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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나만의 특별한 감사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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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특별한 감사 (눅 19:1-10)

요즘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에서 인기를 누리는 코너 중에 세 남자가 나와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감사한 일들을 코믹하게 엮어내는 <감사합니다!> 라는 코너가 인기입니다. 곤란한 상황이 역전되는 경우를 골라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를 연발하여 웃음을 자아냅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재밌더라고요. 그저 웃고 말았지만 작은 일, 하찮은 일 하나에도 감사하다는 말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많은 사람들이 흉내를 내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를 연호하는 것을 보니 큰일을 해냈다 싶습니다. 참 감사하는데 인색한 우리들을 입으로나마 감사하게 했으니 성공한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감사해야할 이유도 감사의 방법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면 이건 동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되고 말 것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라고 하는 신학자의 정리에 따르면 고대인의 불행은 숙명과 죽음의 문제에서 왔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어떤 고난도 팔자요, 숙명이요, 운명이라고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하거나 운명을 개척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대로 주어진 대로 많은 고생을 치르며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 고대인들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중세기 사람들의 불행은 죄와 벌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고난은 죄 때문에 내리는 신의 저주로 보았습니다. 오직 하나의 원인에 매달려서 그 무서운 심판 앞에서 벌벌 떨면서 흑사병이 돌아도 저주다. 전염병이 돌아도 저주다, 홍수가 나도 저주다, 이렇게 몰아치는 무서운 저주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현대인은 그 불행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생의 무의미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린 것에 그 불행이 있다는 말입니다. 배고픈 것도 아닙니다. 집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고독해 하는 것입니까? 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결정적인 이유는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감사가 없고 왜 감격이 없습니까? 이만하면 감사하고 감격할 만도 한데 뭐 때문이냐 말입니다. 그것은 끝없는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더 가지려는 마음이 저 앞서 가기 때문에 그 마음을 따라가기가 바쁜 겁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교만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어느 사이에 인간의 생각과 철학이 세속화되면서 불행으로 치닫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과 믿는 자들을 향하여 온갖 독설과 저주를 퍼부어댑니다.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기독교를 향하여 맹목적으로 욕을 하고 저주를 하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이미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린 고로 고마운 마음도 감사한 마음도 그 고마움에 따르는 행복도 없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물며 믿는 이들에게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삶이란 더 이상 인생이 아닙니다. 동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은혜를 알아야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감사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감사할 일이 한 두 가지입니까? 그 가운데 나만의 특별한 감사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합니다. 남이 할 수 없는 감사가 반드시 내게는 있습니다. 이것을 찾을 수 있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 는 자기만의 특별한 감사를 드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로마 권력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당시 정치적 상황을 잘 이용해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리의 장으로 권력자요, 요새 말로 실세입니다. 그리고 부자였습니다. 누구라도 이 사람 앞에 잘 보여야만 출세할 수도 있는 막강한 권력이 있었습니다. 

자, 이렇듯 모든 권리를 다 누리던 이 사람에게 풀 수 없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로마의 권력 밑에 붙어서 자기 권세와 자기 부를 취하면서 민족적 배신이라는 생각에 갈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한 정말 고민 중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적인 고민이었습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죄를 짓고 사는 것 같은 그런 고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삭개오] 역시 독특한 의식대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속히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평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지고 있던 차에 오늘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큰 세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만나러 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누구처럼 병 고치려고 예수를 만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려하는 생각은 좀 특별합니다. 소문에 듣기를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좋지 못한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중에 마태라는 제자가 있는데 세관에 앉아 세금을 받다가 현장에서 불러서 제자를 삼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다 천대하고 온 이스라엘이 미워하는 죄인의 대명사 자기 같은 세리를 불러서 제자를 삼았단 말인가를 생각하며 그 분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키가 지독히도 작았던 자신의 약점 때문에 도저히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체면이고 뭐고 불구하고 뽕나무로 기어 올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삭개오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이루어지는 시점입니다. 말하자면 삭개오에게 주어진 은총 적 기회,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이 중요한 시간을 삭개오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삭개오는 감격합니다. 세리의 집입니다. 누구도 상종하지 않고 거지도 세리의 돈은 받았다가도 도로 던져 버릴 정도로 더럽게 취급하는 세리의 집에 예수님이 오늘 밤 주무시겠다고 하시니 세상에 이런 고마움이 어디 있습니까? 삭개오에게는 지금 자기에게 의를 주시는 주님이 얼마나 감사한지모릅니다. 여러분, 가장 큰 사랑이 무엇입니까? 죄인이 의인 되도록 그 신분을 바꾸어 놓는 것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이것이 개인적인 자신만의 특별한 감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왜 감사합니까? 나에게 많은 물질과 풍성한 삶의 조건들을 주신 것이 추수감사절을 드리는 우리의 감사조건입니까? 그렇다면 가진 것이 없어서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일수도 있습니다. 아니 풍성함은 마땅히 감사해야할 일입니다. 그러나 정말 내가 먼저 감사해야할 조건은 이것이 아닙니다. 이 풍성한 삶 이전에 죄인이었던 나로 의인되게 하셔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심이 먼저입니다. 

즉 나만의 특별한 감사, 원초적 감사의 조건이란 나로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란 말입니다. 
오늘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감사요, 좋은 부모님 만나게 하신 것도 감사요, 오늘 내가 이만큼 성장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나만의 특별한 감사입니다. 삭개오는 바로 이 은혜의 시간에 즐거웠고,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 줄만큼 마음이 열렸습니다. 

“인생이 무상하다.”하는 것을 알면 불교인입니다.“인간의 삶에 마땅한 도리”를 알면 유교인 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은혜를 압니다. 오직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면 바로 된 그리스도인이요, 신앙인입니다. 감격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또한 그 감격이 간증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지내면서 감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무엇을 감사합니까? 또한 어떻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감사의 조건이 물질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최고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나름대로 자기만의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 있다면 그것이 곧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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