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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믿는 하나님 (신 10: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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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하나님 (신 10:12-18)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지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모든 길을 따르며,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섬기며, 당신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 땅과 땅 위의 모든 것이 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직 당신들의 조상에게만 마음을 쏟아 사랑하셨으며, 많은 백성 가운데서도 그들의 자손인 당신들만을 오늘 이처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마음에 할례를 받고, 다시는 고집을 부리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는 신도 많고, 주도 많으나, 당신들의 주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주님이십니다. 그분만이 크신 권능의 하나님이시요,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며, 사람을 차별하여 판단하시거나, 뇌물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며, 고아와 과부를 공정하게 재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길고 긴 오순절기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걸어온 삶의 길이 아름다우셨습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주님의 은혜가 참 크고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내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하신 일의 오묘함’ 또한 놀랍습니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을 맞으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기나긴 출애굽 여정 끝에 히브리인들은 마침내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벳브올의 맞은편인 모압 골짜기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상세하게 일러줍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면 그들은 외부의 압력과 맞서 싸우는 한편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평등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모세의 연설 가운데 일부입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의 모든 길을 따르라’, ‘그를 사랑하라’, ‘정성을 다하여 그를 섬기라’,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 여러 가지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즉 하나님을 ‘주로 모시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소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나름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 값진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걸 알 때 삶은 정성스러워지고 깨끗해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음식을 대접할 수도 없고, 여행을 시켜드릴 수도 없고, 선물을 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입술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좀 공허합니다. 사랑은 수고가 따릅니다. 사랑하는 이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우린 뭐든지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다’ 했던 세상을 아름답게 보존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사람들, 그중에서도 절망의 벼랑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요한의 말은 간명하지만 핵심을 꿰뚫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요일4:20)

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길입니다. 

• 선택 받음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까닭은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족신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 땅과 땅 위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에게‘만’ 마음을 쏟아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말 번역본에서 왜 굳이 ‘~만’이라는 보조사를 사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오히려 오해를 자아내기 쉬운 표현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이외의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오해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의 말은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의 고백이지 객관적 인식의 언어가 아닙니다. 사랑받을 만한 것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사랑받은 자들의 감격과 기쁨이 그 고백 속에 담겨 있습니다. 사랑 고백은 언제나 친교의 언어이지 객관적 사실의 언어가 아닙니다. 자기 연인에게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예뻐!”라고 고백하는 남자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고백을 하는 그 순간 그의 마음이 진실하다면, 미와 추를 구분하는 그의 판단력을 의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건 나름대로의 참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기꺼운 일입니까? 사람의 사랑을 받아도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모세는 바로 그런 실존적 체험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돌연 세상은 기쁨으로 충만한 공간으로 변하고, 감사의 마음이 속에서 솟구쳐 나옵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한번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밖에서 사람을 만나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는 꼭 강가로 난 방축 길을 걸어서 돌아옵니다. 혼자 걸어오면서 ‘이 못난 나를 사람들이 많이 사랑해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무위당 잠언록, 26쪽)

이 마음 하나를 얻지 못해 우리 삶이 무겁습니다.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모세는 지금 이런 감회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은총을 경험한 자의 느긋한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할례가 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시지요? 그런데 마음의 할례란 무엇일까요? 에스겔이 그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새 마음과 새로운 영을 넣어 줄 것이라면서 그것을 아주 인상 깊게 표현합니다.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겔36:26). 돌같이 굳은 마음은 하나님의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놀라고 기뻐할 줄 모르는 마음이고, 이웃들의 고통을 보고도 함께 아파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할례는 스스로 행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 마음의 할례를 청할 수는 있습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합니다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고 남을 깎아내리는 일을 그만 두십시오. 다른 사람이 꽃을 피우며 살도록 도우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우리 마음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교만과 위선과 허영의 우멍거지(包莖)를 벗겨주실 것입니다. 

• 가짜 주들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 신들입니다. 모세도 인정하듯이 세상에는 신도 많고 주도 많습니다. 힌두교도들이 믿는 신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합니다.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교주들도 있습니다. 정말 위험한 것은 스스로 신이라 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내적으로 지배하는 거짓 신 혹은 유사(類似) 신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상’이라는 말로 간추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우상이라는 말은 ‘실체가 없는, 무가치한’이라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당신의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돈, 권력, 쾌락, 이데올로기, 국가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골로새서의 저자는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라”면서 “탐욕은 우상숭배”(3:5)라고 말합니다. 거짓 신과 참 하나님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 거짓 신은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지만, 하나님은 과도한 욕망을 줄이라고 하십니다. 
‣ 거짓 신은 우리를 자기에게 예속시켜 옴쭉달싹하지 못하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어 주체로 살게 하십니다. 
‣ 거짓 신은 ‘너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네가 미워하는 사람도 귀히 여긴다’고 말합니다. 
‣ 거짓 신은 남보다 앞서는 게 성공이라 말하지만, 하나님은 남을 배려하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하십니다. 

우상 혹은 거짓 신을 따라간 사람들은 결국 허망함을 추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이 마르다고 하여 소금물을 마시면 더욱 목마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난 12일에 있었던 환경 세미나에서 우리는 아주 의미 있는 그래프를 보았습니다. 미국인들이 느끼는 행복감이 1950년을 정점으로 해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해는 미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소비가 미덕’이라며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인 해입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일해야 했고, 일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가족이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런 시간이 사라지니 긴장과 스트레스 쌓였습니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는 생명의 진액이 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욕망을 부추기는 거짓 신들에게 놀아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성경이 말하는 거짓 신들은 기득권자들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이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해주는 존재들입니다. 애굽,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로마제국에서는 한결같이 신정정치가 행해졌습니다. 왕은 신이거나 신의 아들이라고 선포됩니다. 그렇기에 그가 하는 말은 곧 하늘의 뜻입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제국의 신들은 제국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은 그런 신들의 세계를 부정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존엄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왕이나 신관만이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 참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여 판단하시거나, 뇌물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차별하지 않는다’. 이 말이 핵심입니다. 피부색, 인종, 학벌, 재산의 유무, 미와 추가 주님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인정에 끌려 판단을 그르치지도 않으십니다. 노자 5장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천지는 치우친 사랑을 베풀지 않아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성인은 치우친 사랑을 베풀지 않아서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는 말은 하찮게 여긴다는 말이 아니라 편애를 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롬10:12) 

특별한 사람만이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열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의 든든한 반석이 되어주십니다. 주님은 또한 고아와 과부를 공정하게 재판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셔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한 마디로 말해 주님은 이 땅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어려운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시려는 일을 기꺼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화의 길입니다. 인간은 순간순간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함으로 사람다워집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 외로운 사람, 낙심한 사람, 울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질문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질문에 적절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들을 감싸주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살 때 신앙은 비로소 하나의 사건이 됩니다.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할 때 발생하는 불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순간은 없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얼마 전 교황 23세가 추기경 시절 조카딸인 엔리카에게 보낸 편지를 읽다가 이런 대목과 만났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생애를 만족하게 이끌어주셨다. 그것은 내가 오래 전부터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요모조모 따지거나 과거를 들추어내지 않기로 습관을 들였기 때문이다. 나 또한 결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침묵을 지키고 즉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용서를 베푼다. 누군가 나를 나쁘게 대하더라도 나는 선으로 대하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섭리께서 내 앞에 열어주신 길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겸손을 지니고 나아갔다. 나는 죽음과 천국에 대한 생각을 친근하게 간직하고 매일 만족하면서 살아왔다.” (피에르파올라 타칼리티 엮음, <말씀이 나의 두 손에>, 92쪽)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사는 것인지 이 편지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를 보내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다음 주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엄범부렁해진(속은 비고 겉만 부프다) 우리 마음을 모아 주님께 바쳐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의 남은 시간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다운 겸손함으로 따뜻함으로 그리고 용기로 가득 채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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