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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화상과 자존심 (벧전 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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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과 자존심 (벧전 2:9-10)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베드로전서 2장 9∼10절

모든 사람들은 의식중이든 무의식 중이든 자기 가슴속에 자기의 모습을 그림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화상이라고 부르는데 가정주부는 ‘나는 주부다’라는 자기 모습을 가슴에 새기고 있고 상인은 ‘나는 장사꾼이다’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할 필요 없이 목사는 ‘나는 목사다’라는 자화상을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화상에 따라서 사람들은 자존심이 세워지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1. 상처 입은 자존심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아 찬란한 영광스러운 자기 모습에 자기는 한껏 아름다운 자화상을 가지고 그 자존심에 어깨가 으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마귀의 꾀임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역하고 난 다음 순식간에 나타난 사건은 ‘자기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영광스러운 자화상이 부서지자 완전히 벌거벗긴 자화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자존심이 형편없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창세기 3장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고 기록합니다.

자화상이 벌거벗겨지고 일그러지고 나니 이것을 덮으려고 무화과나무가 넙적하니 그 잎사귀를 따서 앞치마를 해 입었는데 그것도 햇빛이 비취니까 쪼글쪼글해져서 버석버석 부서지고 맙니다. 그래서 나무뒤에 숨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닐면서 찾았습니다. 그 순간 아담은 자화상이 일그러지고 자존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아주 비열해졌습니다. 아주 얼굴 두껍게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과 여자에게 둘러 씌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자화상을 잃어버리고 자존심이 상하면은 두려워하고 우리 자신을 숨게 되는 것입니다. 온갖 변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2절로 13절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야훼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아담은 사실 하와가 선악과를 전해주므로 받아는 먹었습니다. 그러나 먹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는 “네가 왜 선악과를 먹고 남편에게 주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와는 “뱀이 꾀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한 사람도 자기 책임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상한 자화상을 어찌하든지 회복하고 자존심을 세워보려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자화상이 일그러지고 자존심이 상처를 입으면 편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사실 그것은 자기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럴 때는 사람들 앞에 제대로 설 수도 없고 무화과나무 잎같이 변명을 만들어서 입어도 곧 쭈글쭈글해지고 소용이 없어지게 되고 결국은 숨을 곳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겨보려고 술을 마시게 되고 폭력을 행하게 되고 반항적이 되고 비열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대 헬라 철학자인 탈레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아는 것이고, 가장 쉬운 일은 남의 흉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아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러나 남의 흉을 보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믿든지 말든지 참이든지 거짓이든지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남의 흉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마음 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화상과 자존심을 상실한 사람일수록 남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정신 빠진 사람이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올바로 든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안합니다. 자기 살기도 바쁜데 왜 남의 이야기를 합니까? 정신 빠진 허수아비같은 사람이 사사건건이 주위 사람의 흠집을 잡고 발가벗기고 손가락질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화상이 죄로 인해 벌거벗겨지면 자존심에 상처가 나며 우리 자신이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상처 입은 자존심은 떳떳하지 못해 발버둥치며 숨으려고 하고 변명하며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2.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그렇다면 우리가 벌거벗은 자화상, 상처투성이인 자존심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 대신 벌거벗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은 높은데서 엄청나게 낮은 곳으로 오신 것입니다. 사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아주 흉악한 것이 우리 인간들 아닙니까? 영적으로 죽었고 마음으로 부패, 부정하고 허물투성이고 냄새가 나는 그런 사람세계로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세상과 삶으로 오셔서 우리와 같이 되었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너무나 놀라운 희생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고 와서 종처럼 살았으며 나중에는 범죄인 중에 가장 극악한 범죄의 탈을 쓰고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을 당했던 것입니다. 우리를 대속하여 우리의 온전한 자화상을 복구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인간의 벌거벗은 자화상과 비천한 자존심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일그러진 자기의 모습, 우리의 비천한 자존심, 깨어진 인간,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주기 위해서 우리 대신 주님의 자화상이 일그러졌습니다. 

그의 자존심이 극악한 죄수로까지 낮아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상실했습니다. 죄로 부패한 인간을 대신 짊어지고, 허물로 뒤덮인 인격을 자기가 담당하시고, 병든 마음과 몸을 끌어 안고 저주 받은 삶을 자기의 것으로 걸머지고 죽음과 멸망으로 절망적인 자화상을 갖고 있는 인간을 대신한 것입니다. 자존심에 상처가 깊을수록 비열한 언어심사 행동을 하는데 예수님은 비열한 언어심사 행동을 안했습니다. 극단적으로 자존심이 상함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있었으면서도 주님은 끝까지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이 알지 못하고 이렇게 하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시고 마지막 회개하고 구원받으려고 하는 강도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한 대속의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를 끌어안고 나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박히기 때문에 예수 죽음을 내 죽음으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7절로 11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야훼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야훼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믿으면 주님의 대속의 옷을 대신 갈아 입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의 옷을 예수님이 다 덮으시고 예수님의 새로운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의의 거룩한 건강한 축복, 영생의 옷을 우리가 받아입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화상과 영광스러운 자존심을 받아서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화상을 우리가 받아서 입고 예수님의 자존심을 우리가 받아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감사해야 될 것은 아무것도 한일 없이 믿음만으로 우리의 운명이 달라진 사실입니다.

성경은 고린도전서 1장 28절로 30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예수님 안에 깊이 넣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우리에게 지혜가 되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영원을 잘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것처럼 만들어 주는 의로움이 되어 주시고 우리를 허물에서 놓여남 받는 거룩함이 되어 주시고 우리를 은혜로써 구원받게 만들어 주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속의 옷을 우리 믿음으로 확실하게 받아 입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깨달아 알고 꿈꾸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사람으로 입혀 주시는 예수님과 더불어 살게 되었으니 우리는 진정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3. 새 사람으로 입혀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기록합니다.

옛날 피조물이 아닙니다. 옛날 아담과 하와처럼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은 피조물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영생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성령을 모신 예수님과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것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서 아주 영광스러운 자화상을 마음속에 갖고 자기의 자존심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자화상을 주셨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베드로전서 2장 9절로 10절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기록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만한 자존심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긍지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자랑을 하나님 앞에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인줄 알면 다른 사람 대할 때 훌륭하게 대하지 야비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깡패요 폐인으로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게 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자화상에 따라서 언어심사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상한 자존심이 마음속에 생겨난 것을 알게 되면 새사람이 된 자화상을 알고 새자화상을 상상하고 꿈꾸며 기적적으로 변화된 것을 믿으며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대속의 고귀한 옷을 입었을 때 자존심이 치료되고 두려움이 극복되고, 자존심이 치료되고 건강하면 긍정적이고 행복한 인격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행복한 인격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모습이 달라져야 되고 자기 자존심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모습이 일그러지 파괴된 자기 모습을 가진 사람이 자존심이 있으며 행복이 있을턱이 없습니다. 자존심이 달라지고 자화상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달라집니까? 바로 십자가 밑에 나와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 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주시니 우리 모습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자기 몸과 피를 다 쏟아서 구원을 시켜 주시니 우리 얼마나 귀한 존재요,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 것입니까? 그러므로 십자가 밑에 나와서 우리 짐을 풀어 놓고 보면 우리는 고귀한 자화상을 얻게 되고 고귀한 자존심을 갖게 돼서 말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발걸음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달라지는데 겉사람이 그것이 안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벌거벗을 때와 대속의 고귀한 옷을 입을 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을 때는 자기 마누라도 고소하고 하나님도 책임을 전가시키는 비열한 인간이 되었잖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이 되고 난 다음에는 내가 고상하니 고상한 말을 하고 내가 존귀하니 존귀한 말을 하게 되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자녀답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변화된 사람에게 변화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자화상을 항상 신분증처럼 마음에 간직하며 고상한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가 있는 당당한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물건이라도 누구의 소유냐에 따라 그 가치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은 잘못 그려서 버린 것조차도 집 한 채 만한 값이 될 정도입니다.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앉았던 걸상은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이 비싸 오늘날 보물로 국가에서 보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엘비스 프레슬리가 군대에 가기 위해 긴 머리를 잘랐는데 오늘날 그 머리카락 뭉치가 돈덩어리가 된 것입니다. 머리카락 뭉치 하나가 약 1700만 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누구의 소유인가에 따라서 가치가 그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소유가 됐습니다. 그러니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우리는 천하보다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긍정적인 자화상과 건강한 자존심을 가지고 믿음으로 담대히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의 맥킨지는 오늘날 경제 상황을 가리켜 그 핵심은 ‘인재 전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에드 마이클스 등이 쓴 「인재 전쟁」이라는 책에서도 성공하는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전략, 기술, 시스템 보다 더 선결되어서 해야 될 것은 ‘사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삼성 전자의 이건희 회장도 얼마 전, ‘인재 경영’을 재차 강조했습니다. 

빌 게이츠 회장이 이끄는 마이크로소프트사(MS)는 1년에 20만여 통이나 되는 이력서를 받고 그 중 선발해 20%에서 30%만 채용한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300명으로 구성된 사내 인재발굴팀이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발로 뛰어다니며 인재들을 찾아낸다고 합니다. 사람을 잘 쓰면 그 사람이 사회와 회사와 국가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계의 기업들은 지금 ‘인재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시대마다 인재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로 29절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세상이 다 버린 인재를 하나님이 찾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은 저 왕궁에서 택한 것이 아니라 쓰레기더미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천한 사람이 아닙니다.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멸시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천당의 보화를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은 뛰어남으로 인재를 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 인재를 택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 자화상을 항상 간직하면 모든 절망과 낙심을 이기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절대로 우리의 자화상이 구겨지지 않고 자존심이 짓밟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형편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자존심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당당하고 용감하게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물리치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같이 천하고 못나고 멸시받고 버림받은 자를 택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고상한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 조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벌거벗어서 인간의 힘으로 무화과나무로 앞치마를 해입으려고 애를 써도 안되던 우리에게 주님은 가죽옷을 입혔습니다. 옛날에는 짐승의 가죽옷이지만 지금은 예수님의 가죽을 벗겨서 우리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고, 예수님의 의로써 살고, 예수님의 거룩함으로 살고, 예수님의 건강으로 살고, 예수님의 축복으로 살고 예수님의 천국으로 옷입고 살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빛난 자화상을 가지고 영광스러운 자존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사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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