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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그네의 고백 (창 47: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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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고백 (창 47:7-10)


전순영의《시간을 갉아먹는 누에》중에서 이런 시가 있습니다. 

먹지 않으려고/ 입을 꼭 다물고 손을 내저어도 얼굴을 돌려도/ 어느새 내 입속으로 기어들어와/ 목구멍으로 스르르 넘어가 버리는 시간./ 오늘도 나는 누에가 뽕잎을 먹듯 / 사각사각 시간을 갉아먹고 있다./ 쭉쭉 뻗어나간 열두 가지에/ 너울너울 매달린 삼백예순 이파리 다 먹어치우고/ 이제 다섯 잎이 남아 있다./ 퍼렇게 얼어붙은 하늘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어느덧 한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네 잎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12월의 첫 주일입니다. 우리를 애태우며 웃고 울렸던 2011년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달 12월 첫 주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마지막’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끝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완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산의 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마지막 때에 관한 기록이 300번 이상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가 연구하고 보니까 예수님의 보혈에 관한 기록보다도 마지막 때에 관한 기록이 더 많다고 얘기했습니다. 


돌아보면 한 해의 끝자락이라는 종착역에 서 있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마음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뜻한 바를 이루어 새해를 기대로 맞는 분도 있겠지만, 웃음보다는 눈물이 많았던 분들이나 힘든 걸음을 사력을 다해서 걸었던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가정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을 지나면서도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말 못한 채 하나님께만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눈물진 교우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해를 정리하면서 매번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때마다 자신을 돌아볼 때 후회도 해보고, 또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도 해보지만, 뭐, 잘 바뀌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사자성어 가운데 '호질기의(護疾忌醫)'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병이 있음에도 의사한테 보여 치료받기를 꺼린다'는 뜻으로 과실이 있으면서도 남에게 충고받기 싫어함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잘못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바로잡아주는 것을 기뻐하지 않지 않습니까? 마치 자기 몸을 망가지는데도 불구하고 남의 이야기를 들을려 하지도 않고, 깨닫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참 우리는 잘 안 변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인생관이 처음 어떻게 자리를 잡고 자신의 사고와 감정, 삶의 태도를 결정하게 되었는지는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고정된 자신의 인생관을 어느 순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곱을 통해 그의 인생관이 바뀌게 되는 대전환을 보게 됩니다. 곧 사고의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생이란 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무언가 있는 것 같지만 없는 것이나 다름없구나.' '내 손에 있는 재물, 내가 쌓아놓은 부귀와 보화, 사실 이것들이 내 손에 있지만 언제 내 손을 떠날는지 모르는 것들이구나.'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야곱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면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야곱이 애굽 왕 앞에서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냐?" 왜 바로는 처음 만난 야곱에게 나이를 물었을까요? 이름이 무엇이냐? 어디서 왔느냐?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많은 질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애굽 왕 바로는 야곱을 보자마자 대뜸 “네 나이가 얼마냐?”라고 묻습니다. 아마도 야곱의 모습이 나이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같습니다. 

그의 외모에 산전수전을 겪어온 인생의 자국이 거칠게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네 나이가 얼마냐?” 라고 물은 것이죠. 그때 야곱이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험악한 세월'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험악한 세월이란 한 마디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질문과 대답 속에는 야곱의 인생을 총망라하는 함축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제 이 한해의 끝에선 우리에게 주님은 다시 동일한 물음을 던질 수 있지 않습니까? “네 나이가 얼마냐?” 이것은 나의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인생의 이력서를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이력서에 어떤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인생의 계획과 뜻을 품고 있습니까? 오늘 아침 여러분은 이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어떤 인생의 이력서를 하나님 앞에 펼쳐 보이시겠습니까? 

첫째로, “네 나이가 얼마냐?”는 이 질문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느냐? 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과거의 인생 이력을 묻는 질문입니다. 여기 야곱은 자신의 나이가 ‘130세’입니다. 그러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야곱의 과거의 인생 이력서는 참으로 파란만장합니다. 성경의 인물가운데 야곱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 이름의 의미처럼 야곱은 지금까지 속고 속이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노력해서 안 되는 것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루었기에 불가능을 몰랐습니다. 출생서열까지 바꾸면서 축복을 가로챘고 원하는 여인을 얻고자 14년이나 봉사하며 자기가 원하는 여인을 얻게 됩니다. 

또 재물을 얻기 위해 또 6년을 머슴살이하면서도 열등감에 빠지지도 않을만큼 입지 전형적 인물이 아닙니까? 분명 성공 신화에 나올법한 삶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가출을 해서 20년 만에 거부가 되기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숙곳이란 곳에서 사랑하는 외동딸 디나가 세겜 추장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그것을 본 아들들이 세겜의 남자들을 죽이는 살인극이 벌어집니다. 이로인해 이방 땅에서 가족이 몰살을 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겨 죽었다는 사실이 야곱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더 이상 산다는 의미를 상실한 채 인생을 덧없이 보내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또한 아들 요셉이 세상을 호령하는 애굽의 총리가 된 이 사실을 듣게 되고 그 아들의 초청으로 지금 상상하지도 못한 애굽왕 바로의 면전에서 “네 나이가 몇이냐”는 질문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보면 실패한 인생 같지 않습니까? 그런 그가 어떻게 바로의 면전에까지 올 수가 있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그는 내 나이가 130살인 것은 사실이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 우리도 야곱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탕자처럼 살았던 모습뿐입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속일 때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속임을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시린 가슴을 품고 잠 못 이룰 때도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것뿐이요 죄로 얼룩진 흔적뿐입니다. 한없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살았지만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하고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주변의 사람으로부터 많은 사랑의 빚을 졌지만 그 은혜를 기억지 못할 때도 있고, 외면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지나온 과거의 삶의 상처와 죄로 얼룩진 모습을 생각해 보면 누가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항상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전15:10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는 힘써 수고했지만 그 사역의 모든 것 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둘째로 “네 나이가 얼마냐?” 이 질문은 너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지금 어떤 삶의 가치와 목적을 가지고 사느냐는 질문입니다. 지금 바로 앞에 선 야곱이 그가 살아온 세월 속에 다 잃은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습이 점점 달라져 갑니다. 그의 이런 변화의 모습은 자기의 아들들이 애굽에 양식을 사러갔을 때 결정적으로 나타납니다. 아들 중 시므온이 도둑질했다는 죄목으로 애굽에 인질로 잡혀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창세기 43:14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라고 믿음을 나타납니다. 

여기서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비로소 철저하게 경험한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 전능자임을 믿지 못했기에 야곱은 스스로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데서 나온 삶이었습니다. 이제는 철저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창세기 48장 21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라고 유언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를 분명히 믿는 사람으로 변화 되었습니다.여러분 가운데 ‘임계질량’이란 말을 들어 보셨지요? 일정한 양을 채울 때 놀라운 상승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정한  양을 채울 때 순식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은 99도에서는 절대 끓지 않습니다. 정확히 100도가 되어야 끓습니다. 물을 수증기로 바꿔놓는 것은 바로 그 결정적인 1도의 차이입니다. 100도가 임계점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질에는 이러한 임계점이 있습니다. 하나의 상태가 다른 상태로 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임계점을 넘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 임계점을 잘 통과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쓰임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요긴하게 쓰시는 인물일수록 고난의 양을 채우게 하십니다. 훈련의 양을 채우게 하십니다. 모세는 광야라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고,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면서 13년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받아 아둘람 굴에서, 광야에서 거의 13년을 보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요긴하게 쓰시는 인물일수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고난의 용광로를 통과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도 보통 사람보다 오랜 세월 동안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쓰시는 인물들은 고난의 충만한 양을 채우는 동안 정결케 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성품으로 빚어지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인내를 통해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쓰신 인물들을 보면 그들이 고지에 서기 전에 가장 어두운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때 그 어두운 시절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 고비를 넘겼다는 것입니다. 새벽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바로 임계점을 돌파하는 순간입니다. 그때 가장 힘이 듭니다. 그때 가장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고비만 잘 넘기고 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겪는 환도뼈가 탈골되는 것과 같은 고통과 아픔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나를 믿고 내 능력을 의지하던 모습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바꾸어 가시는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해보신적은 없습니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고백,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는 고백을 드리는 자체가 축복이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바로 내가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사람으로 인도해 가십니다.여러분 가운데 이 한해 실패를 보셨습니까? 건강을 잃으셨나요? 아니면 내일에 문제 때문에 마음이 진정이 안 되고 불안해 하십니까? 여기 보십시오. 10절에 보면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고대 근동 지방의 팔레스틴 전 지역을 다스리는 애굽 왕을 오히려 보잘 것 없는 늙은이요 외국에서 이민 온 야곱이 축복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축복할 수 있습니까? 가진 것이 더 많고 풍성하다고 믿을 때에 남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가난한 사람입니다. 바로에게 땅을 얻어야 하고 양식도 얻어야 살아갈 수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 복의 근원이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자신의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일국의 왕을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야곱은 「받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빼앗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빼앗고 취하고 모으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야곱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느틈에 서서히 「주는 자」로 변신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년에 이르자 그는 모든 것을 베푸는 자, 나누는 삶으로 살아갑니다. 이웃들의 도움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다른 어떤 때보다 긴급하게 요청되고 필요한 그 순간에 오히려 축복을 바꿀 수 있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람은 별 수 없이 모든 것을 놓고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진실을 야곱은 인생의 황혼에 들어서서 확연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창 49장을 보시면 야곱이 죽음 직전에 최후로 한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녀들을 축복하는 일입니다. 창 49:1절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마지막 순간까지 자녀들을 축복합니다. 다 주고 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끝까지 움켜쥐고 놓치를 못하는 비극적인 인생을 종종 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주먹을 움켜쥐고 태어납니다. 이것은 움켜쥐기 위한 인생, 그러나 별 수 없이 마지막 순간에는 펴고 가야 합니다. 

이 진실을 빨리 깨닫는 자가 얼마나 지혜로운 인생인지요? 인생의 말년에 아낌없이 손을 펴서 남을 축복하고, 나누어주고, 그래서 깃털같은 가벼운 심정으로 하나님이 그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향해 떠나가는 나그네 야곱. ‘험악한 세월을 보낸다’ 고 고백한 그는 비록 130살을 살아 왔지만, 내 인생, 내 방법, 내 수단으로 이 나이까지 살았지만, 이것이 인생의 참된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이 고백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달라졌습니다. 이제 이 한해 마지막 달 첫주간에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난 1년 헐떡거리며 달려온 열매가 무엇입니까? 부지런히 달려온 것 같은데 주머니를 뒤져보니 있어야 할 열매가 없지는 않습니까? 급한 것들 때문에 소중한 것을 놓친 것은 없습니까? 현실적인 것들 때문에 영원한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땅의 것을 얻느라 하늘 상급을 잃지 마십시오. 성공 때문에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이웃을 버리지 마십시오. 세상 때문에 교회와 천국을 상실하며 살지 마십시오. 이젠 주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할 때입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니 내 재주로 산 것만 같습니다. 내가 땀 흘리면 잘 살줄 알았지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오늘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거둬 가시면 쌓아 놓은 것들이 모두 무너져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 인생을 오늘까지 지켜주셨고 내일도 동행하시며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분의 은혜 하나로 우리가 살아있습니다. 묻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셨던 그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여러분의 변화를 위해서 여러분의 삶속에 오늘도 뛰어들어 일하시는 이 모습을 보십니까? 시146:5절에 보면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의 축복, 빛나는 인생의 황혼, 이것은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야곱을 복된 인생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야곱을 포기치 아니하시고 끝까지 붙드시고 새롭게 일으켜주셨던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인생, 지렁이처럼 땅을 기어 다니며 미물처럼 의미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던 야곱을 돌아보신 그 하나님이 지금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야곱을 통해서 나의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을 부끄러워하지도 싫어버리지도 않으마 말씀하시며 야곱을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이 오늘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기에 나의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을 정말 의지합니까? 왜 그렇게 변하지 않으시죠? 교회출입이 몇 년인데 왜 그렇게 변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성격이,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 왜 그렇게 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 때문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내 인생을 끊임없이 이끄시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면서까지 한번 당신의 자녀로 삼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우리는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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