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대림절] 이 분을 소개합니다 (마 1:1)

첨부 1


이 분을 소개합니다 (마 1:1)

: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영혼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요?

1907년, 미국 매사추세츠 병원 의사인 던컨 맥두걸(Duncan MacDougall)은 영혼의 무게를 측정하였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사망에 이르게 된 6명의 환자를 사망하기 전, 사망하는 동안, 그리고 사망한 후로 나누어 몸무게를 쟀습니다. 6명 중에서 2명은 실험의 잘못으로 분석에서 제외했습니다. 4명 중에서 1명의 몸무게는 즉시 무게가 떨어져 그 후 변화가 없었습니다. 2명은 즉시 떨어졌으나 그 후 좀 더 떨어졌습니다. 마지막 1 명은 몸무게가 즉시 떨어졌다가 저절로 반전되고 후에 다시 떨어졌습니다. 그 줄어든 무게는 평균이 21g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무게는 21g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21g은 영혼의 무게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영혼의 무게가 21g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무게로 달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영혼의 무게라고 하더라도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가 고작 21g일까요?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오늘은 1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열 두 장짜리 달력으로는 아직 뒤로 한 장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달력으로는 오늘부터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올해는 12월 25일, 성탄절이 주일이기 때문에 성탄절 이전 네 주간 동안 지키는 대강절이 오늘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대강절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기쁨과 희망이 교차하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올 성탄절을 맞으며 이 대강절 기간에 자신의 영혼의 가치를 깊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근 수가 아니라 의미를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바쁘고 분주함 속에서 생각하여야 할 것을 잊고 사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하지만 이 때 다시 자신의 영혼을 깊이 살피지 못하면 또 언제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자신의 영혼을 깊이 생각하는 이번 대강절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책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어떤 책입니까? 출생을 기록한 책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 ‘계보’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서 두 개의 단어로 되었습니다. 계보의 ‘계[gevnesi"/게네시스]’는 혈통, 탄생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보[bivblo"/비블로스]’는 책을 가리킵니다. 

가족의 내력을 기록한 책은 족보입니다. 출생 계통을 기록한 책은 계보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은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 낳고… 낳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신약성서를 처음부터 읽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커다란 산입니다. 

지금까지 전혀 들어 본 일이 없는 생소한 이름을 읽는다는 것은 인내력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자칫 이것은 성경을 남의 족보 이야기로 오해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1장은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보여 주는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전체의 요약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I. 누구  

마태복은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소개합니까?

1절 말씀입니다.
: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을 직역을 하면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다윗의 자손이다’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입니다.

사람을 소개할 때 아무개의 자식이라고 하는 표현을 요즘도 쓰나요? 반드시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혼 청첩장을 낼 때입니다. 누구와 누구의 몇 째 아들 아무개와 누구와 누구의 몇 째 딸 아무개 양이 결혼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인간은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 또 누구를 만나 누군가를 낳을 존재라는 것입니다. 신랑이나 신부를 직접 몰라도 이런 소개를 통하여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셨던 일을 당시의 사람들에게 가장 잘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진리의 핵심을 전달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할 때 먼저, 기억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2장 45절 말씀입니다.
(마 2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논쟁을 벌이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주로 바리새인들이 먼저 시비를 거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것은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데로, 그리고 우리가 아는 데로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마22:42)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구약 시편 110편 1절 말씀을 인용하여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너희들이 말하는 데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 어떻게 조상이 그 후손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고 바리세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에 바리새인들 중에 한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예수님께 감히 논쟁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다윗이 그리스도께 ‘주님’이라고 부른 것을 그들은 이해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2.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보다 먼저 계셨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님’이라고,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주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조선 왕족 중에 이하응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조선 제25대 철종 임금이 왕위를 이을 자손이 없이 승하하자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릅니다. 이 분이 고종입니다.

이하응은 아들이 임금이 되자 임금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되었습니다. 바로 흥선대원군입니다. 10년 동안이나 아들을 뒤에서 섭정한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그는 임금 앞에서는 아버지가 아니라 신하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들이 임금이 되자 아버지는 그 신하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라도 임금 앞에서는 신하로써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시간상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뒤에 그들의 계통을 통하여 오셨지만 단순한 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을 훨씬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이 전혀 할 수 없는 일, 인간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경배하고, 다윗이 신발 끈도 풀어 들릴 수 없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이전 그들보다 먼저 영원부터 계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II.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창세기 12장 3절 말씀입니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아브라함(/아브람)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2-3)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게 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습니다.

1. 아브라함은 복의 통로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내세웁니다. 자신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하기는 현대 이슬람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아랍 사람들에게도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물론 서구 기독교인의 이름에도 아브라함은 많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이름 역시 아브라함입니다. ‘에이브러험 링컨’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후손이 되는 것만으로도, 그런 이름을 갖는 것만으로도 복에 한 걸음 다가선 느낌을 줍니다. 이것은 모두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기 원하는 염원에서 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통로입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영원한 복을 주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갈라디아서 3장 9절 말씀입니다.
(갈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 말씀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영원한 복의 통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셨습니다. 성경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4)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을 받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일입니다. 미국에서는 아들이 군대에 가 있는 가정은 자기 집 앞쪽 유리창에 별을 붙여두었습니다. 아들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가정은 황금색별을 붙였습니다.

어느 날 밤 한 남자가 다섯 살 난 아들과 함께 뉴욕 시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창문들을 관심 있게 보던 꼬마는 왜 어떤 집에는 창에 별이 붙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아버지는 꼬마에게 그 집은 아들이 전쟁에 나가 싸우고 있는 가정들이라고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아이는 창문에 별을 붙인 집을 볼 때마다 손뼉을 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빠, 저기 봐, 저 집도 아들을 나라에 내주었네.”

마침내 그들은 계속 이어지던 주택가가 끝나는 공터에 도달했습니다. 주택 사이로 난 빈 공간을 통하여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가 보였습니다. 그러자 이 작은 꼬마는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아빠, 저기 하늘나라 창문에 붙어 있는 별 좀 봐, 하나님도 아들을 전쟁터에 보냈나봐!”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에도 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엡2:4). 예수님의 자신의 몸을 십자가 위에 내어걸어 찢으심으로 사람들의 죄에 대한 값을 치르셨습니다. 어떤 죄가 있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자마다 구원을 얻도록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세상에 영원한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영원한 복을 전하는 통로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의미를 함께 생각하겠습니다.
  

III. 다윗의 자손  

역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하여 먼저 다윗이 어떤 인물인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8장 7절 말씀입니다.
(삼상 18: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다윗은 소년 시절, 적군 블레셋의 거인 장군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쓰러뜨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다윗은 사울왕의 휘하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이 보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지혜롭게 행하여 마침내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삼상18:5). 그 때 사람들이 부른 노래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전쟁에 나가서 무찌른 사람은 천 명이지만 다윗이 무찌른 사람은 만 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울보다 다윗이 열 배나 더 용감하다는 사실을 비교하는 숫자가 아닙니다. 다윗의 능력이 얼마나 탁월한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노래 때문에 다윗은 사울의 시기를 받고 그의 칼을 피하여 도망쳐야했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다윗이 어떤 사람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1. 다윗은 능력의 상징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오랫동안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녀야 했지만 결국은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분열되어 있는 각 지파를 하나로 묶어 강력한 하나의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국기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바로 다윗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입니다. 다윗은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고 유지하는 능력의 사람입니다.  

다윗이 능력을 상징한다면 그 자손으로 소개되는 예수님은 어떤 능력을 가지셨습니까?

요한복음 11장 25절 말씀입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친히 부활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자신이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분이시자 우리를 부활하시게 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많은 사람을 죽여서 영웅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죽여 많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2.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십니다.

사람들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그 사람은 말하며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것을 구경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마12:23)하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랄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한 눈에 다윗의 자손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두 시각장애인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마20:30)라고 소리를 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마20:23) 예수님께서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눈을 만져주셨습니다. 그들은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치유하여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게 하시는 분은 다윗의 자손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세상의 구원자로 찬송 받으신 그 이름이 바로 다윗의 자손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무한한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한 중풍 병자를 향하여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쉬운 말을 두고 어려운 말로 죄 사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 그 이름으로 모든 죄가 용서됩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마28:18).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이 분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만 이기는 능력이 아닙니다. 죽음도 이기시는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조금 이르긴 하지만 한 해의 끝자락에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의 뜻을 새기고, 다시 이 세상에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 첫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2011년을 한 달 먼저 보내는 아쉬움도 있지만 2012년을 한 달 앞서 맞는 기쁨도 있습니다. 새해 맞으면 한 해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는 것처럼, 대강절을 맞으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 자신에게 누구인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과연 나에게 누구이십니까?

땀을 뻘뻘 흘리며 앞뒤에서 수레를 끌고 밀며 언덕을 오르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앞에서 수레를 끌고 있는 사람에게 “뒤에서 밀고 있는 사람이 당신 아들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수레를 끌고 있던 사람은 “네! 제 아들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뒤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앞에서 수레를 끌고 있는 사람이 당신 아버지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말입니까? 뒤의 사람은 한 마디로 “아닙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앞의 사람은 뒤의 있는 사람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뒤의 사람은 앞에 있는 사람을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니 어찌된 영문입니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입니까?

정답은? 앞에서 수레를 끄는 사람은 뒤에서 미는 사람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에게 뒤에 있는 사람이 아들이냐고 물으니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뒤에 있는 아들에게 앞에 있는 어머니를 아버지냐고 물으니 ‘아니다’고 대답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이 예수님께 어머니가 아니고 아버지라는 정도의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복의 통로가 된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은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복을 얻습니다. 또한 능력의 상징인 다윗처럼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와 죽음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처럼 세상에 복을 전하는 축복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처럼 세상을 이기는 능력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복의 통로로, 다윗처럼 능력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