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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과거에 대한 생각 (롬 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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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대한 생각  (롬 6:20-23)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게 될 로마서 6:20-21절 말씀역시 6:1절과 6:15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6:1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6:15절은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합니다. 

성도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입니다. 

성도는 법동에서 은혜 동으로 이사 온 사람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이 다시 죄의 울타리 안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죄 문제를 해결 받기전의 삶의 문제 그리고 곧 과거의 문제입니다. 오늘이라는 날 들 속에 오늘이라는 사건들 속에 삶을 엮어가고 계신 성도님들이여 여러분의 옛날은 어떠하셨습니까? 

지금 말씀드린 옛날은 시간적 개념보다는 구원받기 전 예수를 만나기전의 삶에 대해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변화를 겪은 사람들인데 여러분의 이전은 어떠했냐는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날들을 살아가면서 여러분 개인적으로 여러분의 과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이라는 날들을 살아가면서 여러분 개인적으로 여러분의 미래는 어떠할 것이라 기대하십니까? 

사람들은 과거의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옛날에는 하며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군대의 이야기 월남전 참전이야기 어려웠을 때의 이야기 아이날 때의 이야기들을 말입니다. 한때는 잘 나갔던 시절 이야기도 합니다. 외국의 이민자들 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에 날 나가지 않았던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과거의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을 포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과거의 이야기를 하며 오늘에 옷을 입혀보지만 더 이상 과거의 나는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놀랍게도 과거가 아니라 오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오늘을 중심으로 이야기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며 주님의 초청에 적어도 아멘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 중에 하나는 과거는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순간 그가 간음한 여인이었던지 남편을 다섯이나 바꾼 여인이었던지 세리로서 남을 등치며 살았던 사람이었던지 주님 앞에 서는 순간은 그 모든 것은 아무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배반하고 고기 잡으로 간 제자들에게 지나간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상대적으로 마귀의 시간표는 과거입니다. 과거를 가지고 메이게 합니다. 과거를 가지고 행복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이라는 사건들 속에서 시간들 속에서 예수님의 원리는 언제나 해답을 미래에서 찾습니다. 

요9:1절의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봅니다. 

제자들의 길은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했을 때 예수님의 답변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였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해답을 미래에서 찾습니다. 왜 어렵습니까? 복 주시려고 하며 이런 식으로 미래에 촛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마귀에게는요? 왜 힘듭니까? 그때 결혼을 잘 못해서...그때 학교를 잘 못 선택에서...하며 과거에 매이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혜는 언제나 해답을 미래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메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에게는 과거가 문제가 안 됩니다. 주님에게 오는 순간 다른 사람의 과거도 문제 삼으면 안 됩니다. 탕자의 형은 동생의 과거의 문제에 메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집안일 힘들고 자신도 안 행복하고 초대받지 못한 아들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교회공동체 속에서 주의할 것이 있다면 누군가의 과거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의 고난을 함부러 말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의 과거는 어떠합니까? 오늘은 그 과거에서 한 번 더 자유 하는 축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20절의 말씀을 읽어봅시다. 너희가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합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었을 때에 예수님을 만나기전이나 의의종이 되기 전에 우리 모두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에 마귀도 시험합니다. 높은 산꼭대기에 세워 천하만국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절하라 합니다. 그리하면 주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단에게 절하고서라도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으려 합니다. 마귀는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옛날의 모습니다.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여기서 몇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하나는 예수 믿고서가 더 자유스럽습니까? 아니면 예수 믿기 전이 더 자유합니까? 사람들은 예수 믿기 전 훨씬 더 자유로웠던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기 전 훨씬 더 자유로웠던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기 전에는 요? 이사도 마음대로 못가고 결혼식 날도 마음대로 못 잡고 우리는 이렇게 또 다른 노예로 살았었음을 모릅니다. 

이것은 자유인 것 같지만 자유가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성질대로 살았던 때 내 욕심대로 살던 때 자유로웠던 것 같지만 자유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모르는 자유는 자유가 아닙니다. 북한 김정일 밑에 백성들을 보십시요 자신들이 최고로 행복한 줄 압니다. 

김정일의 배려로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이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그때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이때는 예수 안 믿어도 죄인 줄 몰랐습니다. 이 때는 술을 마셔도 놀음을 해도 부끄러운 줄 몰랐습니다. 이때는 안 믿어도 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주일을 어겨도 그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죄의 종이요 사단에게 속해 있을 때의 마음입니다. 

이제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주일을 지켜야하고 예배하고 봉사해야하고 십일조도 해야 하고 사랑과 용서도 해야 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면 왠지 모를 불안함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별 느낌이 없거나 부담스럽지 않다면 사실 자신의 신앙을 검토해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요8: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니 그 말씀 안에 살 때 예수 안에 살 때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13장의 진정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입니다. 나만 좋으면 나만 기쁘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렇게 진정한 자유는 더 예수 안으로 말씀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한한 은혜를 아는 사람은 그 예수 안에 더 메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삶을 살아보십시오. 말씀안의 삶을 살아보십시오. 탕자가 아버지 곁을 떠나 본 뒤에야 울타리안의 행복을 압니다. 

그럼에도 혹시 여러분의 마음에 의에 대하여 자유 했을 때의 그리움이 있습니까? 

그래도 옛날이 좋았어 입니까? 사실 그것은 옛날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데에는 명수입니다. 사실, 과거에 좋았지 않기 때문에 실패와 상실감이 깊어 이렇게 예수 안으로 온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이 40년 광야 내내 그들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과거 애굽의 그리움이었습니다. 우리가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 있을 때 사실은 고기를 먹지도 못했지만 그냥 그때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민11:5절을 보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절은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합니다. 이들 말대로 값없이 먹었나요? 노예의 신분으로 메인바 된 그들에게 주어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노예로서의 대가인 것을 모른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만나의 은혜보다 옛날의 마늘 먹던 시절이 더 커 보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먹어도 노예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아무리 좋았어도 사단의 노예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과거에 좋았던 추억이 있습니까? 

21절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희가 그때에 모든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너희가 그때에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서 자유 할 때 얻은 열매는 무엇인가? 다 죄뿐입니다. 그 열매는 죄인 것입니다. 그때의 모습을 볼까요? 1:28-32절과 3:12-18을 읽어봅시다. 

두려움이 없다고 형을 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때에 죄의 종 의에 대하여 자유했을 때의 열매가 없다면 먹지 못할 열매는 열매가 아닌 것입니다. 

그때에 무슨 열매를 맺었느뇨. 

마귀는 과거를 포장하는데 있어서 선수입니다. 

마귀에게 속지 마십시오. 그리고 과거의 방법에 속지마십시오. 

오늘의 문제를 과거에서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인생을 보십시오. 다시 담배한대 피면 속이 확 풀리는 것 같음에 속지마십시오. 옛 삶의 원리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돌아가 보아도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12제자중의 한명인 유다도 초대교회 집사 중 한명인 니골라도 자기 갈 길로 갔습니다. 은혜안에 살 사람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죄에 대하여 자유 한 후에 달라진 삶의 모습입니다.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그 때를 회상해 보면 모든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의에 대하여 자유했던 삶이 수치스러울 정도로 부끄럽습니다. 바울은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배설물로 여긴다라고 할 정도입니다. 술먹고 비틀거리는 인간들이나 공항에 유리박스안에서 담배한대 필려고 그리고 한꺼번에 피울려고 몇대를 더 피우는 모습을 보면 모든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 부끄러울까요? 그 마지막이 사망입니다. 죽는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니 사망을 모르고 사망을 모르니 과거가 좋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정말 은혜를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보십시오. 과거의 모든 일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과거가 부끄럽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참 미련합니다. 어제 결혼식 주례문제로 서울에 다녀오다가 과천의 경마장 곁 도로를 내려오는데 차들이 가득히 들어 서 있는 것을 보고 결국은 망하는 일인데 왜 저렇게 목을 매는지 불쌍했습니다. 마지막이 뻔한데 빠져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진리만이 나를 자유케 합니다. 이 모든 것에서 예수만이 나를 자유케 합니다. 예수님안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과거는 어떠했습니까? 

과거를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적어도 과거의 문제로부터 해결 받은 사람들입니다. 과거를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포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사망의 삶이었고 사망의 나무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묻어버리는 것입니다. 분토와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은 과거보다 오늘이 중요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일 중요합니다. 오늘이 좋은 사람은 과거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에 대해 더 말할 것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기대가 없는 오늘은 무덤과 같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과거보다 오늘이 더 좋다 해야 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을 것이다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입니다.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과거보다는 미래에서 해답을 찾은 삶으로 익어야 합니다. 과거를 자랑스러운 듯 이야기 한다면 아직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간증할 때 과거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죄송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만 높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과거는 정리 되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는 의의 종입니다. 진리안에 그리스도안에 매여 사십시오. 구원받은 성도는 아버지의 울타리안에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에 매이십시오. 직분에서나 사명에서도 매이십시오. 교사나 성가대에서도 매이십시오. 여기에 매이는 것이 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사는 비결이기때문입니다. 나를 지켜나가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자주 옛날을 가려고 한다면 문제입니다. 편하게 믿으려 하지도 마십시오. 진리에 매이면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교회에 매이십시오. 매일 와야 할 사람으로 말입니다. 

여러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여러분이 잘 알 것입니다. 조금 여유를 주면 엉뚱한데 마음을 두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그런 여러분은 놓아버리지 않고 포기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과거에 대한 생각에서 자유하시고 오늘과 내일을 향한 믿음의 전진이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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