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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의 의미 (마 26: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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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의 의미 (마 26:26-28)
 

미국의 펜실베니아주와 오하이오주에 가면 재세례파 교인들로 이루어진 아미쉬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들은 18세기에 유럽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의 후예들로서 신앙 안에서 자급자족의 공동체 생활을 합니다. 자동차나 전기, 냉장고, 티비 등을 거부하고 지금도 마차를 타고 수공업과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특징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자족한 생활을 하며, 누가 욕을 해도 화를 내지 않고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등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데 힘쓴다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생존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6년 10월 2일, 펜실베니아주 니켈 마인스에 있는 아미쉬 공동체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이웃 마을에 사는 32살 난 한 남자가 어린이들이 공부하는 교실에 들이닥쳐서 총으로 어린이 5명을 죽이고 5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자살한 사건을 말합니다. 괴한이 어린이들에게 총을 쏘려 하자 그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13세 난 여자 아이가 나서서 “나에게 총을 쏘고 동생들에게는 쏘지 말아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동생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자 괴한은 그 소녀의 머리에 총을 쏘았습니다. 그 소녀가 쓰러지자, 그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여자 아이가 나서서 “나를 쏘세요.”라고 했습니다. 괴한은 열 명의 어린이에게 총을 쏜 후에 자살했습니다. 그 공포의 순간에, 어린 동생들을 구하기 위해 앞에 나서서 “나에게 총을 쏘고 동생들에게는 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다니,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고개가 수그러지게 만듭니다.

이 소녀의 희생이 귀하고 아름다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된 희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요 15:13)고 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기꺼이 버린다면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 소녀의 죽음은 고귀합니다. 그리고 그 소녀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닮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우리를 친구로 삼아주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려주신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가진 재산이 많아도, 권력이나 명예를 가져도, 그 사람이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라고 다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타산적인 사랑이 많습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동안만 사랑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타산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람은 누구나 제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있지만, 과연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누추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법인 율법에 의해서 사망을 선고 받은 죄인들입니다. 저는 이제껏 살면서 누가 사형수를 대신해서 처형 받기를 자원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기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성도님들과 함께 성찬식을 행하기에 앞서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성찬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떡을 가지시고 축복하신 후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시고 감사 기도를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제자들이 받아먹은 것은 예수님의 몸이 아니라 떡이었으며, 제자들이 받아 마신 것은 예수님의 피가 아니라 포도주였습니다. 그러나 그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단지 하나의 종교 의식으로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셨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을 받으시고 운명하심으로써 실제로 자기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대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 깊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찬은 우리를 위한 주님의 대속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신 마지막 만찬은 유월절 만찬이었습니다. 그렌데 예수님에 의하여 유월절 만찬은 새롭게 “주의 만찬”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려면 먼저 선민이 출애굽 당시부터 지켜오던 유월절 만찬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성도님들께서도 아시는 대로, 유월절은 이스라엘 자손의 출애굽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백 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키시기 위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키기는커녕 더욱 더 괴롭혔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홉 가지 재앙 곧 1)피 재앙, 2)개구리 재앙, 3)이 재앙, 4)파리 재앙, 5)악질 재앙, 6)독종 재앙, 7)우박 재앙, 8)메뚜기 재앙, 9)흑암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재앙이 임하면 두려워하여 모세를 불러 요구 사항을 들어주겠다고 하였으나 재앙이 물러가면 다시 변심하여 더욱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열 번째 재앙을 내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사람의 장자 뿐 아니라 가축의 처음 난 것도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재앙이 이스라엘 자손의 집에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인의 집집마다 위로 바로의 장자로부터 아래로 여종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다 죽임을 당하는 가운데 어떻게 이스라엘 자손의 장자들만 죽임을 면한 것일까요? 구약성경 출애굽기 12장에 기록되어 있는 유월절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홉 가지 재앙을 겪고서도 하나님의 지시를 거역하는 바로에게 열 번 째 재앙을 내리시기에 앞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흠 없고 일 년 된 숫양을 준비하여 열나흘 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그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유월이란 말은 “건너뛰다.”, “넘어가다.” 라는 뜻입니다. 모든 애굽인의 집에서 장자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집은 재앙이 넘어갔으므로 한 집도 장자가 죽지 않았습니다. 이는 애굽인들은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르지 않았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양의 피를 문에 발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집마다 문 사방에 피를 바른 것일까요? 왜, 붉은 물감을 바르라고 하지 않으시고 어린 양의 피를 바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피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현대 의학 역시 피를 생명과 동일시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자손의 장자들을 대신하여 어린 양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장자는 한 집안의 대를 이을 사람으로서 장자가 죽임을 당한 것은 그 집안 전부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월절 어린 양들은 비단 장자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 모두를 위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애굽인들의 집을 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은 집안에서 어린 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 먹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자손 전체가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이 유월절 어린양들은 장차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증언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 멸망당할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은 우리가 마귀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상징합니다. 애굽은 이 죄악 세상을 가리키고, 애굽 왕 바로는 마귀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출애굽 사건은 죄와 마귀에게서 해방된 것을 상징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를 믿는 자들이 죄와 마귀에게서 해방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죽음이 생겨난 것은 아담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에 이르기를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없애려면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죄를 없애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앞으로 의술이 발달하면 장수 유전자를 몸속에 주입하는 방법으로 오래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단전호흡을 잘하면 신선처럼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같은 주장은 무지하고 허망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유전자를 장수 유전자로 변형시킨다고 해서 또는 단전호흡을 하고 명상을 한다고 해서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죄를 없애지 못하면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의 심각성에 대하여 다루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제시하는 종교도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잔을 가지시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죄 때문에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의 죄를 주님께서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죽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의 떡과 잔을 대하면서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살 찢고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작은 떡 조각은 예수님의 살을 의미하고, 작은 잔은 예수님의 피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이 같은 영적 진리를 알지 못한다면,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의 대속을 알지 못하고 성찬을 먹고 마시는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합니다. “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29)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 

세 번째로,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영의 양식이 되심을 말해 줍니다. 

“떡과 포도주”는 양식과 음료를 의미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밥과 물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서로 논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떡은 곧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어야 살지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대체로 사람이 일주일 동안 음식과 물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밥이 곧 생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우리 육신을 위한 양식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우리 영의 양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의 양식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의 양식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성찬을 대할 때라야 은혜가 되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지, 믿음이 없이 성찬에 참예하는 것은 한갓 종교 의식에 참석하는 것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지 무슨 종교 의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성찬의 영적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성찬 예배 때만 예수님이 우리 영의 양식과 음료가 되심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매 끼 때마다 밥을 먹으면서 우리 영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로, 성찬은 하나님과 믿는 자들 사이에 새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가지고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곧 어린 양의 피를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칠하고 그 집안에 머물러 있으면 사망을 면하게 된다는 언약입니다. 이 유월절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운 것이지, 애굽인들은 이 언약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애굽인들은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재앙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잔을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그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 관계에 들어간 것을 말합니다. 그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영벌을 면하고 영생에 들어가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그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 특별한 관계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요 20:17)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사람들만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아버지로 부를 수 있으며, 성도라는 거룩한 이름을 부여 받지, 예수님의 피와 상관없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외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 불변한 근거는 이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성립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의를 보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7)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 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언약의 피가 되어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의 잔을 대할 때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언약의 피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입니다. 세례는 우리가 주 예수를 믿는 자라는 사실을 교회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며, 성찬은 우리가 대속의 은혜를 되새기면서 주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예하게 된 것을 확인하는 의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두 가지 의식은 경건한 마음으로 믿음을 가지고 참여해야 합니다. 

특히, 성찬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 자세에 따라서 성찬은 영적으로 큰 유익이 되기도 하고 주님의 책망을 받는 결과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성찬을 받기 전에 기도로 준비하고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으며, 그런 다음에 대속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찬을 대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찬이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믿는 자들 가운데서 살아 역사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은혜로운 기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하여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성도님마다 영적 생명이 풍성하게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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