 일에 필요하다면 향유라도 부어드리기 위해 옥합을 깨드린 적이 있는가?

전도사 시절에 담임한 교회의 부지는 문재철 권사의 아버지가 드린 것이었다. 그분은 주님을 모르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기 전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서 400평의 산자락을 드려서 그곳이 교회가 되었다. 은혜의 감격이 있다면 향유를 붓는 것이 당연하다. 어렵지 않다. 교회가 기적적으로 4,000평 대지를 마련하고 예배당을 지었다. 우리는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빚을 내서 건축을 마무리하였다. 

금번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1억의 헌금이 드려지길 기도한다. 작년의 2배로만 내면 된다. 이는 은혜의 감격이 있을 때 죄인된 내가, 용서함 받은 구원의 크기가 느껴질 때 기쁨으로 참여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함을 동의라도 할 수 있다. 

오늘 죄인인 여자에게 축복하신 말씀, 눅7:50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우리교회 성도들이 이 여인과 같아서 구원의 확신과 함께 평안을 가지고 돌아가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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