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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사람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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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사람 (마 5:1-12)

오늘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주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의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기독교의 역사는 핍박과 박해 앞에 고스란히 노출된 역사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얼마 되지 않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박해의 그 다음 차례는 남아 있는 예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도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첫 번째는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힌 것이었고, 그 후 사도행전 7장에 가면 기독교의 첫 번째 순교자가 생겼는데, 다름 아닌 스데반 집사님입니다. 그 후 12장에 가면 예수님의 제자들 중 야고보가 첫 순교자가 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 집사님이나 야고보 사도가 박해를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유대 사회는 왜 이 분들을 죽였습니까?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 대제사장들이나 백성의 장로들을 이 자리에 불러 인터뷰를 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그들은 <스데반이나 야고보 같은 사람들은 유대 사회의 의를 파괴했다. 그러므로 죽어 마땅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유대 사회의 의>란 무엇일까요?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성인식을 행하고, 성전에서 제사하고, 회당에서 율법을 배우고, 메시아가 오길 기다리면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메시아가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꼭 오셔서 자신들을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광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게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의였습니다. 

이들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의 사람들은 의롭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유대 사회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진리를 뛰어넘어 오지도 않은 메시아가 이미 왔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목수가 메시아일 수 있는가? 그들은 그 예수라는 목수를 메시아라고 주장함으로써 큰 사회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들의 말대로 한다면 성도들은 <의를 파괴한 죄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이 정말로 <의를 파괴한 사람들>이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의를 파괴하다가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의를 지키려다 박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사람들이 의를 파괴한 죄인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말하는 의>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곧 예수님 자신입니다. 본문은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10절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그 표현을 바꾸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라고 말씀합니다. 11절을 다같이 읽어 봅시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모든 게 분명하지요? 10절에서 말하는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이 11절에서는 <나>, 즉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으로 되어 있으므로,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는 말과 <예수님을 위해 박해를 받는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곧 의>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사람이 곧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이요, 뒤집어서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이 곧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삶과 신앙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의를 위해 산다는 것은 어떤 사회적 이념이나 견해를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 곧 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박해를 받는 것이 곧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무조건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위해 사는데, 이것이 세상과 충돌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이 말하는 의>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의, 즉 예수님>이 충돌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 당시에 유대 사회에서는 메시아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다윗 같은 메시아를 계속 기다리는 것이 의였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보기엔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증오하다가 죽이게 된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야말로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인정하고, 그 분을 위해 사는 것이 의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것, 그 분의 말씀을 믿는 것이 의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7절은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의>와 <그리스도인들의 의>가 서로 달라서 충돌할 때, 핍박과 박해가 생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둘 중에서 예수님을 의로 여겨 따르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나고 박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사회에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면 박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메시아로 제대로 믿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였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회는 자신들의 의를 따라 살도록 강요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해 왔습니다. 

지금 북한이 이런 비극이 벌어지는 현장입니다. 여러분, 북한 사회가 주장하는 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가르침, 즉 주체사상을 따르고, 김정은에게까지 대를 이어 충성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의롭다는 칭찬을 들으려면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을 부정하고, 당을 위해 무슨 짓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을 밀고하고 박해하는 사람이 북한에서 의인입니다. 

그러나 지금 북한에는 이런 북한 사회가 주장하는 의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의로 믿고 따르는 이들이 수십만 명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 중 7-8만여 명이 강제 수용소에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의로 믿고 따릅니다. 이들은 북한 사회의 의를 파괴한 반동분자로 몰려 죽음을 당하고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어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분들과 조국의 평화 통일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도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단순히 사람들로부터 <착한 사람>이란 칭찬을 듣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잘 따르고, 그들이 말하는 의에 순응하면 그들은 우리를 착하다고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를 욕할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기독교인들에게 도에 지나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비방을 받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회에서 모범생이 되길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가 철저히 예수님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세상과 적이 되더라도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경우에 사회가 말하는 의를 잘 따르는 사람이 예수님의 적이 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야말로 멸망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를 때, 사회가 강요하는 의에 정면으로 맞설 때, 우리는 참 자유와 구원을 얻게 됩니다. 

히틀러가 다스리던 독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나치 치하에서는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학살하는 것, 유대인을 몰아내고 유럽을 장악하여 게르만족의 대제국을 건설하는 데 앞장 서는 것이 당시 독일 사람의 의였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의를 따른다면 그는 사악한 전쟁광이요, 살인마가 될 것입니다. 그는 독일 최고의 훈장을 받겠지만, 이건 결코 의가 아닙니다. 

당시 독일 사람들이 생각하던 의는 <악한 의>였습니다. 여러분, 의라고 해서 다 선한 게 아닙니다. 당시 독일 사람들이 생각하던 의는 사악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본 훼퍼 목사님>은 이런 <악한 의>에 대해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그 분은 젊은 나이에 신학박사와 목사가 되신 분이요, 존경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독일 사회의 사악한 의를 제거하기 위해 히틀러 제거 음모에 가담하였습니다. 결국 그 분은 39를 일기로 처형당했습니다. 그 분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의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아무리 권력자라 할지라도 예수님과 맞서는 것은 의일 수 없다는 것과 예수님의 뜻을 따라 유대인까지도 사랑하고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참된 의임을 알았습니다. 본 훼퍼 목사님은 순교하셨지만, 그 분의 삶과 가르침은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도 예수님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주님을 기쁘게 하려고 힘썼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당시 갈라디아 교회는 올바른 복음을 지키지 못하고 이탈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죄인이며, 오직 주님의 복음,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로, 자신들의 인간적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바로잡아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갈라디아 사람들을 책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책망한다는 것은 마음이 아픈 일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의 눈치나 보고,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좋게 지내기를 포기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기쁘게 하기로 작정하고 갈라디아 사람들을 심하게 질책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 것을 각오했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산 사람,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욕도 먹고 비난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복을 받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세상이 강요하는 의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자, 이렇게 말씀드리면 <사회가 주장하는 의와 예수님이 서로 충돌할 때,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하여 살면 사회가 무너지지 않겠느냐? 사회가 혼란해지지 않겠느냐?>고 묻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이런 문제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나 예수님을 선택하고, 예수님을 위해 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같은 구원자가 없고,  또 예수님의 말씀 같은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우리가 죄악을 떠나 구원을 받고, 복을 받고, 거룩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깨어진 부부관계를 회복시키고, 자녀를 바르게 성장하게 하고, 가정을 행복의 동산으로 만드는 비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사회를 정직하게 하고, 어려운 이들을 돌보아 사회 불안을 없애고, 나뉘고 갈등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연결시켜 주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세상은 밝아질 것이며, 사회는 안정될 것입니다. 모두가 존엄하게 대접받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해서 살다가 망한 나라, 실패한 가정, 인생은 없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생명과 축복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의는 그렇지 못합니다. 사회적 의는 오히려 한 사회와 가정과 개인을 파멸로 인도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이미 많이 증명된 것입니다. 로마 시대의 의는 부패된 의여서 부모와 자식이 성적 관계를 맺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게 무슨 올바른 의입니까? 망하게 하는 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적 의를 따르기보다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의요, 그렇게 살다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다가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박해를 받으신다면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박해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5장 18절을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미움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박해를 받을 때, 바로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되어 우리가 예수님을 닮을 때,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소위 <엔 크리스도,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기독교 최고의 신비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성도가 됨으로써 예수님과 동행하시길 기원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혹시 예수님 때문에 남들로부터 비방을 받고, 무시를 당하고, 손해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고 있다면, 그는 진정한 예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 욕을 먹는 것인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욕을 먹는 것인지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욕을 먹으면서도 마치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처럼 미화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인이 장사를 하면서 거짓말을 한다든지, 상대방에 손해를 끼치는 계약을 한다든지, 회사에서 불성실하다든지, 친구 간에 의리가 없는 행동을 해서 욕을 먹고,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계약이 파기된다면, 그건 결코 예수님을 위해 박해를 받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박해, 고난, 십자가는 다른 사람을 위해 지는 것이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잘못 때문에 그 벌로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냥 죄를 지은 사형수의 죽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랬기에 그 박해, 그 고난,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절대로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듣고, 미움을 받을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그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칭찬을 받을지언정, 절대로 우리 잘못으로 박해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 살아야 하고, 예수님 때문에만 박해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고난의 길입니다. 

어쨌든 이제 우리는 세상이 강요하는 의를 따르지 말고,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 이 세상사람 날 몰라 줘도 이 세상사람 날 몰라 줘도 이 세상사람 날 몰라 줘도 뒤돌아서지 않겠네 //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할렐루야! 이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는 말씀은 마음에 잘 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가 너무 편안한 환경에서 예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별로 없는 환경에서 이 말씀을 나누다보니 이 말씀이 잘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서 예수님을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이 되도록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전도하시라는 것입니다. 올 연말이 되기 전에 한 분씩 전도하십시오. 이 시간 결심하시고 마음에 둔 사람을 꼭 모시고 오십시오. <교회 가서 예수님을 믿자>고 말씀드리고 손을 잡고 오십시오. 그렇게 하면 아마 틀림없이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전도하면서 겪는 반대와 마음의 부담이야말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작은 박해가 될 것입니다. 올해 안에 한 분씩 꼭 전도하시길 부탁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천국을 얻게 됩니다. 우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다 이런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 믿음을 지켜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모습으로 예수님과 예수님 뒤를 따른 많은 선배들을 따라 천국에 이르기까지 믿음으로 전진하길 기원합니다. 팔복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지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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