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의 실천 (마 22:34-40)

첨부 1


사랑의 실천 (마 22:34-40)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신·구약성경의 핵심은 곧 '사랑'입니다. 오늘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사랑의 실천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시험하는 차원으로 묻습니다.

어느 계명이 큽니까? (36) 

유대의 바리새인들은 십계명의 글자수 613자에 따라 구약성경의 계명을 613가지로 정리하고 사람 몸의 지체수에 따라 248조의 적극적 계명과 일년의 날수에 따라 365조의 소극적 계명으로 분류하고 613가지 계명의 경중에 대한 변론이 대단했습니다. 시 15 2∼5, 사 33:15, 미 6:7, 암 5:4, 합 2:4은 그 변론의 근거가 되었는데 이제 바리새인들은 그 숙제를 가지고 예수님의 율법지식을 시험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놀랍도록 명쾌하게 정리해 주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37) 

율법을 잘 지켜보려고 각별한 노력을 한 바리새인들 특별히 유식한 서기관들, 랍비들이 모든 지혜를 모아도 논란만 계속되던 문제를 예수님도 즉석에서 명쾌히 정리하여 그들의 입을 막고 시험하려는 악한 생각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는 신 6:5의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의 인용입니다. 

또 병행구절인 막 12:30과 눅 10:27에는 "힘을 다하여"가 더 있습니다. '마음'은 정서와 의지로 인격을, '목숨'(성품)은 혼으로 생명을, '뜻'은 지성의 좌소로 성향·태도로, '힘'은 활동력으로 생각하며 결국 전 인격을 다 기우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곧 전 인격을 다하여 전심전력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구원 받은 자의 본분이요 마땅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것의 기초이며 원동력이므로 모든 율법의 첫째요, 최대의 계명입니다. 예수님의 분명한 정리는 바리새인들을 놀라게 했고 우리들 신앙의 표준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39) 

이웃사랑도 하나님 사랑과 같이 전심전력하여 사랑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레위기 19:18의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의 인용입니다. 이웃사랑의 방법으로 레 19:17∼19에는 소극적으로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 말고, 이웃이 죄를 당치 않도록 책선(責善)하고, 원수 갚지 말고, 원망 말고,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 사랑의 방법에서 39절에 "둘째는 그와 같으니" 했으니 하나님 사랑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에 근거해야 하고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열매 맺어야 함을 요일 4:11, 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와같이 내 몸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가능한데 예수님께서는 요13 : 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서로 사랑'은 다함이 없고 오직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부족하나마 노력할 뿐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모든 성경의 완성이므로 성경은 계속 강조하면서 벧전 1:22절에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하시며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까지 하셨습니다. 

사랑은 여러 종류가 있으나 기독교의 핵심인 참된 사랑, 곧 '아가페'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7-8)

1. 낭비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예를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 중에서 탕자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난 둘째아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좀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둘째아들보다는 맏아들을 정말 탕자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둘째아들은 지혜가 부족해서 아버지를 버리고 세상으로 나가 방탕한 자식이 되었지만 맏아들은 아버지를 모시고 집안에 있으면서도 사랑이 부족해서 불효한 자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둘째아들을 육신적인 의미에서 탕자라 한다면, 맏아들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탕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맏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사랑으로 섬긴 것이 아니라 장차 어느 날 아버지가 늙어서 세상을 떠날 때에는 자기에게 막대한 재산을 남겨 줄 지주로서 타산적인 견지에서 아버지를 섬겨온 것입니다. 

둘째아들은 육신적으로 아버지를 떠나 먼 거리에 가있었으나 맏아들은 육신적으로 한 집에 같이 살면서도 정신적으로는 먼 거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탕자의 비유 중에서 실제로는 두 사람의 탕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존 녹스 박사는 이 비유 가운데서 또 하나의 방탕한 인물을 발견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여러 가지 비유 중에서 '방탕하다'는 개념은 좀 더 광범한 범위에 적용해야 하는 단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탕자의 비유 중에도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으나 아버지는 그의 사랑을 탕진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는 자기에게 불순종하고 집을 나간 무가치 한 아들을 위해서 자기의 재산을 나누어주고 날마다 대문에 나가 그가 돌아오기를 열심으로 기다렸고, 그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순간 달려가서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으며 그를 위하여 새 신발과 가락지를 주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베풀었으니 세상에 이렇게 아들을 위해 전적으로 탕진한 아버지가 또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일한 노동자와 해질 무렵에 들어와서 잠깐 일한 노동자에게 똑같은 임금을 지불하는 방탕한 고용주 이야기, 자기에게 아무런 의무도 없는 강도 만난 낯선 행인에게 필요 이상의 보호와 친절을 베풀어준 사마리아 사람의 재산 탕진함, 길거리의 수많은 병자, 가난한 사람, 소경들을 불러다가 귀한 연회석의 자리를 채우는 방탕한 잔칫집 주인,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는 방탕한 사죄‥‥‥ 등 이 모든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낭비하는 사랑에 대한 초 상식적인 이야기들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아가페 사랑은 이와 같이 낭비하는 사랑과 한없이 소비하는 사랑입니다. 


2. 아가페 사랑이란 강제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작품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 한 젊은 왕자가 자기의 미래의 왕후가 될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려는 욕망으로 말을 타고 여기저기를 헤매었으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한 번은 큰 도시의 변두리 지역인 빈민가를 지나다가 한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하고 그 왕자는 빈민지대에 큰 애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왕자는 그 여자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강제로 결혼하는 것보다 그 여자의 사랑을 얻어서 결혼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왕자는 여러 가지 궁리 끝에 왕자의 옷을 벗어 던지고 그 여자가 살고 있는 이웃으로 이사를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이 왕자 는 생활하기 위하여 목수 일을 자기 직업으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밤낮으로 일하는 동안 이웃과 친하는 데 힘쓰고 그들의 고민과 흥미와 관심거리를 같이 이야기하고 그들과 아주 친숙해졌습니다. 

이렇게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고 그가 사랑하고 있는 여자에게까지도 자기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만큼 그 여자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을 말해 주고 있음을 즉시 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우리의 생활 속에 들어오셔서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원하시면 우리들로 하여금 억지로 사랑하고 복종하도록 명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강제로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원래 강제가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자발적인 충성과 봉사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그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아가페 사랑이란 강제하지 않는 사랑, 그렇지만 강제하는 것 이상으로 뜨겁고 열렬한 사랑에 상대방이 따라 올 수밖에 없는 사랑입니다. 


3. 아가페 사랑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8 : 1∼11에 음행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사이에 두고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함께 서 있습니다. 쌍방이 모두 이 여인을 죄인으로 본 점은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죄를 처리하는 과정은 쌍방이 다릅니다. 즉 예수님은 그 음탕한 여자에게 당장 돌을 들고 분노에 찬 눈으로 마주 선 것이 아니라 허리를 굽혀 땅에 글을 쓰고 그것도 지워 버린 후 그 여인에게 사죄를 선언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것은 곧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인데 그것은 오직 아가페 사랑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4 : 7∼11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사랑만이 죄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죄를 극복하는 힘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사랑의 홍수시대입니다. 입 가진 자마다 누구나 사랑을 부르짖습니다. 금년에 여름 홍수가 났을 때 침수지역에서 물 때문에 수많은 재산과 인명피해를 입고 어려움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침수지역에서는 물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 가운데도 또 하나의 큰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실 물이 없는 것입니다. 물이 그렇게도 많은데 정말 생명을 위한 음료수가 귀하듯 오늘날 사랑의 홍수시대이지만 진정한 아가페 사랑은 찾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이 땅 위에 사랑없이 쓸쓸하기 한없다. 어디가나 사랑없이 탄식소리뿐이라. 모든 사람 번민함은 사랑없는 연고니, 간절하게 손을 펴고 사랑 호소하도다. 먼저 믿은 사람들 주의 넓은 사랑을 보여 주지 않으면 원망 소리 듣겠네.’라는 503장 찬송처럼 참사랑을 갈망하는 호소의 소리를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사랑의 빚을 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입으로만 사랑을 외칠 것이 아니라 묵묵하게 자신을 소금처럼 녹이고 한 알의 밀알처럼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완전히 자신 전체를 바쳐 소비하는 삶을 살 때 사랑의 사도의 역할과 사명을 다할 것으로 믿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 : 13). 하나님과 예수님은 사랑이시니 그 사랑받아 삶 가운데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가장 귀한 것입니다. 

1899년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 때 양국 종교 지도자들이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사랑만이 양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다. 전쟁과 증오는 후손들에게 피와 살상을 물려줄 뿐이다." 그리하여 양국의 국경인 안데스 산맥에 대포를 녹여 예수님의 동상을 세우고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을 하나로 만드시느니라" 라고 새겼습니다. 두 나라는 100년이 지나 지금도 평화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나름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모양이 좀 다르기는 하나 많이 있습니다. 서울 성북동 대원각 음식점이 길상사(吉祥寺)로 바뀌어 개원했는데 여기에는 1,000억원 대의 땅을 조건없이 기증한 김영한 여사가 있습니다. 

2000. 6. 27 삯바느질 할머니 이순옥(88)씨가 서울대 병원에 2억원을 기증, 97년에도 10억원을 기증 했습니다. 그 외 많은 분들이 여러 모습으로 사랑을 실천함으로 이 사회가 밝아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성도들의 사랑 실천은 더욱 많고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병원, 학교, 복지기관, 봉사자). 

2000. 7. 31. 96세를 일기로 "한국 땅에 묻어주오" 유언을 남기고 소천하여 8. 9 장례되는 귀한 하나님의 종이 있습니다. 그는 1955년 목재상으로 돈을 많이 벌었고 6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한국 전쟁 고아 8명 입양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한국 고아 87,500여명을 세계 10여 개국에 입양했으며, 전 세계 20만 여명의 아이들에게 양부모를 찾아주며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고 본인은 입양아들이 보내 준 선물과 낡은 조각 이불로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봉사하다가 천국 가신 '홀트 아동복지회' 설립자 홀트 여사입니다. 

성도 여러분! 홀트 여사처럼 위대한 일은 못하더라도 할 수 있는 사랑 실천을 생각하며 실천해 봅시다. 홀트 여사도 처음엔 작게 자기 식구 1명당 1명의 고아 입양을 목표로 8명으로 시작했는데 하나님의 힘 주셔서 96세를 사는 동안 엄청난 일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40절에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곧 구약성경의 골자라고 하셨습니다. 롬 13:8, 10에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하셨습니다. 

목사, 교수, 철학, 신학, 의학 박사,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 문필가, 노벨 평화상(1952)까지 받은 슈바이처(1875∼1965)가 아프리카에서 봉사하고 있으니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여기서 생명 바쳐 일합니까?" 했습니다. 한참 생각하던 슈바이처는 "저는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킬만한 재주가 없습니다. 사랑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더군요. 그래서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려는 것 뿐입니다. 나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건강과 행복을 선물로 받았어요." 했습니다. 슈바이처는 91세까지 사랑을 실천하다가 1965. 9. 4 소천하시므로 아프리카 가봉 땅 병원 묘지에 묻혔습니다. 

말로서의 사랑이 액세서리라면 실천의 사랑은 보석으로 오랫동안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증오를 녹이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