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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마 19: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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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마 19:16-22)

어는 시골교회에 목사님이 강단에서 설교를 할 때면 습관적으로 조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연세가 많아서도 찬송을 부를 때는 잘 부르시다가도 설교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좁니다. 어느 주일날, 설교를 하다가 목사님이 갑자기 “천국 가고 싶은 사람은 다 일어서 보세요.”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일어섰습니다. 하지만 그 장로님은 졸다가 그 소리를 놓치고 일어서지를 못했습니다. 눈을 떠보니 다들 일어서 있어서 잠결에“다들 일어서서 뭐하고 있는 거요?”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천국갈사람 일어서라고 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장로님이 그때서야 일어서려고 했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뒤였습니다. 장로님이 창피를 당했습니다. 그러면 다음 주일에라도 졸지 않았어야 되는데 밀려오는 잠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또 졸고 말았습니다. 

한참 설교를 하던 목사님이 이번에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지옥 가고 싶은 사람 다 일어서 보세요.” 장로님이 졸다가 앞 이야기 놓치고 뒷이야기만 듣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둘러보니 아무도 일어서지 않고 혼자만 서 있고 모든 성도들이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장로님이 목사님을 바라보자 목사님이 “지옥갈사람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때야 사태를 파악한 장로님이 무안해 하시더니 앉으면서 강단에 서 있는 목사님을 바라보며 한 마디 합니다. “나 혼자 서 있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구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끔씩은 자신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마치 조는 것처럼 깜빡하면서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지나와서 생각해 보면 지금의 실패가 이미 오래전 내가 깜빡 했던 그 때에 잘못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잘못 되었어도 그 때는 잘못 된 줄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과정이 잘못 되면 결과도 잘못 된다는 진리를 잘 알면서도 순간순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인생에 결정적인 사건을 만나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제야 지나간 날을 후회합니다만 그때는 항상 늦었습니다. 

뒤늦게 세상을 원망해 보면서 그것으로 잃어버린 나를 찾으려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무너진 뒤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늘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온전한 나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덱거]가 말하기를 “사람이란 물질에 대한 고민과 사람에 대한 고민과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 이 세 가지 때문에 괴로워한다.” 고 했습니다. 돈을 벌려고 고민하고, 그것이 성공하면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려고 고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공하면 마지막으로 자신에 대하여 여러 가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마지막 고민에 이르러서는 그 누구도 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번째의 고민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이 해결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정리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한 고민을 어디에서 풀고 있습니까? 인생의 해답을 어디에서 찾고 있느냐 말입니다. 특별히 영생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하기나 하십니까? 내 신앙의 문제, 내 믿음생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생각이나 하며 사십니까? 오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한 청년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청년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 하는 세상 것들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똑똑한 이성도 가졌고, 적당히 자랑할 만한 지식도 소유했고, 무엇보다도 어디에서나 통한다는 돈도 꽤 많이 가진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엘리트처럼 살았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가지고 어디에든, 언제든지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에든지 자신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자신에 대해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 속에 살아 온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앞에 자랑스럽게 하는 말로 봐서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혹은 정치적으로나, 심지어는 종교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자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충만한 자신감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충실한 삶에 대해서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라온 환경이 그렇고, 배워 온 과정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도 이 정도로 자신 있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정도로 부러운 자기고백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자신 있던 그의 가치관과 인생관, 삶의 목적과 신앙관이 예수님을 만난 후 산산이 부서져 버립니다. 적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은 자신 있다고 자부했고, 자신의 삶을 다 안다고 여겼건만 그래서 자기가 먼저 예수님을 찾아가서 당당하게 물었건만 돌아 온 대답 앞에 이렇게 비참해 질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자신을 이렇게 모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을 잘 보십시오. 다 안다고 했으나 결정적으로 자신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깨어진 자신의 가치관과 신앙관 앞에 비참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 근심의 의미와 결국이 무엇이겠습니까? 

자, 오늘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외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는 것입니다. 정말 알아야 할 것을 모른 채 거저 자신만만하게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감으로 오늘 예수님 앞에 와서 한다는 질문이“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쭉 해오면서 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으로부터 듣고 싶은 대답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마도“그래 너 정도면 충분히 영생을 얻을만한 믿음이다.”라는 인정을 받고 싶고, 확인을 받고 싶었겠지요. 그런데 오늘 이 젊은이의 질문을 잘 생각해 보면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행위에 대한 질문, 다시 말하면 율법적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에 대한 질문이 아니고 행위에 대한 질문이요, 율법적 질문입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은혜에 대한 질문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율법을 지키고 자기 나름대로 바로 살아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럴 수는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을 해왔고, 얼마나 성실히 신앙생활을 해서 직책도 감당했고, 거쳐야 할 것 다 거치면서 직분도 받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정도면 인정받은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과 같은 말씀이 눅18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이 사람에게 지적하는 것이 있습니다. 눅18:22절에 보면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아직도”라는 말에는 이루지 못한 것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가지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한 가지”라는 말은 영어로<another>이 아니라 <the one>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다 가졌고, 다 해 봤다고 큰 소리 치는 너에게 아직도 유일한 한 가지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반드시 해결해야 할 그 한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다 알고, 다 해봤다고 해도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율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적 차원에서 나의 부족을 먼저 볼 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율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식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논리로 하는 것은 더 더욱이 아닙니다. 은혜로 해야 합니다. 은혜로 신앙생활을 해야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은혜로 할 때 아깝지 않은 정직한 십일조를 할 수 있습니다. 은혜로 하지 않는 신앙생활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네가 다 했다고 생각하고 다 가졌다고 큰 소리 치지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 너 그것을 생각해 봤느냐?” 이걸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바람이 있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그 청년이, 오늘 우리가 온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 그 청년은 예수님의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 가버렸지만 우리들은 달라야하겠습니다. 온전하고자하는 열정도 있어야하겠고, 온전하고자 하는 방법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나무라며 삽니다. 모두가 나만큼만 믿으라고 자신하며 자신의 신앙을 우월하게 생각합니다. 자기에게 부족한 그 한 가지를 생각하지 못하면서 남을 향해서 쉽게 비판하곤 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의 신앙을 자평할 때 열 가지 잘 하는 것보다 정말 한 가지 못하는 것, 결정적으로 안 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생각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문제입니다. 열 가지 잘 하는 것을 내세우고 싶고, 그것으로 내 믿음생활을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또 스스로 그 정도면 됐다고 만족하고 싶어 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그 한 가지가 없어서 안 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한 가지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이나 하십니까? 인식이나 하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다 부자일 수는 없고, 똑 같은 문제를 안고 살지는 않습니다. 오늘 이 청년에게 있어서 문제가 단지 재물이 많았다는 것일 뿐이지 여러분 각자에게 또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방법이 빗나간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이런 길을 계속가면 더한 허망에 빠질 뿐입니다. 멈추고 영생 위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정말 부족한 한 가지를 채우는 심정으로써만 영생을 이해할 수 있고, 영생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결단해야 할 부족한 한 가지를 찾고 주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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