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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을 믿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롬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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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믿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롬 3:3-8)


< 남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 

지난 미국 총회에 참석했을 때 일입니다. 시차 극복을 빨리 하려고 도착 첫 날에 밤늦게까지 여러 사람을 만나며 강행군을 했습니다. 그렇게 약 40여 시간을 내리 자지 않고 잠자리에 들자 첫날밤에 꿀맛 같은 깊은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금방 시차를 극복했습니다. 이튿날, 삼일 째, 그리고 사일 째도 깊이 잘 잤습니다. 

5일째 되는 날 아침, 그때 5명의 일행이 서로 돌아가면서 잠자리를 바꿔 잤는데 전날에 같이 잤던 목사님이 저에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목사님! 어제 많이 피곤했나 봐요. 코를 많이 골던데요.” 비록 웃으면서 말했지만 저 때문에 그분이 잠을 설친 것이 아닌가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날부터 시차 말고 새로운 극복과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코를 골지 않는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잘 때마다 선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잠을 자면서 보니까 코를 골지 않는 분이 한 분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저에게 코를 곤다고 슬쩍 지나가는 말을 했던 분도 어떤 때는 천둥소리 같은 소리를 내며 코를 골았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못 보는 구나?”

그처럼 사람은 자기 수면에 깊이 빠져 자기 모습을 못 보고 남을 정죄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를 먼저 살피며 정죄하는 말보다는 칭찬하는 말을 앞세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비판과 정죄가 난무하던 세상에 화해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화해의 말을 많이 하고 비판과 정죄를 앞세우는 율법적인 태도는 최대한 삼가십시오.   

율법주의자들은 병자들을 보면 무슨 죄 때문에 그 병이 생겼는지를 먼저 따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치유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게으름을 탓하기 전에 먼저 먹여주셨고 길 잃은 양들을 보면 그들의 부주의를 꾸짖기 전에 그들의 두려움을 먼저 헤아려주셨습니다. 또한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말을 통해 그들을 역사의 주체로 세우셨습니다.

그처럼 주님은 못났다고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고개를 들고 어깨를 펴고 더 이상 패배자(victim, 승리를 당한 자)의 모습으로 살지 말고 승리자(victor, 승리를 한 자)의 모습으로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위계질서와 서열화와 각종 차별로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율법적인 종교인들과는 달리 사랑과 격려가 넘치는 말씀을 가지고 주눅 든 사람에게 항상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처럼 이웃에게 항상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람은 다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통해 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일종의 성육신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불쌍하게 보시고 사람의 부족함으로 뛰어드셨습니다. 그처럼 ‘함께 하려는 열정적인 마음(compassion)’을 가질 때 세상은 더욱 밝아집니다. 이제 정죄하는 말은 줄이고 사랑하는 말은 많이 해주십시오. 그때 우리를 통해 주님의 형상이 나타나고 영혼이 치유되고 공동체가 회복되는 역사도 나타날 것입니다. 
  

<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   

본문에는 율법적인 유대인들이 내세우는 몇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이 나와 있습니다. 어떤 질문입니까?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미쁘심’이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무효화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합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더 중시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말처럼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구원받고 자신들은 믿지 않음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면 결국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는 불신실한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에 대해 사도 바울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본문 4절 말씀을 보면 “그럴 수 없다.”고 강하게 부정하며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언약의 백성으로 선택했지만 유대인이란 사실만으로 그들을 구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좇으면 무섭게 심판했습니다. 그처럼 구약 시대에도 ‘선택’이나 ‘약속’이나 ‘혈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구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믿음을 강조하면 어떤 율법주의자들은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이 질문은 거의 궤변에 가깝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질문입니다.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면 왜 우리를 칭찬하지 않고 진노하시느냐? 하나님이 불의한 하나님이냐?”  

그런 궤변적인 질문에 대해 사도 바울은 본문 6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지 않다. 만약 하나님이 불의하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궤변론자들은 질문합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이 질문도 궤변적인 질문입니다. 즉 이런 말입니다. “인간의 거짓 때문에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부각된다면 거짓말을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공로자인데 왜 죄인처럼 심판을 내리느냐?”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궤변입니까? 그런 궤변이 지나치면 “선을 이루려고 악을 행하자!”는 말까지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궤변을 늘어놓으면 결국 본문 8절 하반부 말씀처럼 정죄를 받는다고 합니다.  

가끔 보면 본문에 나오는 궤변들과 유사한 궤변들을 접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궤변이 선악과 문제와 가룟 유다 문제에 관한 궤변입니다. 궤변론자들은 질문합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지을 줄 알면서 선악과를 만드셨나? 왜 하나님은 가룟 유다가 배반할 줄 알면서 그에게 배반하는 나쁜 배역을 맡기셨다가 나중에 헌신짝처럼 버리시느냐?”

심지어 이런 궤변까지 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게 하는 역할을 잘 수행했기에 인류구원에 큰 공로가 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 그런 궤변들은 결국 “하나님은 불의한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는 궤변들입니다. 그런 궤변들을 보면 원망과 불평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불평과 원망은 결국 하나님을 불의한 하나님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그것은 제 탓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죄를 변명하지 마십시오 >   

살면서 명백하게 지은 죄에 대해서는 변명하지 마십시오. 그때는 변명할수록 궤변론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변명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판사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변명입니다. 그래서 변호사가 필요합니다. 변호사의 변호는 참고하겠지만 죄인들의 자기변호는 가증하다는 뜻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궤변을 늘어놓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선택권과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죄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 나서 “돈이 없어서...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서...”라고 죄의 책임을 남 탓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죄를 변명하는 것은 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빨리 회개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면 더욱 잘못된 죄의 노예가 됩니다.

왜 다윗이 성군이 되었습니까? 나단 선지자가 자신의 죄를 들췄을 때 철저히 참회했기 때문입니다(시편 51편). 죄를 변명하려고 하면 더 심판을 받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일단 말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변명하려고 하지 말고 더 나아가 죄를 짓고서 “나 때문에 결국 더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하지 마십시오. 묵묵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잘못이 생기면 자신 탓으로 돌리는 책임적인 사람이 결국 복을 받습니다.  

사는 길은 변명과 후회에 있지 않고 회개에 있습니다. 후회와 회개는 다릅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가룟 유다는 후회해서 결국 멸망의 길로 갔고 베드로는 회개해서 결국 생명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처럼 후회와 변명은 사람을 망치지만 회개는 사람을 다시 멋지게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앞세워 나가십시오. 그러면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를 믿어주시고 그에게 능력도 주시고 그의 미래를 누구보다 복되게 만드실 것입니다. 
  

< 당신을 믿어주시는 하나님 >   

결국 본문의 대 주제는 무엇입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을 순수하게 믿고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찬란한 꿈보다 못한 삶을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못한다! 불가능하다!”는 부정적인 소리를 듣고 현재의 모습에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우리의 꿈에 대해 “재원이 없다! 자질이 없다! 인맥이 없다! 때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계속 “못한다!”는 시그널을 보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운명은 남이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을 믿어주고 박수갈채를 해 주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심지어는 가족과 친구와 동료들조차 자신의 꿈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할 때가 많습니다. 그처럼 찬란한 꿈에는 항상 부정적인 얘기들이 들려옵니다. “그 일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현실적입니다. 저도 똑같은 케이스를 아는데 그 사람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얘기들이 들려도 뚝심 있게 꿈과 비전을 향해 하나님만 믿고 나가십시오.  

본문 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무슨 말입니까? 사람의 불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처럼 남이 내 꿈을 불신해도 자신까지 같이 불신하지는 마십시오. 또한 남의 부정적인 말에 연연하며 그가 나를 가치 있게 생각해주기를 너무 기대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가치 있게 생각하기에 가치 있는 존재이지 남들이 가치 있다고 동의해 주기에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새 세상에 누가 남을 진심으로 인정해주려고 합니까? 겉으로는 박수를 치고 칭찬하는 것 같지만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질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큰 꿈을 꾸고 큰 성취를 하면 질투합니다. 요셉의 형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요셉의 찬란한 꿈에 박수갈채를 쳐주지 않고 오히려 요셉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큰 꿈을 가지고 나가면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그 일을 못합니다.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그런 허황된 꿈을 버리십시오.” 그때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내게 주어진 것이지 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남들은 내 꿈이 이뤄지는 것을 믿을 필요도 없고 믿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내 꿈을 믿어주지 않아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꿈과 비전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믿어주시고 언젠가 그 꿈과 비전을 이뤄주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은 남이 보증해주어야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의 원리를 모르고 사람들은 대개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을 잘 포장합니다. 그리고 기대합니다. “내가 이 얘기를 하면 그가 감동하며 도와주겠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의 감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지나치게 의존하지 마십시오.  

살다 보면 어떤 한 사람이 성공의 키를 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도움을 받아야 성공할 것 같습니다. 그를 보니까 인맥도 넓고 능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와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돈과 시간을 많이 쓰고 공을 들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믿었던 그가 오히려 부정적인 얘기를 하고 현실을 내세워서 자신의 꿈과 비전을 반대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그때 지혜로운 사람은 깨닫습니다. “내가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구나? 그가 있어야 내 꿈과 비전이 성취되는 것은 아니구나!”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지나치게 믿은 것이 문제입니다. 남은 내 꿈의 성취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 꿈을 발판으로 삼아 자기 뜻을 이루고 자기 유익을 얻는데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너무 의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은 그의 마음에 주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주신 것입니다.  

이제 인간적인 바램과 기대를 버리십시오. 사람을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꿈과 비전을 붙들고 나가십시오. 그러면 조만간 꿈과 비전이 점점 구체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황은 역전되어 내가 의지하려고 했던 그가 오히려 나를 의지하려고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는 정중하게 그를 멀리하면 됩니다.  

내 믿음을 남이 믿어주도록 너무 열변을 토하지 마십시오. 그저 하나님이 주신 꿈을 품고 믿음으로 나가십시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꿈과 비전에 비토를 걸고 부정적인 얘기를 하면 그냥 흘려듣고 이렇게 다짐하십시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이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 부정적인 말이 들리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이 내게 뿌리내리게 방치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잘못된 생각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똑똑했지만 인간관계에 항상 문제가 생기면서 한 직장에 오래 있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렸을 때 뚱뚱해서 항상 놀림을 받은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그에게는 듣기 싫은 별명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을 마음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질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처럼 과거에 형성된 부정적인 생각이 자신을 제한하고 내일의 축복을 막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면 생각을 잘하고 “너는 못해! 너는 자격도 없고 가망도 없어!”란 거짓말에 결코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면 나중에는 더욱 그 틀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됩니다.
  

< 믿음으로 생각하십시오 >   

생각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얘기가 들리면 즉시 그 얘기를 떨쳐버리십시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 안에서 답을 찾으십시오. 인생은 남이 나를 보는 대로 규정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보는 대로 규정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을 실패자라고 불러도 자신은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내 꿈을 믿지 못해도 자신은 하나님이 주신 그 꿈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열등감 때문에 남의 꿈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할 때가 많습니다.  

인생은 남이 나를 부르는 대로 규정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는 대로 규정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개야! 너는 충분한 재능이 있다! 너는 너의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너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사람들이 하는 부정적인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제가 네트영어를 시작할 때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교회 프로그램이니까 그저 그렇겠지... 강남의 전문적인 쟁쟁한 학원들을 따라가겠어?” 그러나 내 속에는 전혀 다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루 월리스(Lew Wallace)가 벤허를 다 탈고하고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정녕 제가 쓴 작품입니까?” 그처럼 저도 네트영어를 생각할 때마다 가끔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이 방대한 원리를 제가 정녕 개발했습니까?”  

살면서 귀를 잘 열기도 해야 하지만 귀를 잘 막기도 해야 합니다. 특히 자신의 찬란한 꿈과 비전을 꺾으려는 말에는 귀를 꼭 막으십시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의 씨를 계속 키워나가십시오. 마가복음 4장 31-32절 말씀을 보면 작은 겨자씨가 나중에는 어떤 나물보다 크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현재 처한 여러 가지 어려운 큰 문제와 비교해볼 때 하나님의 약속이 아주 작은 씨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잃지 않으면 그 작은 겨자씨를 통해 기적적인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작은 씨가 처음에 흙에 덮였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엄청난 흙의 양과 무게에 비하면 씨는 너무나도 작습니다. 그때 흙은 씨를 조롱할 것입니다. “이 쪼그만 게. 너는 나를 못 이겨!” 그때 씨는 웃으면서 말할 것입니다. “흙아! 지금은 내가 작지만 내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있어. 때가 되면 크게 자라게 될 거야.” 그때 흙이 말할 것입니다. “웃기지 마. 나는 너보다 천 배 만 배 크고 무거워. 어떻게 네가 나를 뚫고 나오겠어?”  

그때 씨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두고 봐라. 때가 되면 너를 뚫고 나간다.” 그래도 흙은 여전히 비웃을 것입니다. “두고 보자는 놈 하나도 무섭지 않더라!” 그러나 아무리 작은 씨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얼마나 무서운 힘이 나옵니까? 결국 그 씨는 점차 자라면서 자기보다 천 배 만 배 큰 힘과 덩치를 가진 흙을 밀어낼 것입니다. 그리고 흙 위로 솟아난 싹은 나중에 자기 밑에 널린 흙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뿌리로 열매를 맺는 고구마와 같은 식물을 보십시오. 고구마가 자랄 때 주변의 땅을 파헤치면서 그 파헤친 공간에서 고구마 크기가 커집니까? 아닙니다. 주변의 거대한 땅을 밀어내면서 점차 커지는 것입니다. 그 땅을 밀어내는 엄청난 힘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생명의 힘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그런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결국 인생의 성패는 자신이 마음속에 어떤 소리를 키워내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남들이 말하는 부정적인 말에 너무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대신에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에 계속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생각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내 꿈을 이룰 수 있다. 내 앞에는 찬란한 미래가 있다.” 그렇게 믿음의 씨를 길러내면 마침내 그 꿈과 비전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꿈과 비전을 향해 나갈 때 처음에는 부정적인 말이 천둥처럼 크게 들립니다. “너는 자격이 없다. 재능도 없다. 재원도 없다. 그러므로 그 일을 이루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천둥소리를 뚫고 그 뒤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그러면 이런 소리가 들려올 것입니다. “아무개야! 네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단다! 너는 의외로 강하단다!”  

그 두 가지 소리가 마음속에서 다툴 때 계속 믿음의 소리를 키우십시오. 그리고 찬란한 꿈과 비전의 씨를 계속 자라게 하십시오. 그러면 작았던 축복의 소리는 점차 천둥소리처럼 커지고 처음에 천둥소리처럼 컸던 부정적인 소리는 점차 들릴 듯 말 듯 잦아들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여러분을 믿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앞으로 주실 축복에 대해 끊임없이 묵상하고 기도하고 행동하면 마침내 복된 미래가 펼쳐질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제가 선포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마음으로 따라해보십시오. “나는 강하다! 나는 용기와 결단력도 있다! 나는 재능과 창조성도 있다! 나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리라! 나는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다! 나는 손대는 것마다 성공할 수 있다! 나는 예수 믿고 인물이 되리라!” 이 믿음의 선포를 믿고 받아들임으로 지금 이 시간을 여러분들의 인생의 위대한 전환점으로 만드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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