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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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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 (계 21:1-8)


요한 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즉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러니까 요한 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해 놓은 책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특별한 계시를 전하셨을까요?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이 왜 요한 계시록을 써야했을까요?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의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도미시안 황제는 ‘황제예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곳곳에 황제를 위한 신전을 건립했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 안에도 자기의 신상을 세우도록 강요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황제를 “우리의 주와 신”으로 숭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도 황제예배에 동원되어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만일 이를 거역하는 자는 재산이 몰수되었고, 반역자로 취급되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래서 당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박해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두려움 속에서 순교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을 버리고 타협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저들을 외면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저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미래의 승리를 바라보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도록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에게 계시하셨고, 이를 기록하여 저들에게 보내어 읽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기록을 성경에 기록하셔서 오늘 우리에게 읽게 하시는 것일까요? 왜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다른 상황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이런 계시의 내용을 읽게 하시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요한 계시록 안에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도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읽을 때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면 특히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1.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

본문 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 4장에서 20장까지 자기가 본 장차 이루어질 악에 대한 심판에 대한 환상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우선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을 통해 삼대 칠중 재앙이 집행되어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악의 세력을 제압하신 뒤에, 모든 인류를 부활시키셔서 백보좌 심판을 진행하십니다. 그 결과 악이 진멸됨으로써 모든 것이 정리되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대역사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제 본문에 와 보면, 사도 요한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신 것들을 환상 가운데 보고 이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것이 바로 신천신지 곧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환상에 대한 예언은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 교인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당장 도미시안 황제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 믿음을 지켜가기 힘들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땅에는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들에게 새로운 소망이 되었습니다. 저들을 무겁게 짓누르던 절망을 떨쳐버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더할 수 없는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되었습니다. 용기 내어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 교인들은 박해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박해 때문에 찾아온 두려움 때문에 힘들었던 것입니다. 당시 저들은 견디기 힘든 고통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견디며 기다릴 그 무엇이 없는 절망 때문에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해 질녘 땅거미 밀려들듯 두려움이 어느새 우리를 뒤덮습니다. 힘겨운 날에 견디며 기다릴 그 무엇이 없어 절망이 무겁게 어깨를 짓누릅니다. 그래서 인생이 힘겨운 것입니다. 한 마디로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생이 힘겨운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일하던 군의관들이 새롭게 발견한 질병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가시철망 병’(Barbed Wire Sickness)이었습니다.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식욕도 없고 먹어도 살이 찌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쇠약해져서 누워있기만 합니다. 이 병은 원인도 잘 밝혀지지 않았고, 당연히 치료법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여러 사람들을 통해 입증된 자료를 보면, 그 때 같은 수용소 안에 있었지만 가시철망을 보고 한탄하는 대신에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고향을 그리며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그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병은 일종의 절망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이런 가시철망 병처럼 무엇엔가 사로잡혀서 희망을 잃고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인생의 조건들, 상황들, 문제들 속에 갇혀서 절망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가시철망들 너머 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새 소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생을 길게 보시기 바랍니다. 장차 다가올 앞날과 더 멀리 장차 우리에게 이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망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2. 새 예루살렘을 꿈꾸라

본문 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 안식을 누리도록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셨고, 이제 이것이 저들에게 임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원래 예루살렘은 옛 이스라엘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일에 실패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의 강림을 통해 새 이스라엘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온전한 구원을 받게 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새 이스라엘을 위해 새 예루살렘을 준비해 놓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장차 구원 받은 백성들은 이 새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장차 도래할 새 예루살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한 마디로 장차 우리가 들어갈 새 예루살렘에는 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 죽음, 슬픔, 불행이 없으니 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에는 기쁨이 가득하고 늘 웃을 일만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 교인들에게는 울 일들뿐이었습니다. 박해로 인해 고통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믿음을 지키다 끌려가 순교 당했다는 죽음의 소식이 이어집니다. 그들의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자기가 본 환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물을 닦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들어갈 새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쁨과 웃음만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저들에게 정말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푸념 가운데 하나가 ‘웃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웃기는 커녕 울어도 시원치 않을 판이라고 울쌍을 짓습니다. 어떤 이들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고 말합니다.

왜 오늘도 사람들은 울어야만 할까요? 본문을 보면 세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 죽음 때문입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늘 눈물이 있기 마련입니다. 
둘째, 슬픔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슬픔이 있어서 애통하게 되고 또 곡하게 됩니다.
셋째, 질병 때문입니다. 사람은 병들게 마련입니다. 그 병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눈물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눈물의 골짜기라고 했고, 찬 479장에서 테일러는 괴로운 인생길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저 새 예루살렘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더 이상 울 일이 없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그 새 예루살렘을 마음 속에 사모하며 꿈꾸어야 하겠습니다.

찬 238장 [해 지는 저편]은 버질 브록목사 작시에 그의 부인 브란쉬 매리 컬 브록이 작곡한 곡입니다. 이 부부는 작시. 작곡가들로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노래하는 브룩 부부]로 불리는 찬송 인도자요 부흥사로도 널리 알려졌었습니다.

이 부부가 1936년 여름 인디아나 주 위노나 호수에 있는 호머 로드히버씨 댁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은 호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호수 저편 서쪽 노을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가 그 광경에 감탄하고 있을 때, 곁에 있던 맹인 친구 호레이스 벌씨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석양 노을을 본적이 없군요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석양입니다.”
이 부부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말하고 있군요!" 그러자 벌은 "나는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하여 본답니다. 나는 비록 맹인이지만 해지는 저편까지도 보지요!"

이 말에 이 부부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들은 해 지는 것만을 보고 있는데 친구는 해 지는 저편까지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감을 받은 부부가 함께 곡을 쓰게 됐습니다.

해지는 저편 새 하늘에는 우리 주 예수 계시오니 
고난은 가고 찬란한 새벽 영광의 날이 밝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해 지는 이편만 볼 것이 아니라 해 지는 저편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해지는 이편의 눈물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해지는 저편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새 예루살렘을 마음속에 꿈꾸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낼 수 있습니다. 웃을 일이 없어도 웃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3. 믿음을 지키라

오늘 본문 7-8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한 마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고 그 위에 새 예루살렘이 임하여도, 그곳에 들어가 영원 안식과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 교인들은 박해로 인해 큰 믿음의 시험을 겪고 있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황제예배를 거부하면 반역죄로 처형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있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이 말씀으로 저들은 새 힘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해가 아니지만 사탄은 다양한 방법으로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고 있습니다. 

벧전 5:8-9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그렇습니다. 굶주린 사자가 사냥감을 찾아 두루 다니는 것처럼 사탄이 성도들을 찾아다닙니다. 사자가 사냥감을 목표로 정하면 끈질기게 따라 붙어 공격하는 것처럼, 사탄도 목표로 정한 성도들을 끈질기게 공격해 옵니다. 

우리는 믿음을 굳건 하에 하여 대적해야 합니다. 믿음의 허점을 보이면 안됩니다. 사탄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무너뜨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전 국회의원 유재건 장로님이 쓴 자서전 격 신앙에세이 [은혜인생]을 보면, 이분이 국회의원이 된 후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가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국회의원 12년을 포함해 15년 동안 정치활동을 했는데, 신앙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처음부터 기독교 양심을 지키면서 정치하기로 하나님과 약속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도 타협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국회의원이 되고 난 후 제일 먼저 ‘주일은 쉽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선거 운동할 때 술자리에 참여하고 또 술을 사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표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주일에도 열심히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 일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유 의원은 철저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술 먹지 않고 술자리를 만들지도 않는 의원이라고 신선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생겨서 오히려 선거에 도움이 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박해 때 못지않게 믿음을 지키기가 힘든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켜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만 새 하늘과 새 땅을 맞게 될 것이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반드시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새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곳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을 마음 속에 꿈꾸며 살아야 합니다. 나아가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힘들더라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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