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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누구인가? (요 1: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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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요 1:19-28)


한 직장인의 고백입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인간관계의 ‘마담뚜’였던 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의 교만을 느꼈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곱씹으며 참고 또 참으면서도 내 생명이 단축됨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잘해줘도, 아무리 친절해도 감당하기에 버거워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은 나를 분명 이 곳으로 보내신 이유와 목적이 있다. 
2. 하나님은 내가 평생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기를 원하신다. 
3. 그러기 위해선 내게 옛사람을 벗는 아픔과 훈련이 필요하다. 
4. 저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5. 하나님의 관심사는 저 사람이기 전에 바로 나다. 
6. 하나님은 정말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으로 나를 연단하시고 정말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길 원하신다. 
7. 그분의 힘으로 통과하면 슬픔이 기쁨이 되고 눈물이 춤이 된다.
8. 우리의 이런 경험들을 통해 현재와 미래에 우리 주위에 있는 형제, 자매들의 생활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우리는 직장이나 사회에서 또는 가정이나 교회에서 어떤 사명을 갖고 어떤 자세로 오늘 하루를 임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힘으로 할 때는 지칩니다. 우리에게 시련을 주는 자와 함께 이기십시오. 우리가 있는 그 자리를 탓하지 마시고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변화될 우리의 모습을 기대하십니다.

“주님, 제게 주신 자리와 상황, 또 사람을 인해 불평하지 않게 하시고 만족함을 얻게 하소서.” 
내가 누구이며 왜 이 시간 이 자리에 있으며 이 일을 하고 있는지 그 본연의 뜻을 안다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때 다시 말해서 나의 정체성을 바로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진정 보람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살았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 사람들입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깨닫는 것이 하나 있어요. 그건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니까 묻고 또 물어요. 엊그제는 손자 아이들이 왔는데 제 엄마들이 손자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아파요?’ 하고 물어 보세요” 했더니 두 아이가 가까이 와서는 “할아버지 아파요?” 하고 물어요. “그래 할아버지 아파” 했더니 또 물어요. “할아버지 아파요?” “그래 아파요” 조금 있다가 다시 쫓아오더니 또 물어요. “할아버지 아파요” 아주 아이들이 재미 들렸어요. 계속해서 묻고 또 물어요. 

왜 아픈지 어디가 아픈지 얼마나 아픈지 그런 건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관심거리도 되지 않아요. 말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것도 아무런 상관이 없죠. 작은 아이들에게 무슨 논리가 있어요? 그냥 눈이 가는대로 물을 뿐이죠. 이건 뭐야? 그리고 그것을 알려주는 어머니 아버지의 말을 따라 그 말을 익혀 나가요. 대개 아이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엄마 아빠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왜 엄마라 하고 아빠라 할까요? 하지만 거기에 왜는 없어요. 

그 이유는 그 말 자체가 하나의 약속이기 때문에요. 그게 무슨 법으로 정한 겁니까? 아니에요. 법은 무슨 법? 단지 한국 사람은 당연히 아이에게 엄마, 엄마 하고 반복해서 알려주죠. 그러다 보면 아이도 당연히 그냥 엄마로 알게 되는 거고 아빠로 알게 되는 거예요. 그것도 모두가 다 엄마나 아빠가 아니죠. 자기 엄마, 아빠만이 엄마인 거고 아빠인 거예요. 나도 엄마야 해 보세요. 아이가 뭐라고 합니까? “아냐, 엄마 아냐” 하다가 나중에는 “아냐, 아냐” 하며 울기까지 하지 않아요? 

그래 말이 참으로 무섭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부터 아이에게 긍정적 자아관을 심어주는 것이 그래 중요해요. 한데 얼마나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지 몰라요. 아니 예쁘면 예쁘다고 하지 “아니 그 녀석 참 못 생겼다”고 하질 않습니까? 물론 어른들은 그게 밉다는 뜻이 아니라 예쁘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지만 아이는 그렇지가 않거든요. 그냥 믿어버려요. 그래 영국의 유명한 교육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런 말을 했죠? “아이의 마음은 백지와 같다. 

거기에 무슨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삶이 달라진다.” 하얀 종이에 무슨 색을 칠하느냐에 따라 그 종이가 빨간 종이가 되기도 하고 파란 종이가 되기도 해요.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계통의 사람들은 이상할 정도로 빨간색을 좋아해요. 광고판도 빨간색 일색이고 무슨 데모를 해도 꼭 빨간 머리띠를 둘러요. 그런데 우리네 나이든 사람들은 빨갱이 하면 공산당 이게 아주 머리에 박혀 있죠. 그리고 그 빨간 색은 핏빛으로 연상이 돼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요. 뭐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오히려 그 빨간 색이 정열을 상징하는 그런 색으로도 여겨지겠지만 하여튼 그게 말의 위력이죠. 계속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가르쳤거든요. 그래서 늘 좋은 말을 해주고 또 좋은 말을 해 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해요.

하다못해 나무도 똑같은 나무 두 그루에 물을 주면서 한 나무에는 “좋은 나무 멋진 나무 사랑한다”고 하면서 물을 주고 또 하나의 나무에는 “나쁜 나무 못생긴 나무 미워한다”고 하면서 물을 줬더니 칭찬하며 물을 준 나무는 무럭무럭 예쁘게 잘 크는데 비난하며 물을 준 나무는 시들시들 말라가더라는 거죠. 그래서 자기에게건 남에게건 항상 긍정적인 말 그리고 사랑이 가득 담긴 말을 해 주라고 하는 겁니다. 자식 정말 사랑한다면 “잘 한다 잘 한다 너는 할 수 있어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셔, 하나님이 네 길을 인도하셔. 네 인생은 참으로 멋질 거야” 그러면서 키우세요. 왜 사랑하는 자녀 잘 돼야 된다면서 기를 죽여요 죽이긴. 그래서 무슨 도움이 되는데요? 이번에도 보세요. 그냥 공부 공부 하면서 들들 볶았더니 그만 아이가 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여 버렸잖아요. 그 전날까지만 해도 아이가 제대로 공부 안한다고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를 서른 대나 때렸다지 않아요? 그래서 얻은 결과가 뭐에요? 자기는 찔려 죽고 아들은 살인범이 되고 말았으니 그게 무슨 꼴이에요.

그런데 여기 그런 사람들이 또 있네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요. 그리고는 물어요? “네가 누구냐?” 계속해서 묻고 또 물어요.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네가 그 선지자냐?”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하여간 끈질깁니다. 그래도 요한 보세요. 한 번도 성질 내지 않고 꼬박꼬박 대답을 해 줍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왜 이리도 끈질기게 묻고 또 물었던 겁니까? 물론 진짜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그보다 근본 된 속마음은 뭐냐 하면 배가 아프다는 겁니다. 
사실 그때까지 이스라엘의 전통은 모든 신앙적인 중심이 예루살렘 그것도 성전이었단 말에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이 요단강으로 몰려가더란 말입니다. 그래 이게 무슨 일인가 해서 알아봤더니 요한이라고 하는 한 사람이 그곳에 있는데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가서 그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거예요. 그래 도대체 그가 누구이고 무슨 자격으로 이 일을 하는지 좀 알아보자고 한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내되 성전 예배의 중심이 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냈던 거죠. 한 마디로 요한의 기를 좀 죽여 놓고 뭘 해도 하자는 뜻이에요. 제사장이라는 신분과 레위인이라는 자격으로 요한의 기를 좀 꺾어버리자 하는 마음도 그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런 거 보면 이 사람들의 진심은 요한이 누구냐고 하는 이걸 알자는 게 아니에요.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 전에 요한의 싹을 꺾어버리려고 하는 것 이게 이 사람들의 진짜 마음에요. 그래서 자기들이 백성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입니다.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누가 좀 잘 된다 싶으면 그 꼴을 못 보잖아요. 그래 일본 사람들이 실상 잘못된 정보를 우리들에게 심어준 말이긴 해도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말 가운데 하나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 아닙니까? 아니 사촌이 땅을 사는데 왜 배가 아파요. 오히려 기분이 좋아야죠. 사촌이 땅을 사면 내가 도울 일도 생길 거고 그러다 보면 내게 유익되는 일도 생길 텐데 배가 아플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보다 넓게 봐야 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은 크게 열고 귀와 마음은 활짝 열면 되요. 아니 같이 못살던 사람인데 어떻게 되었던 그 사람이 잘 살게 되었다면 박수를 쳐주어야 되는 것 아녜요? 그래야 나중 나도 잘 될 때 나도 박수를 받는 거죠.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그래서 마마라는 신분을 지닌 특별한 소유,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면 좀 마마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말도 그렇게 하고, 보는 사람도 다 기분 좋도록 그렇게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다른 사람을 대하고 그 어떤 말을 듣든 기분 나쁜 표정 하지 말고 그런 말을 하게 해서 미안하고 또 그런 말을 해 주어서 고맙다고 해 보세요. 그러면 나도 좋고 그런 마을 했던 사람도 오히려 더 미안해서라도 다음에는 조심하게도 되고 그러다보면 점점 더 가까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다보면 진짜 친구가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같은 말이라도 상대방을 세워주는 그런 말을 하고 이렇게 묻고 또 묻는 것도 정말 궁금해서 그리고 상대방을 그래서 더 세워주기 위해서 하는 그런 질문이 된다면 나도 좋고 너도 좋은 요즘 말로 나도 잘 되고 너도 잘 되는 소위 윈(win) - 윈(win)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상대방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더 상대방을 세워주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요한의 태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관심사 가운데 또 하나는 요한이 지금까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인가 하는 것이죠. 만약 요한이 메시야라면 자기들로서는 그 대책을 세워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왜요? 지금까지 자기들이 누려오던 기득권이 있는데 요한이 정말 메시야라면 그 기득권을 다 포기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래야 된다는 건 알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못 살던 사람이 갑자기 잘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잘 살던 사람이 갑자기 못 살게 되는 거 아닙니까? 배에 기름이 끼었는데요. 자가용만 타고 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버스를 타고 다니라고 하면 그거 쉽겠습니까? 좋은 옷만 입고 다니던 사람이 허름한 옷을 어떻게 입습니까? 보통의 마음으로는 그거 어려운 거죠. 아니 고기 음식만 먹다가 보리밥 밖에 먹을 게 없다고 한다면 그게 씹히기나 하겠습니까? 

그래서 못살던 사람이 살게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잘 살던 사람이 망해버린 꼴이라고 합니다. 기업체의 잘 나가던 부장이 하루아침에 명퇴를 당하게 되면 갑자기 막막해지는 것 아닙니까? 그래 작은 식당이라도 하나 내서 살아보려고 하지만 어디 그쪽 방면에는 초보자 아닙니까? 그리고 같잖은 사람 전과 같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사람한테도 “어서 옵셔” 하고 굽실대야 하는데 그게 쉽냔 말입니다. 

지금 요한을 찾아온 사람들의 마음이 그래요. 그래 만약 요한이 메시야라면 그리고 사람들이 그래서 따르는 것이라면 그럼 방법은 하나밖에 없네요. 나중 안나스가 “예수 한 사람이 죽어 모두가 편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던 것을 기억해 보세요. 그러니까 이들은 요한이 메시야라고 한다면 그를 섬기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요한을 없앨까를 먼저 생각할 사람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그들이 대제사장에 임명된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닌 로마 권력에 의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어떻게 하든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거죠. 그리고 신앙은 하나의 겉포장에 불과해요.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데서 기도하기를 좋아하고 잔치 자리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며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그러다 보니 장사꾼들과 결탁해서 감히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릴 수도 없는 흠 있는 소나 양들도 성전 앞에서 어엿하게 팔아먹고 또 제사장들은 눈을 감아주고는 했단 말입니다. 그만큼 돈과 권력의 맛을 아는 그들이 메시야가 왔다고 다 내려놔요? 그건 어림도 없죠. 

반면에 그런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요한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아버지가 바로 성전 안에서 분향하던 제사장이었지 않습니까? 성전 안에서 분향하다가 자기를 찾아온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 요한을 낳게 될 것을 전해 듣지를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했다가 아내가 요한을 낳기까지 10달 동안 벙어리로 지냈단 말에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왜 제사장들의 세계를 모르겠습니까? 물론 요한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지만 엉터리도 많았을 겁니다. 그걸 자라면서 귀가 아프게 듣고 눈이 빠지게 보았던 요한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자기를 찾아와서 묻는 이유를 잘 알고 있어요. 그건 그만큼 자기가 주목받고 있다는 것이요 주목받는 만큼 자기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첫마디부터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입니다. 그러니까 묻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한 대 맞는 기분이었을 겁니다. 한 마디로 맥이 빠지죠. 그래 “그러면 넌 누구냐?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다는 엘리야냐? 아니면 그 선지자냐?” 하고 계속해서 다그치죠. 사실 요한으로서는 그리스도 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실 엘리야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직접 확인하여 주시지 않습니까?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그리고 요한은 사실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참선지자는 자신을 선지자라고 하지 않죠. 예수님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고 하셨어요.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하셨고요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하셨죠.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선지자 정도가 아니라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에요. 그럼에도 요한은 자신을 향하여 네가 선지자냐 하고 물었을 때 선지자가 아니라고 대답했어요.

왜 그랬습니까? 그럼 요한이 순 거짓말을 한 겁니까? 아니에요. 그게 요한의 겸손입니다. 
“아니 도대체 그리스도도 아니다 엘리야도 아니다 선지자도 아니다 그러면 도대체 너는 누구냐?”고 물을 때 그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그저 나는 주의 일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쳐지고 사라지는 소리일 뿐이다. 소리는 그저 들려지고 사라집니다. 따로 녹음이라도 해 놓지 않는다면 잠사 후면 누구도 그런 소리가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누구도 기억할 필요가 없는 소리일 뿐이라고 합니다. 나는 소리라는 말을 듣는 것만도 과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힐 겸손입니까? 뭐 시비 거는 사람들에게 무슨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들어버리질 않습니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 거기다 대고 무슨 시비할 게 있겠어요? 

그래서 미심쩍어서 다시 한 번 쑤셔댑니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그래도 여전히 요한은 태평하게 대답을 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진짜는 자기가 아니랍니다. 내 뒤에 오실 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그분의 종노릇도 할 수 없을 만큼 미천한 존재라는 겁니다. 아니 자기가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자기가 진짜가 아니라 자기 뒤에 올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그 말 가지고 더 이상 시비할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자기 잘난 체 할 것 하나도 없어요.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그렇게 고개를 숙이면 되요. 그런데 왜 고개를 숙이지 못해요? 왜 나는 그렇게 못한다고 해요? 아직 설익었거든요. 아직 덜 여물었단 말입니다. 이삭이 여물기 전에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잖아요. 하지만 여물어가면 갈수록 어떻게 돼요? 고개를 숙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아는 사람들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자기만 잘난 줄 알고 설쳐대는 거지 갖춰진 사람은 오히려 고개를 숙입니다. 

이미 다 갖춰졌기에 저 밑바닥에 있다고 한들 그거 눈 하나 깜빡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잔치 자리에 가도 저 끝자리에 가 앉는 것이죠. 아니 남이 몰라주면 어떻고 알아주면 어떻습니까? 아내 내가 사령관이라고 해도 사회에 나와서 사복을 입고 있다면 그가 사령관인줄 누가 알겠습니까? 그를 미리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다 그냥 좀 색다른 사람 정도로밖에 더 여기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사령관인데 사령관 대접도 안 한다고 흥분할 것 하나도 없어요. 된 사람은 누가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던 신경도 안 씁니다. 왜냐하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사령관이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가 말석에 가 앉은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해도 그를 수행하는 비서는 알아요. 그러면 그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 존경하는 겁니다. 

요한이 그랬습니다. 그는 철저히 겸손으로 머리를 숙입니다. 그러니까 시비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시비하지 못하고 물러가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누구를 향해서건 먼저 고개를 숙이세요. 그러면 이윽고 하나님이 그게 다 복이 되어 돌아오게 만드시는 거예요. 
하지만 유독 남이 알아줘야만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뭐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 비난할 것도 없고요 알아주기를 원하면 알아주면 됩니다. 네가 최고라고 하십시요. 그러면 하나님이 최고가 되게 만드시든지 아니면 그가 깨달아 겸손하게 만드실 거예요. 

그건 내가 끌어안고 어쩌고저쩌고 시비할 것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시비 자체가 또한 하나님이 네 눈에 들보가 있다고 하는 그런 행동이 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상대방이 나 좀 알아달라고 하는데 그거 때문에 내가 마음에 시험이 들고 하나님과 원수가 될 일이 뭐가 있습니까? 누가 앞장서고 싶어 한다면 앞에 세워주세요. 못할게 뭐가 있겠어요? 하지만 보다 좋은 것은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낮추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을 세워주듯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세워주시는 아름다운 역사가 우리 모두의 삶에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제주시에서 오랫동안 병원을 경영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육십 평생을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인 명예와 물질을 가지고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했다가 회의장 천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쳐 입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남은 여생을 뜻 깊은 곳에 바쳐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귀국한 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25년간 투자하며 사랑해왔던 병원을 팔아 영세 부락을 찾아다니며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어쩌다 한 번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병력일지를 기록해가며 한 사람 한 사람을 꾸준하게 치료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겪게 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봉사와 희생하는 일생을 꿈꾸는지도 모르지만,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실천하십시오. 깨달음을 실천할 때 비로소 여러분은 사회에 덕을 끼치는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초에 계획하고 아직도 못한 일은 없습니까?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라고 약 1:23은 말씀합니다.
무엇이 참된 겸손입니까? 먼저 자신을 바로 아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 이걸 바로 알면 그래서 내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던가를 알면 누가 나를 향해 무슨 시비를 하던 그것 때문에 기분 나쁠 일이 하나도 없죠. 우리 모두는 사실 죄 가운데 죽어 멸망당할 죄인들이었지 않나요? 한 마디로 사형수들이었는데 사형수가 잘 나면 얼마나 잘 났고 못 나면 얼마나 못 났단 말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사면된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자유로우나 우리 본질은 죽을 죄인이죠. 그러니까 누가 크냐 누가 높으냐 우리 그런 거 따지지 말아요. 그냥 다 같이 서로를 섬기고 서로 대접하고 함께 사랑하고 그냥 일한다는 것이 좋고 여기 있는 것이 좋고 너와 알게 된 것이 좋고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좋고 모든 것을 다 그렇게 좋게 생각하세요. 좀 아프면 어때요? 우리 가운데 치매 환자는 없지 않나요? 그럼 좀 아파도 우리 생각은 다 할 수 있잖아요. 그래 아파도 좋다 왜? 기도할 수 있으니까. 아파도 전화는 할 수 있으니까. 

그래 서로를 위해 기도도 해주고 수시로 서로 전화도 해서 보고 싶다 그립다 나는 당신이 정말 좋다. 정말 보고 싶다 그냥 이렇게 전화로 이야기만 해도 기분 좋다 이런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다 보면 내 몸도 좋아지고 하나님 나라도 세워지고 기분도 좋고 다시 만날 날이 기다려지고 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정말 행복해지는 겁니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나는 누구인가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나를 바로 세우고 정말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서로 서로 섬기며 아름다운 나누며 살아가는 향남교회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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