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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들의 눈이 밝아 (창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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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눈이 밝아 (창 3:1-7)


'사람의 원래의 본성은 선한 것이냐 아니면 악한 것이냐?'라는 것은 철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숙고해 왔던 대표적인 윤리 문제입니다.
이에 대하여 동양에서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 순자의 '성악설(性惡說)'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 때문에 집안이든지 나라든지 간에 모든 사회는 인간이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며 후자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작위(作爲)를 쌓아서, 즉 의식적으로 배우고 익혀서 선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논쟁은 물론 서양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계속되어 왔는데, 스토아 학파나 시세로, 루소 같은 사람들이 성선설에 근거한 철학 혹은 교육 사상을 펼쳤으며, 반면에 마키아벨리, 홉스, 쇼펜하우어 같은 이들은 성악설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런 세속적인 논쟁은 그 기반부터가 잘못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사람이 사람의 본성을 스스로 이해하고 판단하려는 시도' 자체가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개 한 마리가 '개의 본성'에 대해서 스스로 사고하고 연구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그것은 개의 지능이라는 한계를 결코 벗어날 수가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 수준 낮은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본성'에 대한 질문 역시 사람 자신의 이성이나 지식만 가지고서는 결코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며, 사람보다 훨씬 더 지고하신 존재 곧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아야만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하나님의 시각에서 본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 줍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것으로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완전타락 상태에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이 '완전타락' 혹은 '전적무능력'이야말로 인간의 영적 본성을 가장 정확하게 진단하고 정의해 주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은 어떻게 해서 그처럼 완전히 타락하고 스스로는 선을 행하거나 구원을 받을 길이 없는 전적무능력의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것들의 첫 시작들에 관해서 빠짐없이 가르쳐 주고 있는 창세기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의심하며 가감하는 것'이 바로 타락의 시작입니다.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에 "1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뱀"은 물론 평범한 동물로서의 뱀은 아닙니다.
진짜 뱀은 우선 말부터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간교하더라"는 단어 역시 뱀 자체가 무슨 '악한 동물'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만약 뱀이 본질적으로 악한 동물이라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말씀하셨을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에서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는 말씀은 사탄이 뱀의 모습을 가지고 나타나서 '사탄의 악한 꾀'로 사람을 미혹했음을 가리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 사탄의 첫 소리는 '의문문(疑問文)'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에게 그 어떤 '의문'은커녕 '질문'조차 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무조건 '예'였으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면 그것만으로 자동적으로 '오케이'였습니다.
만사에 '문제가 될 것'이나 '의심이 갈 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완벽한 세계, 아무 의문문을 던질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던 그 낙원의 세계에 사단은 불쑥 '의문'을 던져 왔던 것이었습니다.

그 의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의심'의 질문으로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문장 자체가 '의문문'이지만 특히 "참으로"라는 단어가 이 말 속에 가득 차 있는 '의심의 냄새'를 물씬 풍겨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정말로' 그런 말씀을 했느냐?"라고 사람의 마음을 실로 '간교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동산 모든 나무"라는 말 역시 사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교묘하게 '비트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 먹지 말라고 하셨지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과실'들을 먹지 말란 말씀을 하신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물론 사단이 그것을 모를 리는 없지만 일부러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삐딱하게' '의도적으로 뒤틀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이 사람을 유혹한 '첫 질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은근히 왜곡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그런 사탄의 미혹에 간단히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런 교묘한 뉘앙스를 담고 있는 질문을 받고 그녀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그녀는 우선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 2:16)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으로서 여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에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우선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첨가'를 했습니다.
앞서 2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먹지 말라"고만 하셨지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물론 의미상으로 그것을 내포한다 할지라도 어쨌든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는 없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처럼 '약간 더한' "만지지도 말라"는 말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만의 씨가 싹트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그것은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시더라고요.'라는 투정과 불평의 말투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첨가만 한 것이 아니라 '감소'까지 시켰습니다.
바로 "죽을까 하노라"는 말입니다.
이것 역시 2장 17절에 보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되어 있는데, 하와는 거기서 '정녕'(surely)이라는 아주 중요한 단어를 쏙 빼 버렸습니다. 
우리나라말 번역은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즉 '죽을지도 모른다'라는 식으로 하와의 불만과 불신의 심경을 조금 과장해서 의역을 해 두었지만 사실은 그냥 '너희가 죽으리라 하셨다'라고만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하와가 그 '정녕' 즉 '틀림없이, 반드시, 진짜로'라는 단어 하나를 빠뜨린 것은 원래의 하나님의 말씀과는 그 어감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즉 그녀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만'과 함께 그 경고에 대한 '불신'까지 이미 스며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약간의 가감'과 '미세한 의심'이 '인간의 완전타락'이라는 엄청난 결과로 미끄러져 가는 첫 걸음이 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역시 그때와 똑같은 수법으로 사람을 영적으로 타락시키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왜곡과 의심' - 바로 이것이 사탄이 던지는 모든 '의문문'에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으며 사람은 거기에 아주 쉽게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과학적 비평'이니 뭐니 하면서 자기 딴에는 예리한 질문을 던지고,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하여 '재조명'이니 뭐니 하면서 스스로는 양심적인 질문을 던진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그런 '의문'을 가지는 자체부터가 이미 사탄의 '간교한 꾀'에 넘어가는 출발이 되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완전타락'이라는 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실수, 하나님 앞에서의 최악의 범죄가 '하나님의 말씀을 약간 비트는 의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중대한 경종이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 마음속에 '이것이 정말일까?'라는 '의심의 안개' 같은 것이 살짝 스며들게 될 때에 그것을 결코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설교를 듣고 나서 '옳은 말씀이기는 하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예외가 될 수도 있지.'라고 그 말씀의 뉘앙스를 '약간 가감'하는 것 역시 아주 심각한 현상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희미한 의심'과 '미세한 가감'이야말로 바로 사람이 타락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는 엄청난 비극을 불러왔던, 사탄의 간교하기 짝이 없는 미혹임을 꼭 가슴에 새기고 늘 스스로 경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불신하여 거역하는 것'이 곧 타락의 극치입니다.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의 구름'이 끼기 시작하고 '가감하는 불만'이 들어갔을 때 사단은 이제 결정타 한방만 던지면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나타났던 것이었습니다.

우선 4절과 5절에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앞서 하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약간만' 바꾸었습니다.
그러자 간교한 사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제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섰습니다.
아주 약간, 그저 뉘앙스만 조금 바꾸고 철자 하나만 바꾸면서 시작되었던 의심은 결국 이런 '정반대의 도전', '말씀에 대한 완전한 불신'으로 이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 불신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불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어기는 자를 죽이신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거역하는 자를 심판하시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실로 건방지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바로 사단이 사람의 귀에 속삭여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불순종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지옥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여지없이 일치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자유주의 기독교의 목사나 교인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최후 심판'과 '지옥 영벌'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옥의 실존과 필요성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길은 절대로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첫 언약부터가 이처럼 그것을 어기는 자에 대한 필연적인 '심판'과 동시에 주어진 것으로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의심의 눈덩이를 굴려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정면 도전, 말씀에 대한 정면 불신에까지 이끌고 간 사탄은 이제 하와에게 마지막 미끼를 하나 던져 줌으로써 그 불신앙에 완전히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말은 일종의 '반쪽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7절에 나오는 대로 선악과를 먹은 후에 사람은 실제로 "눈이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을 내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지, 결코 사람이 그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여전히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심을 품고 이 '선악을 판단하는 영역'에까지 도전하고 있습니다.
즉 매사를 하나님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사람 자신의 머리만 가지고서 모든 윤리, 행동, 판단의 기준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전제 하에서 '선과 악에 판단도 오직 인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보통 큰 착각이 아닙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인간 스스로의 이성과 양심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로 교만의 극치인 것입니다.

그런 사단의 꾀임에 빠졌을 때에 사람은 '하나님이 필요 없을 정도로 양심적인 인격체', '자기 스스로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하나님 같은 동등한 존재'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얼굴도 못들 수치스러운 처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6절과 7절에 기록하기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사단의 미혹하는 말을 들은 후에 이미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의심과 불만을 가지게 된 상태에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선악과는 이전에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불순종하는 길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어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죄는 타락한 인간에게는 '즐거운 것, 재미있는 것, 마음이 끌리는 것'이 됩니다.
사람이 자기의 눈과 입과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르는 것은 곧 사단의 말을 따르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적인 본능이나 지적인 직감을 따르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쪽이 아니라 항상 사단이 유혹하는 말 쪽으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죄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자기 욕구'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만 기준을 두고 따르는 것뿐입니다.

그처럼 선악과를 '보았을' 때 '죄를 지으려는 욕망'이 일어났고 욕망이 생기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인간의 타락은 종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직후 하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라는 것이었고 아담도 아무 망설임조차 없이 하와가 주는 그대로 그냥 받아먹었습니다.
이처럼 죄는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와 같은 '공범'을 만들면 그 죄의 중한 정도가 약하게 되는 것처럼 느끼는 심리는 이미 하와에게서부터 작동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담 역시 결코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본문에 "자기와 함께 한 남편"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기와 같이 살고 있는 남편'이라는 뜻도 될 수 있겠지만 직접적인 의미는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남편'입니다.
즉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말을 걸어왔을 때 아담도 바로 그녀의 곁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동시에 눈이 밝아진 것" 역시 그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그 무엇보다도 아담 역시 하나님의 명백한 '금지명령'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와에게 단 한마디 이의나 반론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즉 그것은 '한자리에서 같이 저지른 죄'였으며 아담과 하와는 완전타락에 대한 '공범'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불순종으로 인하여 완전히 타락하게 된 인간이 범죄 직후에 얻게 된 것은 바로 '죄에 대한 수치'였습니다.
그들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여" 앞을 가리게 된 것이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벌거벗은 몸'에 대하여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은 나중에 10절에서 아담이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말한 데서 나타나듯이 본질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에 대한 수치'를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과 같이 될 수는' 없지만 그 말씀만 순종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같이 살 수'는 있었습니다.
애당초 불순종이라는 악을 '행하지' 않았더라면 선악을 '알' 필요조차도 없었던 것인데, 죄를 범한 후에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도 아무 좋은 일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는 어리석은 짓은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의 밑바닥으로 치닫게 했으며, 그 결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게 된 '죄의식'이라는 정신적인 고통을 맛보면서 하나님과 단절되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을 영어로는 그냥 'the Fall of Man'이라고 합니다.
즉 '타락'은 그야말로 '밑으로 떨어진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밑바닥'에까지 내려간 상태라는 것은 무슨 '연쇄살인'이나 '흡혈귀' 같은 모습이 아니라 일견 단순하게 보이는 '말씀에 대한 불신'입니다.
  
무슨 '독재자'나 '테러리스트'도 정말 악한 사람들이지만 그보다 더 지독한 악인이 바로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불신과 거역'은 사람 생각에는 별로 심각한 악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실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이며 '하나님 앞에서 최저 밑바닥에 이른 타락'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의 말씀을 약간 의심하고 끝내 불순종하게 된 것이 그처럼 사람의 본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오염시켜 놓은 '완전타락'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일 하나 따먹은' 그 자체가 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를 의심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한 것은 곧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즉 하나님을 믿지 않은 증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 아들 영은이가 어릴 때부터 '네가 무엇을 잘못할 수는 있지만 절대로 아빠에게 거짓말은 하지 말아라.'고 가르쳤습니다.
제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저도 제 아들의 말을 믿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부자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제 아들이 '완벽한 사람'이 되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만은 꼭 유지할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그렇게 바라고 계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완전무결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말씀을 무조건 순종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그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하늘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며 그의 자녀 된 자로서 절대로 깨뜨리지 말아야 할 일인 것입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와 함께 있던 또 하나의 나무인 '생명나무'는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과 불신앙이 인간의 타락을 가져 왔다는 사실 역시 요한계시록에서도 똑같이 반복강조됩니다.
바로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 19)는 선언입니다. 

또 한 번 하와와 같은 바보짓을 해 보겠습니까?
또 한 번 성경에 의심을 해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만을 가지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그랬을 때 '정녕 죽으리라'는 저주가 어김없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역시 '이 책에 기록된 말씀에 조금이라도 더하거나 빼는' 자는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고 지옥 보내실 것이라'는 이 경고의 재앙을 여지없이 받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실수는 첫 사람이 한번 했으면 됐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두 번 다시 그런 바보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엄청난 잘못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다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바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을 통하여 우리는 그 깨어졌던 관계를 회복할 정말 귀중한 기회를 받은 것입니다.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새 언약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 영생하는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이 은혜로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거나 거역하지 않고 끝까지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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