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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자유 선언 (고전 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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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자유 선언 (고전 9:1-2)
  

본문은 참 자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유는 마음대로 놀러 다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인간의 실력을 말하고 삶의 깊이를 말하고 삶의 무게를 말합니다. 그래서 참 자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비록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 태연하게 종말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유함입니다. 거기에 얼마나 깊음이 있고 심오함이 있습니까? 그러나 부자유한 사람은 종말 앞에서 안달하고 초조해 합니다. 그만큼 부자유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은 참 자유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 때 가장 위대했던 전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도 한때 예수를 몰라서 무서운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을 무섭게 핍박했습니다. 이 편견이 참 무섭습니다. 편견은 진주를 돌로 보게 하고 돌을 진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만큼 편견은 오류를 낳고 곡해를 낳습니다. 로마시대에도 그런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피를 마시고 사람의 살을 먹는다고 핍박하였습니다. 그런 편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무고히 죽어갔습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 초기에 많은 편견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사문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습니다. 이 모두가 편견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편견 속에서도 예수를 깊이 아는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순교를 했습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해서 그만큼 깊이 알고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사도바울도 처음에는 예수에 대해서 오해하고 곡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만나게 되어 예수를 깊이 알게 되면서 예수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해가 풀리고서야 제자들이 전파한 내용들이 모두 사실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자신의 삶을 유턴시켰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노라”고 선언하고 평생 예수를 전하고 증거 하다가 마침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깊이 알고 나니까 자유하게 되었고 목숨을 버릴 힘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내가 예수를 보지 않았느냐, 이점을 너희가 알지 않느냐”고, 예수를 깊이 알고 나니까 사도바울은 비로소 스스로를 참 자유인이라고 강조하여 말하게 된 것입니다. 

시편 27편에서 다윗도 그 자유함을 노래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자’였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나의 빛이신데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대적이 내 살을 먹으려고 왔으나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치나 나는 두렵지 않으며 전쟁이 나를 치려하나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자신만만합니까? 이것이 자유함입니다. 

월간 조선 11월호에는 오늘 중국이 한국에 대해 두 가지 견해를 갖고 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첫째는 한국이 부럽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는 참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서해안 기름 유출사건 때 100만 명이 줄지어 자원봉사자로 달려가 기름때를 벗기는 모습을 보고 중국이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자유롭게 스스로 달려가는 그 모습은 중국으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한국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 두려운 이유도 한국의 축적된 자유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의 자유는 60여 년 동안 축적된 것입니다. 4․19때부터 자유를 위한 항거가 일어나서 현재의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이제야 그 물결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에는 200만 명의 민병대가 있습니다. 그 민병대의 역할은 폭동을 진압하는 것입니다. 오늘 중국에서는 한해에 크고 작은 폭동이 30만 건씩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폭동들은 겉으로는 생활고로 인한 폭동 같아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자유를 달라는 폭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중국이 한국을 그렇게 부러워하고 또 한편으로 두렵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이 바로 이 자유함입니다. 마음의 자유, 영적인 자유, 삶의 자유, 신앙의 자유, 신체적인 자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그 자유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먼저 자유부터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진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나는 자유자”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헬라어로 “엘류데로스(έλεύθρος)”입니다. 이 자유는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누리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를 아는 삶 

바울은 “내가 예수를 만나지 않았느냐”고 말합니다. 참 자유는 예수를 아는 삶에서 주어집니다. 내 인생 최고의 사건은 예수를 만난 일입니다. 예수를 몰랐으면 오늘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떤 새 신자는 자신이 예수를 앎으로 인해 3가지의 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신비로운 만남의 복입니다. 그분은 이전에는 절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절에 갔다가 불공 중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예수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꿈을 깨 그 사실을 주지 스님께 말씀드렸더니 “당신은 예수를 믿으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기이한 일입니까? 둘째는 신비한 깨달음이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전혀 무지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죄인이었고 그럼에도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세 번째는 홀가분함의 복입니다. 전에는 여러 신을 믿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예수를 믿고 보니 예수 한분만 믿으면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홀가분하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보름 때가 되면 음식을 만들어 집안 곳곳에 조금씩 놓아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 귀신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놓았는데도 혹시 빠트린 귀신이 있을까 봐 마루에 또 한 그릇의 음식을 놓아두었습니다. 혹시 그 빠진 귀신이 해코지 하거나 동티를 낼까 걱정되어서 입니다. 사도바울도 그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 일행이 헬라의 도시 아덴지방으로 전도를 갔는데 거기에는 우상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보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제단도 보았다(행 17:22-23).” 아덴 사람들은 많은 우상들에게 제물을 드렸는데 혹시 빠진 신이 있다면 해코지 할까봐 두려워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제단도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귀신을 섬기다가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아주 편하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복 받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장수하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그 보다도 참 자유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길이 보이고 영적 세계가 보이는 이 앎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나는 참 자유인”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참 자유한 사람들입니다. 

죄의 해결 

바울은 자신을 “자유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영혼의 자유입니다. 내 영혼이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뭔가에 얽매이면 부자연스럽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원받고 죄 사함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죄나 율법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참 자유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최고의 자유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죄 사함의 문제에 대하여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항변을 합니다. 그런데 도둑질만이 죄가 아닙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하나님을 모르는 죄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모르고 버리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큰 죄입니다.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미완성의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 미완의 부분은 하나님께 나아가야 만 채워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가 불가능하게 지어졌습니다. 인간은 혼자 있으면 미완성 상태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남녀가 혼자일 때는 고독하고 허전합니다. 그래서 짝을 찾아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헬라신화를 보면 인간 남녀는 원래 한 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제우스신이 그것을 질투하여 반으로 갈라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짝을 찾아 결혼하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둘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채움이 이루어지고 그때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인간은 수시로 고향을 찾듯이 멀리 외국에 있다 해도 고국을 찾게 되듯이 인간은 갈증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이는 우리가 미완성품이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인간을 영적 공허감, 영적고뇌, 영적 갈증을 느끼도록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나야 채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찾아가야 죄의 해방을 받고 영혼의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참 자유인”이라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죄로부터 사함 받아 구원받는 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점이 복중의 복임을 알고 사는 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죽음의 극복 

바울은 예수를 믿고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그래서 죽고 사는 문제를 초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 자유는 죽음의 문제까지 극복될 때 주어집니다. 사실 죽음은 인간의 가장 큰 적입니다. 그래서 모두 죽음을 싫어하고 모두 무서워합니다. 이 세상 천하 누구도 죽음 앞에서 큰 소리 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의사가 암에 걸렸습니다. 그 의사는 평소 아주 냉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했고 침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가 암이라는 진단을 받자 무당을 불러 굿을 했고 그 자리에서 발광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어느 수도사는 진찰 결과 이상한 점이 발견되어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이니 있는 그대로 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있는 그대로 다 얘기해 줬더니 며칠 후에 그냥 급사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모두 삶과 운명, 미래 앞에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초라한 점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자신의 미래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지성인들조차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도 그런 사람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물어봅니다. 얼마나 불안하면 그렇겠습니까? 이처럼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참 자유는커녕 오히려 불안함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참 자유인은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죽음의 문제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갈 곳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준비된 사람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태연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순교자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서울역 개찰구에 가 보면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무리는 개찰이 시작됨과 동시에 죽어라 뛰어갑니다. 그리고 또 한 무리는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걸어갑니다. 뛰어가는 사람은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먼저 도착해야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까 뛰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천히 가는 사람은 이미 자리가 예약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천천히 가도 자기 자리가 있기 때문에 여유롭게 노래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준비되었다는 것에는 이런 힘이 있습니다. 엊그제 어느 분이 임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완전히 준비하고 임종을 맞았습니다. 임종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농담을 하고 잡담을 하는 것입니다. 준비가 되면 이렇게 담담해집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자유 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사모님이 먼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산에 가서 하관을 하고 내려오다가 목사님이 다시 올라가셨습니다. 무덤 앞에 가시더니 “내 금방 올게, 조금만 기다려”하고 다시 내려오셨습니다. 얼마나 자유로운 모습입니까?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여유만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죄로부터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자유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멋이고 자유함입니다. 

신분의 자유 

바울은 “내가 사도가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나는 소속이 분명하다. 나는 주님의 사람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사람은 소속이 분명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때 경계인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경계인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아주 애매한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내 위치, 내 입장, 내 소속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내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고로 나는 죽든지 살든지 예수만 전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소속이 분명합니까?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자유한 사람입니다. 진정 행복한 사람은 누군가에 강하게 매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여인의 행복은 한 남자에게 매여 있는 것이고 한 남자의 행복도 한 여자에게 강하게 매여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대로 매이면 나의 인생, 나의 운명, 나의 미래를 인도받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자유한 삶입니다. 나의 위치, 나의 소속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매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매이지 않으면 자유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자유는 방종입니다. 그러니까 때로 허무에 빠지고 방탕에 빠지고 무질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허무에 빠집니까. 소속이 불분명해서 그렇습니다. 위치가 불분명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삶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몹시 흔들리게 되고 혼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급하니까 부처님 신령님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삶의 모습니다. 거기 어디에 자유함이 있습니까? 오직 부자유함 그리고 얽혀 매인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평생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하고 심고 가꾸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느라 평생 수고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고난당하고 무시당하며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종말의 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외쳤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리라.” 얼마나 자신감에 넘치는 고백입니까? 심은 것이 많은 사람은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예수를 만난 것이 내 인생 가운데 최고의 복이고 은혜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내 영혼이 은혜를 입었고 죄의 짐을 벗었고 구원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것이 어찌 나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사도바울도 고백하였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말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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