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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헛수고의 밤을 보낸 후에 (요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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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수고의 밤을 보낸 후에 (요 21:1-14)

구 소련의 중앙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스탈린은 레닌의 후계자가 되어서 정권을 잡았을 때 그가 제일 처음 한 일은 자기의 어린시절을 알고 있는 주위 사람들, 또 어릴 때 친구들을 처형하는 일이였습니다. 내 어릴때 부끄러움, 약점을 알고 있는 이들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쥐도새도 모르게 처형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약점을 알고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약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니까 베드로에게도 약점이 있고 그에게도 실패의 뼈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실 제자들앞에서 큰소리치던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려도 나만은 절대 그런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몇 번이나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보기좋게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같은 땀방울을 흘리시며 기도할때도 예수님께 힘이되어드리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잠을 이길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셔서 체포되시고 대제사장의 집뜰에서 심문받으실때도 베드로는 예수님께 힘이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숯불옆에 앉아있다가 어린 여종의 질문을 받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아니냐 너도 예수와 동료가 아니냐 그 말에 베드로는 깜짝 놀라서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세 번씩이나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달리실 때 베드로는 그 자리에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멀찍이 피해서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후에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참으로 너무 부끄러워서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앞에 자신은 볼 면목이 없는 부끄러운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디베랴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어찌보면 고기를 잡으러 갔다는 것은 옛날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로서의 삶을 스스로 포기하고 과거의 그가하던 원래의 직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6명의 다른 제자와 함께 갈릴리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았는데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제자들은 바닷가에서 뼈가 굵은 사람들인데 이런일은 좀처럼 경험해보기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아무리 3년동안 쉬었다고 해도 이렇게 고기를 못잡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때 바닷가에 서신 어떤분이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없습니다. 오른편에 그물을 내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누군지 잘 모르고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153마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도 아주 큰 고기였습니다. 그 순간 요한이 주님이시다라고 소리쳤고 제자들은 주님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단연 베드로가 제일먼저 주님을 향해 달려가고 주님이 제자들을 위해 준비해놓으신 아름다운 식탁에 초대를 받고 그 생선과 떡을 먹고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다시금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몇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왜 베드로는 고기잡는 일에 실패했을까입니다. 먼저 그는 주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모든 크리스챤들은 주님과 생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동행해야 될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떠난다면 주님을 등지고 살아간다면 우린 실패할 수 밖에 없다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보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내가 저안에 저가 내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포도나무 줄기대신 주님께 붙어있는 가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지가 줄기로부터 단절되어 버린다면 하루이틀은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주일만 지나면 그 가지는 말라비틀어지고 말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는 것은 비극이요, 종말이요, 실패인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 보니까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데마라는 사람은 충성된 제자였지만 스승인 사도바울을 버리고 교회를 버리고 주님을 등지고 그는 세상의 향락을 쫓아서 떠나갔던 그런 인물입니다. 

찬송에도 주없인 살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그런 찬송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늘 주님편에 붙어 있고 주님과 동행하는 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가 왜 고기잡이에 실패했을까요. 

두 번째 이유는 사명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3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이 말에 어떤 뉘앙스가 있습니까. 그는 이미 사명을 버린 사람입니다. 

어찌보면 자기의 목적의식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쉽게 예전의 직업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나는 주님앞에 설수가 없고 제자로서의 사명자도 아니라는 그런 자괴감이 베드로의 마음을 괴롭게 했을 것입니다. 그는 사명을 던져버리고 고기잡이하러 다시 떠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부르실 때 마태복음 4장에 소개가 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니. 베드로는 평생동안 물고기를 잡던 사람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에게 고귀한 일을 맞기겠다. 그것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다. 영혼을 건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에게 아주 귀중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5장에도 변함없이 소개가 됩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제 후로는 네가 고기잡는 어부가 아니라 영혼을 낚는 사람을 취하는 고귀한 사명자가 될 것이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명을 던져버리고 옛날의 직업인 물고기 잡으러 돌아간 것입니다. 사명의 상실 이것은 비극입니다. 그것은 곧 실패를 의미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물론 직업이 따로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다 직장에 다니시고 하시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고귀한 사명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직장에 나가 일도 하지만 전임선교사나 전임목회자는 아니지만 너희들도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기억하고 충성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을 잊어버리고 주님을 등지고 떠나가면 거기에 실패가 있고 빈 그물이 있고 빈 배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보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한때는 먹을것, 입을 것 가지고 걱정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왜 걱정하느냐 믿음이 적은자들아. 저 공중에 날아가는 새를 봐라 누가 그거 먹이고 입히느냐 하늘 아버지께서 알아서 다 입히고 먹이시지 않느냐. 들에 핀 백합화를 봐라 누가 돌보느냐 하나님께서 다 돌보지 않느냐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너희들이야 말할것이 무엇이냐. 믿음이 적은자들아 하시면서 책망하시죠. 

그러면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무엇입니까. 너희의 사명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타의 삶은 내가 책임지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40년을 지나갈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시고 메추라기를 불어오셨듯이 내가 너희를 책임질 것이다. 우리가 사명자의 자리로 돌아갈 것을 말씀합니다. 

교회와서 얻은 직분이 내 사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교회의 은사대로 하나의 직임대로 주어진 직분이지 그것이 사명은 아닙니다. 우리 모든 크리스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가 영혼 구원을 위해 존재하듯이 우리 모두도 사람을 건지는 일에 우리모두는 부름받은 사람들이라 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회복하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어떻게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까. 먼저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회복을 경험합니다. 4절에서 6절입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들은 먼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만선의 축복을 누립니다. 

어떻게 회복될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주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복받는 일의 출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영혼이 복을 받고 범사가 복을 받고 강건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분이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지만 결국 알고보니까 그분은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들은 만선의 축복 가득찬 그물의 축복을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그들은 주님을 향해서 달려가게 됩니다. 

7절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7절을 주목해 보시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사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제자가 누구입니까 사도요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요한입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라는 이름은 빼지만 그가 바로 자신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재미있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베드로나 야고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사도 요한은 나는 예수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제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의식이 있었고 믿음의 고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제자라고 믿으십니까.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는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야. 주님은 나를 너무너무 사랑하셔. 주님은 내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지. 이런 확신이 있다면 세상에 두려울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 그런 확신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엄마는 나를 제일 사랑해 형제들 가운데 나만 너무 좋아하시고 내게 용돈도 더 주시고 더 친절하셔. 어떻습니까. 그 아이는 살맛이 날 것입니다. 신날것입니다. 왜? 엄마는 나를 제일 사랑하니까. 그러나 어떤 자녀는 엄마는 나를 제일 미워해. 내가 말만하면 엄마는 꼬투리를 잡고 나를 왜 그렇게 미워하는지 몰라. 나는 버림받은 아이야. 주어온 자식인가봐. 그렇다면 그의 삶은 우울할 것입니다. 삐뚤어져 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자의식속에 나는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라는 이 확신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에게 그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사도요한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자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 그가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주님이시다라고 말합니다. 이 얘기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신분이 바로 주님이시다. 그 전에는 몰랐습니다. 요한이 제일먼저 알아챘습니다. 베드로도 몰랐습니다. 요한이 제일먼저 알았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요한이 주님께 예민했다는 것입니다. 늘 주님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그분을 빨리 알아봤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제자들과 예수님이 서계신 바닷가 사이는 약 50칸쯤된다. 50칸이라는 것은 환산하면 약 90미터입니다. 아직 해가뜨지 않은 안개가 낀 바닷가에서 90미터라면 멀수도 있고 가까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개가 끼어 있다면 잘 사람을 분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바로 그 사건을 통해서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누가복음 5장에서 이미 옛날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가 헛수고하고 아무것도 못잡고 그물을 정리할 때 주님이 오셔서 얘들아 내가 말씀을 좀 전해야 하니까 배를 좀 빌려달라 해서 허락했더니 배에서 말씀을 증거하시더니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깊은데로 내려가 그물을 던지라. 

베드로가 말합니다.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얻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니 제가 순종하겠나이다 해서 깊은데에 그물을 던졌더니 많은 고기가 잡혀서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만선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일로 인해서 베드로와 요한은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기억해 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신 분이 저분이 바로 주님이시구나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기억해 냈을 것입니다. 요한이 주님을 더 사랑하는 제자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였습니다. 자녀들도 그럴것입니다. 부모님이 잠깐 출타하시고 방안에 몰려있는데 으스스한 느낌도 납니다. 

그런데 밖에서 발소리가 납니다. 그러면 잘 모릅니다. 그런데 형제중 한사람이 아! 엄머 발자국소리다. 알아채는 겁니다. 어머니께 그만큼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의 어떤변화, 어떤 좋은일이 생길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구나.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구나. 이게 주님의 은혜구나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 좋은 일이 있을 때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고 취업이 되고 가정에 기쁜일이 생길 때 내가 살만한 때가 됐구나, 복받을 때가 됐구나 애들 비싼 등록금내서 학교보냈더니 보람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우리가정에 은혜를 주시는구나.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구나. 이것이 주님의 사랑의 부어주심이구나. 이것이 주님으로 온 결과임을 우리가 예민하게 느낄수 있어야 한다. 요한은 주님이시다라고 소리칩니다. 그때 베드로는 벗고 있었는데 겉옷을 걸쳐입고 물로 뛰어들어가서 뛰어갔는지 헤엄쳐갔는지 성경에는 없지만 그는 예수님을 향해 달려갑니다. 어찌보면 주님이라는 말을 듣는순간 그는 마음이 너무나 착잡했었는데 사랑하는 주님이 여기오셔서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마음이 벅차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송함과 송구함이 겹겹이 싸이면서 그저 주님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달려가면서 그의 인생이 회복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빈배의 인생이 충만한 인생이 됩니다. 빈 그물이 넘치는 그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등지고 떠나가면 떠나갈수록 그는 실패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서 놀라운 자리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9절입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님께서는 숯불과 생선, 떡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사실 숯불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집뜰에서 예수님이 심문받을 때 그 때 베드로가 숯불을 쬐다가 불을 쬐다가 그런 곤란한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또한번 그 사실을 기억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1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애들에게 아침먹어라 하는 말과 똑같은 겁니다. 제자들은 밤새 고기를 잡았으니까 많이 피곤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한 마리도 못잡았으니까 더 피곤했을 겁니다. 배도 고팠을 겁니다. 주님께서는 와서 조반을 먹으라. 그리고 친히 숯불에 생선을 구어서 생선을 제자들에게 먹이시고 떡도 권하여 주셨습니다. 

얼마나 좋은 주님이십니까.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 제자들은 주님을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 상처를 안아주시는 주님,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시는 주님, 굶주리고 피곤한 인생들에게 먹이시고 공급하시는 주님, 격려하시는 주님, 이 사랑의 주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찾아오시는 주님의 사랑, 그것은 실패한 베드로와 그 제자들을 예수님은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제자들이 고기잡는 모습을 바라다 보셨습니다. 그들이 지쳐서 절망할 때 오른편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안내해 주셨고 이제 그들을 위해서 아름다운 식탁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는 말에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오른편이라는 것은 늘 오른쪽 옳다 그리고 구원의 장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최후의 심판에서 양들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섭니다. 염소라는 것은 심판받을 자들입니다. 그러나 양이라는 것은 구원받을 자들입니다. 구원받을 자들의 자리는 오른쪽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하나님보좌 우편에 서 계십니다. 

전도서 10장에 보니까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했습니다. 바로 구원의 자리는 오른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거기에 고기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너희가 믿음에 견고히 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삶의 방향을 주님편으로 돌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라 사명자의 자리로 돌아와라. 너의 사명을 회복하라 그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른편에 던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풍성한 어획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아주 큰 물고기만 잡았다고 합니다. 

11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보니까 아주 큰 물고기입니다. 보통 잡다보면 피라미도 걸리고 큰것도 잡히겠지만 큰 물고기로만 골라서 백쉰세마리다. 

역사속에도 153 이것이 뭘 의미하느냐. 이게 때로 논쟁도 됐습니다. 오리겐이라는 성경학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고기 숫자가 백쉰세마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모든 고기가 다 잡혔다는 것입니다. 뭘의미합니까. 여러분이 어떤 삶의 영역에 있든지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실 때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여러분의 인생에 승리자가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어떤일을 하든지 온갖고기가 다 그물에 잡혔듯이 여러분이 어떤 인생속에서도 주님과 동행한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여러분은 승리자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복은 주님과 동행하는 곳에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일백오십삼은 여러분이 잘아십니다. 여기 모나미볼펜을 가져왔습니다만 이 모나미볼펜회사 사장이 조그만 기업을 하다가 자기 힘으로 자기 지혜로 뭔가 해보려고 애쓰다가 처음에는 잘되다가 쫄딱 망합니다. 그는 다시 주님앞으로 돌아와서 부르짖고 기도합니다. 주님의지하지 않고 제 지혜 경험만 의지하다가 쫄딱 망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도합니다. 기도하다 잠들었는데 하나님이 153이라는 숫자를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을 읽었어야 알죠. 그래서 자기 출석하는 교회 목사님께 여쭤봤습니다. 기도하는데 153자를 꿈에 보여주시는데 이게 뭡니까. 목사님이 아 그거요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베드로가 빈 그물로 있다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고기를 잡았는데 153마리가 잡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때서야 이분이 박수를 칩니다. 그렇군요. 주님께서 제게 의미를 알려주셨군요. 그래요 제가 주님떠나 살때는 빈그물이지만 내가 주님의지하고 주님따라 순종할 때 내게 풍성한 그물을 주시겠다는 약속이군요. 그래서 그는 그것을 잊지않기 위해서 그는 지금도 모나미볼펜에 153이라고 기록해 놨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할 때 축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 인생은 주님과 동행할 때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오혜령이라는 작가가 있는데 이분이 처음에는 자기 능력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애 썼습니다. 그러다가 사업도 잘 안되고 몸에 임파선 암이라는 병까지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크리스챤이지만 기도해본적이 없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환경이 왔을 때 주님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정말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그의 임파선 암을 깨끗하게 치료하셨습니다. 그는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책이 당신없는 인생은 빈 그물이오니 라는 책이였습니다

그 책의 내용에 일부를 소개한다면 이렇습니다. 당신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랬던 지난 나날들은 죽은 시간이였습니다. 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주시옵소서. 그러면 저는 비로소 살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당신없이 한평생 수고해 보아야 우리 인생은 빈 그물이옵니다. 하나님없는 수고, 하나님없는 고기잡이, 빈 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주님이 함께할 때 내 인생에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분명한 사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빈그물을 채우시는 주님, 낙심하고 절망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다시 세워주시는 그 위로의 주님이 정말 우리 주님이라면 우리만 그분을 알아서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좋은 주님이라면 우리 가족에게도 우리 친구들에게도 우리 이웃들에게도 이분을 소개해드려야지 않을까요.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우선순위가 무엇입니까. 메리케이엣이라고 하는 미국에 유명한 화장품회사를 연 여성이 있습니다. 그의 인생철학은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가정, 셋째는 직장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삶에 우선순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우선이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가정이였습니다. 그는 인생에서 여러 가지 실패와 고통도 경험하지만 마지막 미국의 최고가는 화장품회사를 일궈냅니다. 그것은 그의 철학이 하나님중심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선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정을 돌보는 일에 소홀함이 없었을 때 그의 직장과 사업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빈그물이십니까. 오늘이 또 11월 6일 이제 두달밖에 남지않은 11월 첫째주일입니다. 10개월이 어느새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빈그물입니까. 주님을 모시십시오.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과 붙어 계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의 인생은 만선의 기쁨, 가득찬 그물의 감격을 나눌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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