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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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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9-11)

세계적으로 희귀한 미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하는 것을 마치 생의 목적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한 수집가가 있었습니다. 희귀한 골동품이 있다면 세계 어디라도 좇아가서 그 물건을 구입하였습니다. 어느 날 유럽 왕가에서 사용했던 아름다운 도자기 하나를 잡지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잡지에서 그 사진을 보는 동안 가슴이 뛰었고, 그 후로는 아주 정신을 거기에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 여행을 하면서 추적을 해보았지마는 그 도자기의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 크게 실망하여 병이 날 지경에서 어느 날 잡지를 보는데 골동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 골동품이 어떤 사람에게 팔렸다고 쓰여 있습니다. 깜짝 놀라서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굴까? 하고 이름을 자세히 보았더니 자기 이름이더랍니다. 

벌써 오래전에 그 골동품은 자기가 사들여서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마는 그것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다니면서 찾아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단 말입니다. 가져다 놓을 그 때뿐이었지, 지나고 나서는 기억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때로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한 가치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받은 은혜도 그렇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 때만 비로소 은혜가 됩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 가장 소중한 자기 건강, 내가 지금 처하고 있는 이 현실의 귀중한 의미를 내가 깨닫지 못한다면 은혜도 은혜 될 수 없고 복도 복이 될 수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물고기의 지능이 0.3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끼를 물다가 낚시 바늘에 걸려 발버둥 치면서 끌려가다가 겨우 살았는데 금방 잊어버린 채 또 미끼에 현혹되어 다시 입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적인 지능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까지 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셨고, 지금도 베풀어주고 계시건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순간순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하면서 살도록 매년 삼대절기를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첫째 절기는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부활절로 바뀌어졌습니다. 사망의 권세에서, 죄의 종에서 해방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둘째 절기는 맥추절입니다. 첫 추수를 하고 난 뒤, 전반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보내게 된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절기입니다. 

셋째 절기는 장막절입니다. 지금의 추수감사절입니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난 뒤, 하나님이 1년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절기입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앞둔 오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따라 우리 모두 감사로 머리의 생각으로 꽉 차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로 가슴이 뜨거워지며, 감격의 눈물과 그리고 지금부터 감사로 살리라는 다짐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0절 한 절 말씀 속에서 사도 바울은 은혜라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사용했습니다.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사도 바울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있었는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은혜’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정의는 “남에게서 받는 고마운 혜택”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는 사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은혜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가끔 “스승의 은혜 또는 부모의 은혜”라는 표현을 쓰지만 일반적으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은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적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받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 받는 것입니다. 집나간 탕자가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가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을 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은혜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며, 본질적으로 공(功)로 없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은혜를 얼마나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까?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할 수 없는 삼중 장애를 가진 헬렌 켈러는 이러한 엄청난 불행가운데서도 항상 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한 평생을 감사하며 살았던 헬렌 켈러에게 말년에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과 함께 한 평생을 살아왔는데 당신은 하나님을 원망해 본적은 없습니까?” 

그때에 헬렌 켈러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헤아리는 것만도 시간이 부족하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하는 것으로도 부족한데, 어찌 원망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감사하고 그 은혜를 기뻐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원망할 시간이 없다는 고백, 이러한 사람이 바로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짜증과 불만과 절망을 가진 많은 사람을 봅니다. 그 분들은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사는 것이 힘들고 짜증이 납니까? 아직 은혜를 너무 모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알면 놀라워집니다. 무엇에 놀랄까요? 내가 참 많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보통 사람들은 가지지 않은 것만 보지만 은혜를 아는 사람은 가진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자격이 없는데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황송하고 감사합니까? 사람들이 “더‘라는 단어에 속아 살고 있습니다. 더 가져야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은혜가 풍성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주님의 은혜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은혜입니다. 은혜를 알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은혜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은혜를 깨달아 알면 행복해집니다. 인생이 풍요롭습니다. 은혜를 알면 기쁨이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바울처럼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는 깨달음입니다. 

미련한 자는 깨달음이 없습니다.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감사함이 없고 감사함이 없기 때문에 헌신과 봉사와 희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이 있을 때 믿음이 생겨나고, 믿음이 있게 되면서 순종이 이루어지고, 순종이 있음으로 헌신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격적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10절에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말씀의 핵심은 ‘나의 나됨을 아는 삶’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과거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그는 정말 치명적이 많은 상처를 입힌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잘못된 신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대적하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교회를 잔멸하였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사울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할 정도의 인물이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님은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핍박자의 삶을 살았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이 8-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서 자기 자신의 실존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신’을 고백합니다.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기에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 못할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딤전 1:15절에서는 자신을 소개할 때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이상 자기 비하의 표현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진정한 자기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의 실존을 정직하게 알고 고백하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무엇보다도 먼저 겸손해 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전의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사울이라는 이름처럼 그는 큰 자였습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 로마 시민권을 가졌고, 당대에 학문과 명예와 권력과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자랑거리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난 후의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렸다고 혁명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이것이 은혜를 아는 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는 놀라운 선언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역시 큰 죄인이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용서받기 어려운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걸음을 에벤에셀로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기 자랑에 능하고, 자기 의를 앞세우고, 자기를 높이는데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가 오늘 어디에 이르렀던지, 그것이 부요함이든, 지식의 뛰어남이든, 남달리 좋은 환경에 있든, 명예와 권세의 자리에 있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할 수 있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의 또 다른 특징은 받은 것에 감사하며 은혜 갚는 삶을 위해 힘쓴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받은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은혜 받은 자로서의 삶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10절 하반절에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수고 한다’는 단어가 흥미롭습니다. 수고라는 헬라어는 ‘코피아오’인데 “탈진한 정도로 열심히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절실히 깨달을수록 더욱 더 수고했습니다.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생명을 내어 놓고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고후 11:23절 이하에 보시면 사도 바울을 삶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파선의 위험과 춥고 굶주리며,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을 감수하며, 감옥에도 수없이 갇혔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과 주님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위하든 돈을 위하든, 권세를 위하든, 쾌락을 위하든, 나름대로 삶의 목적을 정해놓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진정한 목표가 있음은 행복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위해 사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삽니다."라고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롬 14:7-8절에서 삶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살지 않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삶이 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고 죽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의 손에 붙잡혀 가치 있게 쓰임 받는 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견고하게 세우는 일에 쓰임받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왔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올 한해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시면서 교회적으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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