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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은 자야 안심하라 (마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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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야 안심하라 (마 9:1-8)

본문은 주님께서 한 중풍병자를 치료하신 내용입니다. 누가복음에도 동일한 사건이 나오는데 두 가지 내용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상태가 심각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스스로 주님을 찾아올만한 건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이 그를 침상 째로 매고 와서 주님을 만나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주님을 만날 수 없게 되자 그 친구들은 주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를 주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들렸습니다.
   
오늘 설교는 주님이 중풍병자에게 “안심하라”고 하신 말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2절에 보니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는 말은 원어를 살펴보니 ‘용기를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안심하며 신앙생활 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마시고 담대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의 초점입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3차례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고 말씀하셨고, 마9:22에서는 12년간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에게 “딸아 안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 14:27에서는 풍랑으로 고생하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안심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을 들은 당사자들의 상황은 절대절망의 상황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자기 힘으로 주님을 찾아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누여서 침상 째 들고 왔던 것입니다.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도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12년간 피가 멈추지 않았으니 그 병을 고쳐보려고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녀의 모든 노력이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12년 째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다위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도 절망적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잔잔하다가 갑자기 돌풍이 일어나면 사공들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은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면서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풍병자나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 그리고 바다에서 돌풍을 만나 고생하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한계 이상의 상황을 만났으나 주님은 그들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는 이 말씀은 저와 여러분에게 “너희가 어떤 상황 속에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오늘 설교는 우리가 때로는 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황을 만나도 안심해야 할 이유, 용기를 가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주님이 우리의 믿음을 보시기 때문에 안심하십시오(2절). 
   
2절에 보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료하시기 전에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때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믿음을 보십니다. 엡 2:8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주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실 때도 믿음을 보시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 앞에 상달 되지 못했는데 아벨의 제사는 상달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히 11:4에서는 믿음의 차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에도 믿음을 보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막 11:24에 보면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했는데 믿지 못한다면 응답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할 때 응답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이유는 완전하신 주님의 눈에 우리의 행위가 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행위로 주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지 않고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셔서 절망을 소망으로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믿음을 보신다는 이 말씀 때문에 안심해야 합니다.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만약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보신다면 우리 중에 몇 사람이나 구원을 받겠습니까? 또 주님이 만일 우리의 헌금의 액수를 보신다면 우리가 과연 얼마나 헌금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부자라고 할 수 있는 이건희 씨도 헌금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남가주 프레스노에 경건한 신앙을 가진 노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병원에서 긴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병원에 특수 혈액형을 가진 환자가 생겼는데 긴급히 수혈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다는 것입니다. 혈액 등록 카드를 보니 부인의 이름이 발견되어 전화를 걸었다고 하면서 헌혈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부는 한 생명을 살려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즉각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부인이 누워서 피를 뽑고 있는 동안에 남편은 병원 직원에게 피를 필요로 하는 환자가 교통사고를 당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병원 직원의 대답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머니날이 되어 가족들이 함께 모였다가 형제들끼리 싸움이 났는데 그것이 칼부림으로 변해 거기서 다쳐 피를 많이 흘려 생명이 위독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베노스델 씨는 몹시 불쾌하였습니다. ‘어머니 날에 어머니 앞에서 형제들끼리 칼부림이나 하는 짐승 같은 인간을 위해서 자가 아내의 피를 뽑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시 수혈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에 성령께서 그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너를 구원하실 때에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예수님의 보혈로 너를 씻은 것은 네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냐?’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그는 예수님이 자격 없는 자기를 위해 피 흘리신 것처럼 자기 아내도 자격이 없는 그를 위해 수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육체의 생명뿐 아니라 그의 영혼마저 함께 구원받게 해 달라고 기도 드렸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위나 헌금의 액수나 헌신의 양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절망 중에 있어도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놀랍게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2. 주님은 작은 자도 귀하게 보시기 때문에 안심하십시오(2절). 
   
12절에 보니 주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주님 보시기에 작은 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은 중풍병자 자신이 자신을 작고 초라하게 느끼고 있는 것을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그에게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에게는 건강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능력 있는 사람이나 무능한 사람이나 모두가 가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손에 수표 한 장이 들려져있습니다. 100만 원짜리 신권입니다. 제가 이 수표를 손 안에 넣고 구깁니다. 그러면 얼마짜리가 될까요? 구겨졌으니 90만 원 정도로 가치가 떨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수표는 구겨졌지만 여전히 100만 원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 수표를 바닥에 놓고 발로 밟습니다. 이 수표는 구겨졌고 발에 밟혔으니 이제는 가치가 50만 원 정도로 떨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100만 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주님 앞에서는 존귀한 분들입니다. 외적인 요소가 남보다 더 좋다고 가치가 있고, 외적인 요소가 좀 부족하다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모습이 혹시 좀 구겨졌어도, 좀 짓밟혔어도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주님 앞에서 존귀한 분들이며 사랑 받는 존재입니다.
   
마리아 앤더슨이라는 흑인가수가 있었습니다. 백 년에 한 사람 날까말까한 위대한 가수라고 평합니다.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사람들이 은혜에 젖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영국 여왕을 맞이할 때 마리안 앤더슨을 초청하여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워싱턴에 7만 5천 명의 정계, 법계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 마리아 앤더슨을 불러 노래하게 했습니다. 토스카니니는 “마리아 앤더슨의 음성은 금세기 최고의 아름다운 음성이다.”라고 칭찬했습니다.
   
마리아 앤더슨에게 한 기자가 “당신의 인생 중 가장 위대한 순간, 감동적인 순간이 언제였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앞에서, 영국 여왕 앞에서, 7만 5천 명 앞에서 노래할 때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어머니에게 ‘엄마, 나 다시는 목욕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할 때가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앞으로 다시는 목욕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검은 피부가 싫어서, 백인의 하얀 피부가 부러워서 목욕할 때마다 씻고 또 씻으면서 ‘내 피부는 왜 이렇게 검지?’하며 원망했는데, 그 날 ‘아,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나를 백인으로 태어나지 않게 하시고 흑인으로 태어나게 하셨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명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흑인으로 살아야 되겠다. 흑인을 빛내는 흑인이 되어야겠다. 백인도, 흑인도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흑인이 되어야겠다.’라고 결단했는데, 그날이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백인이기에 가치가 있고, 흑인이기에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환경이나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자신을 작은 자로 여기며 ‘내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 되지 않을 거야.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들으실 리가 없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백인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처럼 흑인의 기도도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사람의 기도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처럼 무능력한 사람의 기도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능하거나 부족해도 작은 자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고 용기를 갖기를 바랍니다. 
 

3.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때문에 안심하십시오(2절). 
   
2절에 보니 주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단지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을 뿐인데 주님은 그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 엄청난 일을 한 것도 아닙니다. 무슨 큰 일을 해서 주님을 영화롭게 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는데 주님께서 그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임현수 목사님은 교회가 가진 모습 중에 교도소 같은 모습이 있다고 말합니다. 교도소는 누가 가는 곳입니까? 죄인들이 가는 곳입니다. 교도소에 가면 문제가 많습니까? 적습니까? 문제가 많습니다. 전국의 죄인들이 다 모여 있는데 어찌 문제가 없겠습니까? 문제가 없는 교도소라면 그 교도소가 문제입니다.
   
교회는 마치 교도소 같은 곳이랍니다. 죄인들이 와서 변화되어 새 사람 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처음 올 때는 죄인으로 들어옵니다. 처음부터 의인되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교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언제까지나 죄인으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는 동안 하나씩하나씩 변해서 나중에는 변화된 사람이 되어 가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술 끊고, 담배 끊으면 교회 나오겠다고 합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술 먹으면서 담배 피우면서 와도 됩니다. 오셔서 주님 만나고 변화되면 다 바뀌게 되어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려면 타인에 대해서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타인의 어떤 모습도 다 받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LA에가면 유명한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갈보리 채플이라는 교회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척스미스인데 이분은 '히피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70년대 방황하던 미국의 수많은 히피족들이 이분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한참 히피들 사이에 복음의 부흥이 일어날 때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교회를 찾으면 사람들이 눈치를 주고, 자리를 옮겨버리고 그럽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맨발에, 머리는 길게 길러서 늘어져있고, 복장은 엉망이었습니다. 더구나 마약이나 술, 담배 등에 쪄들어 있어서 냄새가 나고 그랬습니다.
   
더러운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니까 바닥에 깔아놓은 카페트가 전부 발자국이 나고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그 당시 대부분의 교회들이 용납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갈보리채플이라는 교회로 왔는데 여기서는 받아준단 말입니다. 그래서 히피들이 이곳으로 몰려든 것입니다. 그러나보니 젊은이들이 많아지게 되었고, 그들이 척 스미스 목사의 말씀에 은혜 받아 변화되고 새 사람이 되어 헌신하게 됩니다. 한 때는 20,000명의 히피 청년들이 회개 하고 난후 태평양에서 세례를 받은 적도 있을 정도의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이 교회출신 목회자들이 미국전역에 3,000개의 교회를 세우는 기적이 일어난 것 입니다.
   
이 교회도 처음 히피들이 몰려올 때 카페트가 더러워지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회에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교회라면 저런 사람들도 와야 한다. 카페트야 청소하면 되지 않는가!” 그래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결정도 아니었는데 이 결정이 한 교회를 위대한 교회로 만들었고, 한 목사님을 ‘히피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만든 것입니다.
   
교회생활은 갈보리 채플처럼 사람들에 대해서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지었어도 받아드려야 하고, 교회 안에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어도 받아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죄에 짓눌려서 하나님 앞에 나오기가 쉽지 않고,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의 기도도 응답하실까’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 주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용기를 가지십시오. 
 

4. 주님은 우리의 병을 고치시는 분이기 때문에 안심하십시오(6,7절). 
   
6,7절을 보니 주님이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중풍병자는 순간적으로 마비증상이 풀리면서 힘을 얻었고 주님의 말씀대로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주님은 병을 고쳐주시는 분입니다.
   
마 4:23에 보면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3대 사역이 나옵니다. 첫째는 가르치시는 일을 하셨고,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을 하셨고, 셋째는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시간적으로 보면 약 2/3를 병자를 고치시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이 고난당하실 때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왜 주님이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주전 69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을 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리고 약 720년 후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30년 후에 베드로 사도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자들이 병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신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역사하시며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십니다.
   
지난 주 어느 날 분당에 사시는 김희정 권사님이 새벽기도를 나오셨습니다. 제가 6시 30분 정도에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는데 권사님은 그 시간까지 기도하고 계시다가 저에게 위장이 아프다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약 1-2분 정도 안수를 해드리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나중에 들으니 안수를 받고 위장의 고통이 사라졌답니다. 권사님은 속이 너무 좋지 않아서 혼자 ‘혹시 암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안수를 받고 깨끗하게 치료가 된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저를 통해서 주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중에 병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이 있다면 안심하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주님은 약도 사용하시고, 의사도 들어서 쓰십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신유의 능력을 베풀어주셔서 여러분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심하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5. 주님은 말씀의 능력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안심하십시오(6,7절). 
   
6,7절에 보면 주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 하시니 그 사람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나서 침상을 가지고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중풍병자에게는 일어설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친구들에게 들려서 온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자기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중풍병자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명하셨고 중풍병자는 그 말씀의 능력으로 자기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말씀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삶을 살았고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셔서 지금도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으로, 성령으로, 설교로 말씀하시고 그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임한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다면 주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기적을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어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어려움에 처해있어도 안심하고, 용기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 107:20을 보면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할 때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주시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건져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경에서 예를 들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통과했습니다. 홍해를 통과 한 후에 3일 동안 물을 찾지 못하다가 물을 발견했는데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한 나뭇가지를 지시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나뭇가지를 쓴물에 던지니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제 간증 하나 하겠습니다. 풍납동에서 오금동으로 교회를 옮기기 위해서 공사할 때입니다. 강단 뒤에 방 하나를 만들어서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준비하던 중에 살림살이 때문에 걱정이었습니다. 제가 결혼을 하고 처가에 들어가서 살았기 때문에 살림이 하나도 없던 때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데 주님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막 11:23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저는 그 말씀에 의지해서 냉장고와 텔레비전 그리고 세탁기의 이름까지 불러가며 명령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분들이 제가 기도하며 감동대로 명령한 바로 그 제품들을 사주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능력을 제가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위기는 위험이 아니라 기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위기 중에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제주도에 가면 도깨비 길이 있습니다. 분명히 내리막길인데 차를 세워 두면 올라갑니다. 물을 부어 보았더니 물이 위로 올라갑니다. 어느 택시 운전기사가 언덕에 차를 세워두고 차가 언덕에서 내려가지 못 하도록 돌을 고여 놓았습니다. 소변을 보고 나서 보니 차가 없어졌습니다. 뜻밖에서 돌은 그대로 있고 차가 언덕위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발견한 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내리막길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보내주십니다. 기도 중에 받은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행하면 내리막길이 아니라 오르막이 될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체험한 주님을 저와 여러분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안심하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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