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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행 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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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행 9:1-22)

사울은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주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주의 음성을 귀로 직접 들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울의 눈을 치료하시는데 주님이 직접 하지 않으시고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사용하셨습니다. 사울의 사명을 가르쳐주시는데도 주님이 직접 가르쳐주시지 않으시고 그것 역시 아나니아를 통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주님의 대리자로 살아야 합니다.
   
15절을 보면 주님은 사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님은 사울을 그릇으로 쓰셨습니다.
   
저는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지만 전도자가 없다면 그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을 부르셔서 전도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도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앞에 복과 저주를 두셨습니다. 우리가 복을 선택하면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이고 우리가 저주를 선택하면 저주 받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신자로 바뀌는 것이고, 육신적인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기도도 하나님을 바꾸려고 하면 응답이 늦고 응답이 약합니다. 내가 변하면 응답이 빠르고 강합니다. 그래서 기도생활을 많이 하면 기도자의 모습이 변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는 변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꾸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기독교를 이단으로 생각했던 사울이 주님을 만나고서 전도자로 변화된 사건입니다.
   
사울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주의 제자들에 대해서 위협과 살기가 등등해서 대제사장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해서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임하더니 사울을 둘렀습니다. 사울이 땅에 엎드려지니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이를 자가 있느니라” 사울에게 임한 빛이 너무 강했는지 사울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환상 중에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니아야”,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라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하자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 그가 네가 들어와서 안수하는 것을 보았다”,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들으니 그가 예루살렘에서 믿는 사람들에게 많은 해를 끼쳤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아나니아는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울을 찾아가서 안수합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라고 말하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됩니다.
   
사울은 일어나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고 즉시로 각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합니다.
   
이 사건에서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오늘은 2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 주님은 사람을 변화 시키시는 분입니다. 
   
1절에 보니 사울은 믿는 자들에 대해서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나니 엄청난 변화를 경험합니다. 19절에 보니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있으며 교제를 합니다. 20절에 보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합니다. 사울은 주님을 만난 후에 변화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사람이 바뀐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할 때가 많습니다.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것 같다가도 한 순간에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 정도면 안심이다 싶었던 사람들이 육신을 따라 가면서 옛 자아로 돌아가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와 변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이유에 대해서 많이 고민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성경 안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변화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람을 변화시키는 분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두려움에서 평안으로 변화시키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마치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듯이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키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주님을 만난 후에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울은 주님을 만난 후 바울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핍박자였던 그가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났던 야곱은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육신 중심의 삶을 살았던 야곱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이스라엘로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물고기 잡는 어부였는데 주님을 만나고 나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주님을 만난 후 변화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분의 간증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두 친구가 있었는데, 한 친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3년이 지났을 때 믿지 않는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가 믿는 예수가 몇 살에 돌아가셨는지 알아?”, “몰라.”, “예수님이 설교한 것이 몇 편이나 되는지 알아?”, “몰라.”, “자네는 도대체 예수님에 대해 무얼 아는가?”, “잘 몰라. 그러나 내게 나타나는 일이 많아.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술주정꾼이었잖아. 월급을 모조리 술값으로 쓰느라 빚만 졌잖아. 또 내가 퇴근할 때가 되면 우리 가족들이 나를 피해 여기저기 숨는다고 뿔뿔이 흩어졌잖아. 내가 얼마나 나쁜 남편이었고 나쁜 아빠였는지는 자네도 알았잖아. 그러나 지금의 나는 술도 마시지 않고, 빚도 다 갚았다네. 또 내가 아내와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아내와 자식들은 내가 퇴근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네. 지금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하다네. 이것이 증거가 아니겠나.”
   
이 사람은 주님을 지식적으로는 많이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체험적으로 주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만났고 주님은 그의 영과 그의 생활을 변화시켜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인생의 방향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청소년기에 방황하던 제가 주님을 만나고 인생의 방향을 잡게 되니 제 생활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제 변화에 놀라셨는지 종례시간에 저를 일으켜 세우더니 “마경훈이 변했다. 모두 박수쳐줘라”고 하셨습니다. 담임선생님이 보기에도 같은 반 친구들이 보기에도 저는 엄청나게 변화된 사람이었습니다.
   
저의 변화는 주님과의 만남으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6월 13일에 삼각산에서 기도하다가 사도행전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밤 10시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입을 열어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방언이 터지기 시작했고, 하늘로부터 무지갯빛 십자가가 하나가 내려와서 제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던 사람들의 가슴에 불붙은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저는 마치 사도행전 2장에서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체험을 한 것처럼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그 결과 저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성령을 체험하고 변화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서 변화를 체험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주님을 만나고 변화를 경험했던 많은 사람들이 다시 과거의 생활로 돌아가 버립니다. 마치 고무줄을 잡아당겼다가 놓으면 잽싸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은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도 떠나고 주님도 떠나서 세상으로 가버리기도 합니다. 제 친구 목사님이 청년시절에 대형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 친구 목사님이 등록할 때 함께 등록했던 사람들이 27명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나니 2명이 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님에게 오지만 곧 주님을 떠나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변화를 체험한 후에 계속 교회에는 나오기는 하지만 그의 생활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신령한 생활이 아니라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변화된 것 같다가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 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잘 달리던 자동차가 계속해서 달리려면 중간 중간에 기름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고 아무리 비싼 자동차라 할지라도 기름이 떨어지면 더 이상 달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어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사라지면 영적인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떨어지면 영적으로 살고 싶어도 영적으로 살수 없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떨어지면 마귀의 유혹인줄 알면서도 이길 수 없습니다. 속으로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그만둘 능력이 없기 때문에 마귀가 끄는 대로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를 원한다면 주님을 만나십시오. 변화된 후에 지속적으로 변화된 삶을 유지하려면 지속적으로 주님을 만나십시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지만 아나니아를 통해서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것처럼 성령의 재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자동차계기판에는 유량게이지가 있습니다. 운전자는 항상 유량게이지의 위치를 확인합니다. 운전자는 기름이 떨어지기 전에 주유소에 가서 주유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자동차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자동차에 있는 유량게이지를 살피듯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내면에서 들리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더 기도해야 하는데’, ‘예배를 힘써야 하는데’, ‘교회 생활 열심히 해야 하는데’ 등등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내면의 소리에 순종해야 변화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내면에서 들리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면의 소리에 별로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설교가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기도 하고, 또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경고의 메시지를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을 만나셔서 변화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주님을 만남으로 계속해서 변화된 생활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2. 주님은 자기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자기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동안 주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을 박해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울이 주님을 박해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가 동일시의 진리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사울에게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4절에 보니 빛을 보고 땅에 엎드려진 사울에게 주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놀란 사울이 주님에게 질문합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것은 바로 주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기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동일시의 원리는 먼저 구원에 적용됩니다. 갈 2:20에 보면 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바울은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못 박혔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주님과 자신이 동일시되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 당시에 주님을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2천년이 지난 후에 주님을 믿게 될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취급하신 것입니다.
   
롬 6장에 보면 침례에 관한 진리를 말합니다. 침례를 받을 때 사람의 몸이 물속에 잠겼다가 나옵니다. 물속에 잠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속에서 나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다시 사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으면 주님은 우리들을 주님과 동일시하여 죄에 대해서는 주님과 함께 죽은 자로 의에 대해서는 주님과 함께 산 자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일시의 진리를 보여주는 말씀이 창 12장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놀라운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나님 자신을 동일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발끈하셔서 그들을 저주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나님 자신을 동일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저와 여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과 하나님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것입니다.
   
갈 3:14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는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이 우리들에게도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과 아브라함을 동일시하신 것처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을 동일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일시됨의 진리를 보여주는 말씀이 마 25장에도 나옵니다. 주님의 재림 이후에 주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십니다. 모든 민족을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함과 같이 하십니다. 오른쪽에는 양의 무리가 있고, 왼쪽에는 염소의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에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기준은 단 한 가지입니다. 주님을 돌아보았는가 돌아보지 않았는가 입니다. 주님을 돌아본 사람들은 양의 무리에 들어가고, 주님을 돌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염소의 무리에 들어갑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양의 무리들에 속한 사람들도 염소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도 주님을 직접 상대했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돌아본 것이 주님을 돌아본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를 돌아보지 않은 것이 주님을 돌아보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들과 주님 자신을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주님과 동일시의 진리를 보여주는 말씀이 마 10장에도 나옵니다. 주님은 주의 종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십니다. 마 10:40-42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가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주의 종을 영접하는 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그것이 또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주의 종과 주님을 동일시하시고 주의 종과 아버지를 동일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동일시의 진리를 깨달으면 2가지의 반응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첫째는 주 안에서 영적인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다. 주님의 공로는 나의 것이다. 나를 건드리는 것은 주님을 건드리는 것이다. 나를 대적하는 자는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나에게 잘하는 것은 주님에게 잘하는 것이다’ 좀 건방진 것 같지만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삼나무는 무려 130m까지 자랄 수 있다고 합니다. 보통 나무는 커봐야 2~30미터인데, 130미터까지 자란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삼나무가 엄청나게 크게 자라는데 비해, 뿌리는 의외로 땅속 깊이 뻗어가지 않고 얕게 뻗어간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삼나무가 그렇게 크게 자랄 수 있는 이유는 다른 나무들과 뿌리들이 서로 얽혀 강력한 그물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비바람이나 거센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130미터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삼나무 이야기가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함께 하면 할수록 믿음은 성장하고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한 걸을 더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과 연합을 잘해도 엄청난 유익을 얻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연합을 한다면 우리의 가치는 얼마나 올라가겠습니까? 또 우리의 생활에는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또 우리의 사역에는 얼마나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주님과 나는 하나입니다. 주님은 당신과 나를 동일시하십니다. 할렐루야!
   
동일시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또 하나의 반응은 내가 잘 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주님이 욕을 먹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서 주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를 통해서 주님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은 말레이시아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저희들이 사역을 했던 곳은 말레이시아의 수도인 쿠알라룸푸르 부근에 있는 닐라이라는 도시였습니다. 저는 닐라이에 있는 중국화교 중심의 성민교회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은 황00 선교사님이신데 사역을 잘하셔서 개척한지 3년 반 만에 화교 어른들이 약 20명 출석을 하고 유학생들인 다국적 젊은이들이 약 100명 출석하는 교회입니다. 저녁집회 후에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많은 젊은이들 속에 숨겨져 있던 귀신들이 정체를 드러내고 떠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성민교회 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은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았습니다. 특히 그분의 열정은 누구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뜨거웠습니다.
   
선교사님을 보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고치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여러 차례 권면을 드렸지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아쉬움은 난폭운전이었습니다. 첫날 이동하다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다행히 신호대기 후에 일어난 사고였기에 살아남았지 달리던 중이였다면 아마 그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위험했을 것입니다. 신호대기를 하고 있다가 앞 차가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출발을 해서 앞차를 박았습니다. 한국 돈으로 10만 원 정도를 보상해주고 다시 운전을 하는데도 운전버릇은 그대로였습니다. 마차 F1 경기를 방불케 하는 운전이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얼마나 무섭게 운전을 하는지 기도가 저절로 나오더군요. 며칠 동안 차를 타고 가다가 “으악”하고 비명을 지를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7명이 차를 타고 이동을 하는데 모두가 대화를 잊고 손잡이를 잡고 정면만 주시할 때가 많았습니다.
   
함께 동행 했던 다른 목사님께서 큰 사고가 날까봐서 상당히 걱정하면서 한 마디 하셨습니다. “이렇게 운전하면 자기가 욕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욕 먹일 수 있으니 자제해야 합니다” 저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이런 운전 습관을 보면서 선교사님만 욕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님이 전하는 주님이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왜 선교사님이 운전을 잘못하는데 주님이 욕을 먹습니까?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은 주님과 우리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잘 살면 부모가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녀가 잘 못살면 부모가 욕을 먹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동일시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언행심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보면서 주님을 왜곡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주님 자신과 우리를 동일시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을 만나십시오. 이미 만난 분들은 지속적으로 주님을 만나셔서 자동차가 주유를 하듯이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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