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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집에서 신실한 자 (히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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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집에서 신실한 자 (히 3:1-6)
   
마크 맥코맥이라는 사람이 “110%의 인생을 사는 비결”이라는 책을 썼는데, 대단한 비결이라도 있은 줄 알고 책을 사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세계적인 기업인 IMG (International management group)의 회장이며 스포츠계에서 널리 알려진 사람으로, 베스트셀러의 작가입니다. 그의 책에 머리말이 있고 책을 쓰기 시작하는 말을 보았습니다. 처음 글에 “110%의 노력만이 110%의 성공을 가져다줍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은 명언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무슨 성공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또 기적 같은 인생이 펼쳐질 것으로 생각한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이요, 심지 않고 거두려고 하는 나쁜 심사입니다. 불한당이라면 몰라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살고, 자기 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그 후에 성공을 바라야 합니다. 

저는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꿈이 많은 사람들이었고, 그의 꿈과 이상을 구체화시켰으며,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들이요, 100%가 아니라, 110%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똑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으나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것은 이 세상은 재능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훈련, 집중, 결단력이 바로 스타와 범인을 가르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런 예를 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회사나 관청이나 학교, 그 외에 그가 속한 집단에서 조금만 머리를 쓰면 50%의 노력을 기울이고도 세월아 네월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75%의 노력을 기울이고도 약간의 행운만 따라준다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일반적인 삶에는 그런 가능성을 허용하는 느슨한 구석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50%나 75%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자의 오랜 신념이고 확신이라고 합니다. 저자가 30년을 넘게 기업체를 운영하고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최선을 다할 때 최고의 기분은 느낀다. 최고의 노력을 기울일 때에 최고의 자긍심을 얻고, 최고의 집중력을 기울일 때 최고의 자신감을 얻으며, 최고로 몰입할 때에 정신적으로 고양될 수 있다”고 합니다. 

“아웃라이어”라는 책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용어를 설명하여야 설교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조금 설명하려고 합니다. ‘아웃라이어’라는 말은 과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인데 이 말의 뜻은 “보통 사람들의 범위를 뛰어 넘는 이들”을 가리켜 ‘아웃라이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행동과 사고방식이 평범한 수준을 넘어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아웃라이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저자는 개인적인 특성만으로는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숲에서 가장 키가 큰 상수리나무가 그토록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나무가 큰 나무가 된 것은 가장 단단한 도토리에서 발아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다른 나무가 햇볕을 가로막지 않았고, 그가 뿌리를 내린 곳은 토양이 깊고 풍요로우며, 토끼가 이빨을 갈기 위해 밑동을 갉아먹지도 않았으며, 다 크기 전에 벌목꾼이 잘라내지 않은 덕분에 가장 큰 나무가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성공하기까지에는 아주 숨어 있는 원인들이 많으며,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말이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의 하나는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아웃라이어는 타고난 재능에 더하기 연습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진정한 아웃라이어가 되기 위한 매직넘버”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유명한 심리학자 안데르스 에릭손(K. Anders Ericsson)이라는 분이 ‘베를린 음악 아카데미’ 학생들을 대상으로 “재능 논쟁의 사례A”라는 연구결과를 내어놓았습니다. 그는 우선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최고의 엘리트’로 장래 세계적인 솔로 주자가 될 수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잘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학생이었고, 세 번째 그룹은 프로급 연주를 해본 적이 없고, 공립학교 음악교사가 꿈인 학생이었습니다. 연구진은 그룹과 상관이 없이 학생들에게 같이 질문했습니다. “처음으로 바이올린은 집어든 순간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왔는가?”라는 말이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은 대략 다섯 살 때부터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초기 몇 년은 일주일에 두세 시간씩 비슷하게 연습했습니다. 여덟 살이 되면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 반에서 가장 잘하는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연습을 더 했습니다. 아홉 살 때에는 일주일에 6시간, 열 살 때엔 12시간, 열네 살 때에는 일주일 16시간 연습이 길어졌습니다. 스무 살이 되면서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겠다는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일주일에 서른 시간을 꾸준히 연습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스무 살이 되면 엘리트 학생은 모두다 1만 시간을 연습하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냥 잘하는 학생은 모두 8,000시간, 미래의 음악교사는 4,000시간 정도 연습하였다는 보고였습니다. 

그가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타고난 천재” 즉 다른 사람이 시간을 쪼개 연습하고 있을 때 노력하지 않고 정상에 올라간 연주자를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실력의 차이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덧붙이자면 최고 중의 최고는 그냥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훨씬, 훨씬 더 열심히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성공, 진정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매직넘버’를 받아들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1만 시간’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의 법칙은 ‘1만 시간의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현인들이 이것을 일찍 간파하였습니다. 그것은 “10년 공부”라는 말이요, “공든 탑이 무너지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연습은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잘하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성공 사례를 말하는 것은 생략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서론이요, 성경을 말씀하기 위한 도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서 3:1-6을 보면 예수님을 말씀하는데, 주제는 예수님을 모세보다 뛰어나시다는 것을 말씀하려고 합니다. 히1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뛰어나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천사를 칭찬하고 높이시면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고 하셨느냐”(히1:5-6)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모든 천사들보다 뛰어나십니다.

히2장에 예수님은 ‘구원의 창시자’라고 하시면서 히3장에 와서 예수님은 모세보다 뛰어나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의 신실성에 있어서 모세보다 뛰어나시다고 하십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만나고 가셔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어떤 모습, 어떤 성품, 어떤 태도를 보시고 가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2절 말씀에서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보내시고 세우신 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신실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을 세우시고, 임명하신 분, 자기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보내신 분에게 신실하였습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충성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전 개역성경에서 ‘충성’하였다고 했고, 개정역에서는 ‘신실’하였다고 하고, 새번역에서는 ‘성실’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을 세우신 하나님에게 충성하셨고, 신실하셨고, 성실을 다하셨습니다. 충성, 신실 성실 다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일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명이 끝나서 그만 둔 것이지 그가 불충성하였기에 하나님이 그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일생이 출애굽기와 레위기 민수가 신명기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는 얼마나 충성하였으며,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보내실 것이라고 하실 정도로 충성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예표가 되고 그림자가 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신18:15에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가 하나를 일으키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삶의 자세와 열정은 한마디로 ‘신실’이라는 말이었습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충성을 다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을 부르시면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구별된 거룩한 형제로 불러주시는 것이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으셨으며, 주님은 우리의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진리가 되시고 생명의 빛이 되십니다. 

그런데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라는 말은 우리의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신앙고백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라고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오신 큰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오신 대제사장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히4:16에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는데,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전권대사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보혈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신 분이요, 우리가 받아야 하는 심판과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의 영혼을 적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심판은 나의 심판이요, 나의 멸망의 자리였음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니셨다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시지 아니하셨다고 하면 우리는 영원히 멸망 받아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당신을 보새시고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신실하셨는데, 하나님의 사자요, 종인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한 것처럼 충성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충성이란 종으로서의 충성이요, 그냥 복종하면 되는 충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 위치와 입장에서 충성하기란 사실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종으로 충성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아들로서 일하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까? 모세란 분은 정말 충성스러운 일꾼이었습니다. 민12:7에 보면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과 비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한 사람에게 비교한다면 모세에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실함을 한 사람에게 찾아본다면 모세의 충성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 이스라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모세의 충성을 높이 알아주시면서 예수님의 충성을 모세에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모세의 충성에는 유사한 점도 발견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3절입니다.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모세의 유사한 점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탁월한 지도자요, 충성스런 지도자이지만,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집을 세우시는데, 자신의 피를 흘려 세우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집을 세우신 분이요, 그 집을 세우시는 일에 충성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한 것이었습니다. 집을 지은 사람이 집보다 더 존귀한 것 같이,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모세는 집의 사환으로 종으로 충성하였지만, 예수님은 아들로 충성하였습니다. 당신의 피를 흘리시면서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충성하는데 죽기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아들로 충성하기가 어려운 것을 보았습니다. 종들은 시간제 봉사자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24시간 모든 시간에 충실해야 합니다. 종들은 쉬면서 일해도 됩니다. 그러나 아들은 쉴 시간이 없습니다. 집안에 어려운 일을 겪어보니 아들로 신실하기가 정말 어려운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들로 충실하기가 한이 없습니다. 해도 해도 표가 나지 않습니다. 아들로 일하였다고 하여 알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당연한 일을 가지고 자세하거나 생색을 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종들은 아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6절 말씀이 오늘의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종으로 충성하였으니, 충성한 것으로 보면 유사한 점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충성하셨습니다. 종으로 충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믿음의 도리가 되시며 하늘로서 내려오신 대제사장으로 충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를 흘려 대속하신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서는 날까지 소망을 든든히 하여야 합니다.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잡고 있으면 우리도 하나님의 집안 사람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소망의 확신과 자랑이라고 하셨는데, 자랑이란 자부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새번역에서는 자부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집안 사람이 될 수 있게 불러주시고 세워주신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집안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짊어지고 동행하는 멍에입니다. 

세상의 일에 부름을 받아도 영광스러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이 세워주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워싱톤 D.C에 있는 ‘크리스천 교회’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 교회의 모 집사님이 머리도 좋고 공부를 많이 하고, 한국인으로서 미국 회사에 회계사로 중역을 맡은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소속된 6명이 한 팀이 되어서 2주 동안 파견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성가대 지휘를 맡고 있는지라 고민을 하면서 그 팀장에게 사정 얘기를 했답니다. “저는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는데, 2주 동안이나 성가대 지휘를 빠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팀원들보다 조금 먼저 가서 일을 하고 주일에는 교회 성가대 지휘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팀장은 한마디로 거절했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다시 한 번 더 부탁을 했는데, 그 팀장은 또 거절했답니다. 그 때 집사님은 내가 회사를 사임할지언정 성가대 지휘는 빠질 수 없다고 말하자 할 수 없이 팀장이 허락을 해서 미리 가서 일을 하고 주일이 되어 교회로 돌아왔답니다. 얼마 후 다른 사람들은 그 회사의 일정대로 비행기를 타고 복귀를 하는데 바로 그 비행기가 워싱톤 펜타콘에 떨어져서 거기에 탄 탑승객들이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911사태에서 살아난 사람입니다. 이 분도 100% 그 비행기를 타고 죽을 위치에 있었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두 번이나 가서 사정하고 사임까지 각오했는데 하나님이 이 분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부활한 사람”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주의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습니다. 많은 사람을 보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허송세월합니다. 후회 막급한 인생을 살았다고 탄식합니다. 악한 사탄은 사람들에게 속삭입니다. “너는 아무데도 쓸모없는 존재야” 악한 사탄은 한 사람을 잔인하게 짓밟아놓으려고 합니다. 재기할 수 없는 사람으로, 형편없는 사람으로, 자포자기 하게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아들의 피로 값주고 사신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님을 깊이 생각하는데, 주님의 신실하심을 생각하며 본받아야 합니다. 요6:38에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나를 세우신 이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더 좋은 생각이 있다고 하여도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이가 누구이십니까? 사람들이 세웠습니까? 우리 주님이 세우셨습니까? 우리를 세우신 분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부르시고 세우시고 보내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보내시고 있습니다. 

이제는 세우신 뜻에 의지하여 나가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실함으로 사명을 감당합시다. 

우리는 내가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세우심을 입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때에 순종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충성스럽게 살아가신 주님을 본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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