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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헤의나라, 천국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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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헤의나라, 천국 (마 20:1-16)
 
성경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천국입니다. 천국은 실제로 있습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는 말씀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였습니다. 왜냐면 그 분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없는 천국을 선포하셨겠습니까? 천국은 환상과 상상의 낙원이 아닙니다.  천국은 실제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마태복음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천국입니다. 마태복음은 ‘사건과 설교’ 의 모음으로 크게 5부분으로 되어있는데  첫 번째 부분 (3장~7장) ‘세례요한 및 공생에 초기사역’ 에서 산상설교 의 첫 마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입니다.   

두 번째 부분 (8장~11장) ‘제자의 삶, 선교와 순교’ 에서는 제자들을 세워, 주님 가셔야 되는 곳에 대신 보내면서 하신 말씀에는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라’(마 10:7)고  하셨습니다.   

3번째 부분 (12~13장) ‘예수와 세례요한의 운명’ 인데, 13장에는 천국에 관한 7가지 비유가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예 마13장을 ‘천국 비유장’ 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4번 째 부분 (14~17장) ‘예수와 세상 지도자들의 대립’ 에서는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절)    

5번째 부분 (18~23장) ‘각종 논쟁과 수난예언’ 에서는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24;2절) 하시면서 천국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마태복음은 천국복음입니다. 
 
오늘 포도원 비유도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말씀처럼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집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해하면 천국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득하면 천국에 대한 지식이 가득하게 됩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현대교회에서 천국은 잃어버린 단어가 되었고 별로 소중하지 않은 개념이 되어 버렸습니다.  현대교인들은 천국을 죽기 직전의 노인들이나 사모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활동적인 신앙인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세상에 적극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되는 소망을 품게 되는 것이 가장 먼저입니다. 
  
초대교회는 교회 역사상 세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교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들이 세상을 진동시켰다고 기록하고 있고, 사실 세상에 혁명을 일으켰고 실제로 세상을 바꾼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초대교회 교인들의 최고의 갈망은 예수님의 재림, 즉 천국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그들은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진동시키고 세상에 큰 영향력 미친 초대교회 교인들이 가진 것은 세상에 대한 활동력, 비전이 아니라 천국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이러한 갈망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감수하게 했고 유무상통의 나누는 삶을 가지게 했으며 헌신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강력한 힘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천국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 땅에 가장 큰 영향력 미치는 사람이 됩니다. 교회가 무능해지고 나 자신이 무능해지는 지름길이 천국에 대한 갈망이 없을 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천국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시고, 이 땅에 천국을 더 확장시켜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큰 행사를 하면 행운권 추첨이 합니다. 이 행운권 추첨에는 사람의 본성을 잘 보여주는 교훈이 2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 이름이 불리워지면 좋겠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당첨을 바라지 않습니까?  저도 몇 번이나 내 번호를 봅니다. 어떤 때는 먼저 간 사람들의 표까지 가져다가 놓습니다.  사실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선택되었다는 것’ 이 기분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택되었다는 좋은 기분도 잠시입니다.  

다른 교우가 나보다 더 좋은 것을 받는 것을 보면... 표정 관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또 다른 마음,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특별한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 입니다. ‘내가 선택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한 대접을 받고 싶다’ 이 두 가지는 사실 같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나쁜 마음이 아닙니다.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 밤에 잠을 줄여가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 심지어 여자들이 밥을 굶어가면서 날씬해지려고 하는 것... 다 ‘내가 선택되어 지고 싶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한 대접을 받고 싶다’ 이 마음이 있어서 그런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여러분, 오늘 성경 포도원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이 사실을 본문의 포도원 비유가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나라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열악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 은 노동자 하루 일당, 즉 한 가족의 하루 생활비입니다. 마땅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벌기 위한 품꾼이 되기 위해 시장에 사람이 가득하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 에 인력시장에 나왔습니다.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정하고 몇 명의 품꾼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포도원에 들어간 이는 많은 구직자들 중에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선택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러니 선택된 이들은 ‘아싸, 오늘 일당 번다’ 하면서 기뻐하며 일터로 가지만, 남아 있는 이들의 얼굴은 점점 초조해집니다. 사람보다 일이 많을 때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일자리만 준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인은 ‘제 삼시’(=아침 9시)에 또 인력시장에 나갔습니다.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품삯은 내가 알아서 줄 테니 너희들도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말합니다.  ‘제 육시와 제구시’ (=12시, 오후 3시) 에도 시장에서 놀고 있는 몇 명에게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포도원 주인은 ‘제 십일시’(=오후 5시) 에도 시장에서 놀고 있는 품꾼들을 불러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사실 인력시장에서는 아침 6시 넘어서 일이 없으면 그날은 공치는 날입니다.  그 시간에는 다른 사무실에 가도 일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계속 시장에 나와 봅니다.  12시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오후 3시는 이해가 안 갑니다. 이들은 3시간밖에 일하지 못합니다. 얼마나 일을 할지도 의문이고, 또 품삯을 계산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후 5시는 또 무엇입니까? 일용 근로를 해 본 사람들은 압니다. 일터 가서 작업복 입고, 장갑 끼면 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주인은 이들에게도 들어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이제 날이 저물어 품삯을 계산합니다.  나중에 온 이들부터 품삯을 주는데, 오후 5시, 오후 3시, 12시에 온 사람도 모두 다 한 데나리온씩, 온전한 하루 품삯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아침 일찍부터 일한 품꾼은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들은 섭섭했습니다.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그들은 ‘나를 특별하게 대접해 주십시오.’ 하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은 13절에서 “내가 한 데나리온 줄 것을 약속하지 않았는가?” 하십니다. 주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14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그렇습니다. 첫째, 이 사람들은 아무런 손해나 불합리한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둘째, 나중에 온 사람에게 같이 주는 것은 주인의 자비입니다. 더구나 자기의 돈이 아니라 주인의 돈입니다. 주인이 자기 돈으로 자기가 손해를 보면서 늦게 온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서 주인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주인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까? 만일 주인, 즉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해질 무렵에 선택된 품꾼이 아니라 온종일 수고한 이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불만의 원인은 품삯에 있습니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자에게 자신들과 똑같이 하루의 품삯을 주는 주인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한 대우를 받기 원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망합니다. 화를 냅니다. “장갑 끼다만 놈에게 한 데나리온 주면서 종일 수고한 나에게도 한 데나리온 줍니까? 이거 너무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늦게 온 사람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 견딜 수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잘 들어보십시오. 인간은 누구나 잘난 맛에 삽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본능(本能)입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좀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 되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배가 무지 아픕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났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하물며 자기가 더 오래, 더 많이 일했으니 얼마나 당당하겠습니까? 

  ** 주인은 생명에 집중하는 분입니다.  
 
왜 주인이 왜 자꾸 시장에 나가서 사람을 부를까요? 왜 늦게 온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이라는 품삯을 줍니까? 돈이 넘쳐서 자랑하고 낭비하는 사람인가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이들이 한 데나리온을 가지지 않으면 생계가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은 1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 받았습니다.  왜 그렇게 주었는가? 그 돈이 그들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노동자들에게 ‘한 데나리온’ 은 일을 못해도 필요한 돈입니다. 자기 가족이 먹고 살아야 하는 생존에 필요한 돈입니다. 일을 못해서 ‘한 데나리온’을 못 받으면 온 가족이 굶어야 합니다.  맛있는 것을 사먹거나, 미래를 위해 저축할 여유 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비용입니다.  성도여러분, 천국은 어떤 곳인가요? 천국은 ‘한 데나리온’을 주는 곳입니다. 천국은 생명을 주는 곳입니다. 사람이 살아 갈 수 있도록 생명을 주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것은 일한 양(量)과는 무관합니다. 
  
이 땅을 사는 우리는 일한 만큼 주는 것에 익숙합니다. ‘사람 중심’이 아니라 ‘일 중심’의 문화입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 많이 받고, 적게 일한 사람 적게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생명에 중심을 두는 문화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생명을 위해, 일과 관계없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집에 있는 어머니가 자식이 효도하는 순서대로 밥을 주는 것 아니지요? 또 일찍 들어오는 순서에 따라 밥 주는 것도 아니지요?  이같이 천국도 일한 만큼, 성실한 만큼 주는 곳이 아닙니다. 일을 한 사람에게는 약속한 댓가를 주면서도,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살림살이를 하다보면, 교회 일을 하다보면,  생명 살리는 일을 하다 보면 형평성(衡平性)이 무너지는 경우가 반드시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평(公平)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살림살이 하는 어머니는 미운 자식에게 떡 하나 더 주지 않습니까? 교회가 신앙이 어린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까? 이것이 어머니 마음이요, 천국의 모습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라고 묻자 "품꾼으로 쓸자가 없나이다" 라고 대답하지 않습니까? 놀고 있는 이유가 무능하고 쓸모가 없어서가 아니라, 부르는 자가 없어 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을 해야 하는데, 진짜 일을 해서 가정에 들고 가야 하는데..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종일토록 놀고 있는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포도원 주인이 ‘너희도 포도원으로 들어가라’ 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과 형평에 안 맞게 한 데나리온 주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생각이 이미 세상적입니다.  왜 우리 크리스챤들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가요? 우리가 본문의 주인의 마음을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주위에는 분명히 한 데나리온의 물질, 한 데나리온의 격려나 칭찬, 한 데나리온의 이해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무관심합니다.  

오히려 이미 이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똑똑한 사람, 공부 잘하는 사람, 말 잘 듣는 사람... 에게 자꾸 데나리온을 줍니다. 이것은 경영(經營)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일은 경영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일한 만큼이 아닌, 필요한 만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데나리온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가요? 모자란 아이, 부족한 아이, 고아와 과부 아닌가요? 
  
** 우리는 주인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14절에서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은 다 내 뜻이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을 16절에서 하십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즉 우리가 우리 생각대로,   능력에 맞는 보상과, 능력에 맞는 대가만을 요구하는 삶을 계속 살면... 나중 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마태 19장 27절에서 베드로는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27절)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헌신하였고 예수님 따르기 위해 가진 것 모두 다 버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 희생하고 충성 다했으니 대가가 있겠죠? 라고 기대를 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오늘 본문 16절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절)고 말하십니다.  "베드로야! 헌신한 만큼, 능력만큼 요구하는 순간 나중 되며 꼴찌되느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만일 내 기도만큼, 내 헌신만큼 요구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 아닌가요? 죄인이 받을 것은 고통은 죽음과 사망뿐이며, 지옥밖에 갈 곳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헌신을 하였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으려는 욕심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내 능력, 내 노력만큼 보상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상의 나라" 가 아닌 "은혜의 나라"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는 하나님 선물’ 입니다. ‘나는 자격이 있습니다. 나는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러시면 안 되지요’  생각하는 순간 천국에서 멀어지고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고 ‘나중 되는 사람’ 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에 대한 폭행자였으며 믿는 성도를 수없이 죽인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바울을 변화시켰습니다. 바울의 능력은 그를 복음의 폭행자로 만들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를 전도자가 되게 하였고, 바울의 지식은 그를 교만하게 만들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분명히 아는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합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크기로 나에게 갚으십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며 오로지 은혜만을 구하겠다는 자세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이것 가지고 세상에 나갈 때 세상 뒤집을 수 있습니다. 생명에 집중하고 은혜에 집중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고후 4: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는 질그릇입니다. 흙입니다. 먼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잘났다고 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질그릇이 잘나면 얼마나 잘났습니까?  그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담았는가가 중요합니다. 똥을 담으면 똥바가지요, 귀금속을 담으면 보석함이 됩니다.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냄새도 다릅니다. 욕심, 질투, 미움, 분노 등을 담으면 비린내가 납니다. 복음, 기도, 말씀, 섬김, 빛과 소금의 삶을 담으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의 질그릇에 보배를 담읍시다.  어차피 질그릇입니다.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보배를 담아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꼭 배워야 하고,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비교 하는 것’ 입니다. 성도여러분, 주인은 선한 분이십니다. 주인은 편애하시거나 약속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다 자신의 품삯을 받았고, 자비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인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주인을 원망하는 사람은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선택해주고, 약속대로 품삯을 준 주인, 그리고 부족한 사람에게 더 주고, 자격 없는 사람에게 더 주는 주인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준 것은 임금이 아니고 선물입니다. 보수가 아니고 은혜입니다.  은혜는 받는 이에게는 값없는 것이지만 주는 이에게는 전 소유가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예수님이 대신 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은 주님의 전부를 바친 십자가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안 보고, 다른 사람을 보고 ‘비교’를 하기시작하면... 이기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면서도 이웃에 대해서는 은혜 없는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 개의 저울을 가지고 다닙니다. 나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아주 엄격한 저울입니다. 내가 하면 괜찮고 다른 사람이 하면 죽일 놈, 내가 하면 장난이고 다른 사람이 하면 몹쓸 짓입니다. 내 아이가 남의 집 아이를 때리면 내 아이는 장군감이고  남의 집 아이가 내 아이를 때리면 그 놈은 깡패 될 놈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은혜를 잊어버린 모습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못난 자식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것이 아비의 마음이요, 천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다 이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집에 들어오지 않으려 하면서 밖에서 아버지를 원망하는 큰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넉넉한 사랑을 원망하는 못난 불효자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비교의식이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의 상은 다 노력으로 받고, 비교로 받는 것입니다. 큰 효도하는 사람이 효자상을 받고,  도둑이나 강도를 잡으면 용감한 시민 상을 받습니다. 수출 상은 남보다 더 많이 수출을 하면 받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상은 어떤 불변의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비교해서 상을 주는 것이요,  또한 좀 부족해도 사람들이 본받게 하려고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상은 어떠한가요? 영원한 생명, 영원한 면류관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은 세상과 전혀 다릅니다. 

성도여러분,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나 이단들이 주는 상은 다 노력의 상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은혜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상이 아닙니다.  자격이 없는 여러분,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여러분, 여러분은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그냥 받으셨습니다.   포도원의 비유는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다 ‘다섯 시’ (=11시)에 온 행운아들입니다.  거의 한 일이 없이, 끝날 때 와서 일 좀 하려다가 한 데나리온 씩을 다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이것이 천국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한 데나리온은 우리의 구원을 비유한 것입니다.  오후 다섯 시에 온 일꾼처럼 우리는 일한 것도 없이 구원이요, 천국이라는 삯을 받았습니다. 신자는 한 것 없이 품삯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비교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자녀들입니다. 지문이 다르듯이 우리는 각자가 다릅니다. 남의 떡 보고 내 떡이 작다고 불평하지 맙시다. 상대평가에 멍들지 맙시다. 모두가 다 하나님이 받으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천국은 은혜의 나라입니다. 우리를 통해 천국이 더 확장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천국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합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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