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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십시오 (전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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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름을 남기십시오 (전 7:1-4)  

< 죽음은 최고의 스승 >  

어느 날, 한 여객선이 거센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배기 뒤집힐 듯이 요동했습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바로 그때 한 노인이 평화로운 얼굴로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노인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두렵지 않으세요. 지금 어떤 기도를 드리나요?” 

그때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지금 저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게는 귀한 딸이 둘 있었습니다. 큰딸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작은 딸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만약에 배가 뒤집혀 죽으면 천국에 있는 큰딸을 먼저 만나게 될 것이고 이 배가 무사히 도착하면 작은 딸을 만나게 될 테니까 어떻게 되어도 좋아요.”   

굳건한 천국 소망은 죽음의 고통도 이기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가장 소중한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면 폼 나는 무엇을 찾지 않고 인간적인 고상함과 자존심과 명예심을 다 버리고 진짜 진리를 찾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의 모습을 보면 무엇이 진리인지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을 때 어떻게 죽습니까? 그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죽는 사람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죽으면서 “이제부터 아무개 도사를 믿겠습니다.”라고 죽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처럼 죽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독교가 참된 구원의 종교임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인생 최고의 스승입니다. 죽음은 사람을 진실하고 겸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죽음을 알면 삶도 알게 됩니다.

< 산 자가 유념해야 할 것 >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산 자는 죽음을 유념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죽음과 관련해 유념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1. 죽는 날이 출생 날보다 낫다는 것  

본문 1절에서 왜 솔로몬은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합니까? 성도에게는 그 날이 하나님께 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죽음이 저주로 느껴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다가 죽으면 최상의 날이 펼쳐진다고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불신자들은 죽음이란 말만 들어도 재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을 가지고 죽는 날을 하나님께 가는 이삿날이라고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평안과 여유가 생깁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이것은 슬픔과 근심에 빠지라는 말이 아니라 죽음이란 사실 앞에 진지하게 대면하면 오히려 마음의 먹구름과 근심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죽는 날이 출생 날보다 낫다는 말은 삶이 점점 좋아져야 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시작은 거창하지만 마무리가 약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전에 한 기독교 신문에 이런 기사가 떴습니다. “한국의 제일 큰 교회가 문을 닫다!” 사람들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문을 닫은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어떤 개척교회 이름이 <한국의 제일 큰 교회>였습니다. 지하에서 개척하면서 거창하게 그런 이름을 지었다가 목사님이 돈키호테나 허경영인 줄 알고 그 교회를 외면해서 결국 1년 만에 문을 닫은 것입니다.

끝이 아름답고 후반이 강한 삶이 성경적인 삶이고 주님의 삶입니다. 이제 “내가 왕년에 어땠다.”라는 말을 가급적 하지 마십시오. 현재의 땀과 내용이 없으면 자꾸만 그런 말이 나옵니다. 삶은 후반전이 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작은 겸손하게 하되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 맡은 일을 잘 감당해서 처음보다 나중이 낫고 죽는 날을 출생한 날보다 낫게 만드십시오.

  
2.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는 것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잔칫집에 자주 가면 우매자가 되고 초상집에 자주 가면 지혜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남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초상집에 가서 죽은 사람을 보면 여러 가지 진리와 교훈을 배웁니다. 

저는 염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죽은 사람과 말없는 대화를 할 때가 많습니다. 아쉽게 간 분과는 안타까운 대화가 오갑니다. “성도님! 이렇게 되려고 그렇게 뛰었습니까?” 반면에 멋지게 간 분과는 기분 좋은 대화가 오갑니다. “권사님! 천국에서 만나요! 권사님의 아름다운 삶을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그런 대화가 오가면 얼마나 흐뭇한지 모릅니다.  

죽음은 많은 교훈을 줍니다. 자녀교육 중에서도 부모의 아름다운 죽음만큼 소중한 자녀교육은 없습니다. 어떤 여자 집사님은 교회에서 묵묵히 봉사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분은 순교자의 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순교했다는 사실을 항상 소중하게 기억하니까 순교자적인 아름다운 삶이 그녀의 삶에도 체질화된 것입니다. 부모가 남겨줄 수 있는 최후의 가장 좋은 가르침은 아름답게 임종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임종할 때 “얘야! 하나님을 잘 섬겨라!” 하고 임종하면 그 후손이 어떻게 잘못되겠습니까? 
  
죽음은 남다른 많은 교훈을 줍니다. 그러므로 초상집은 가급적 열심히 찾아가십시오. 결혼식은 가지 못해도 초상집에는 꼭 가고 죽은 사람을 무섭게 여기지 말며 염할 때 가급적 꼭 입회하십시오. 그러면 인생의 많은 교훈을 얻습니다. 그처럼 지혜의 샘이 흐르는 곳을 자주 찾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3.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죽음은 모든 인생의 평가를 결론짓습니다. 가끔 보면 평소에는 아주 시시하게 보였던 사람이 죽을 때는 멋지게 죽는 경우를 봅니다.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처럼 죽을 때 잘 죽고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현재 최선의 땀을 흘리십시오

지혜로운 사람은 내세를 확신하면서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미래를 대비하며 현재를 충실하게 살려는 믿음이 건강한 믿음입니다. 본문 3절에서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고 할 때 이 웃음은 현실을 외면하는 거짓된 웃음을 뜻합니다. 억지로 즐거운 척 하면 허위의식이 생기고 자꾸 무리한 요행수를 찾다가 나중에는 더 불행해집니다.  

땀이 없는 행운은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괌 비행기가 추락사건으로 죽은 사람 중에는 경품에 당첨된 여행권으로 놀러갔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행운을 얻었다고 좋아했던 것이 목숨을 재촉한 것입니다. 그처럼 행운을 복으로 여기지 말고 땀과 정성의 투자를 복으로 여기십시오. 땀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결국은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재능이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성공할 수 있는 충분한 재능을 이미 주셨습니다. 언제 그 재능이 발휘됩니까? 최선의 땀을 흘릴 때 발휘됩니다.

2002년 월드컵 때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히딩크!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그때 히딩크 감독이 무슨 능력을 보여주었습니까? 선수들에게 초능력을 부어 준 것이 아니라 선수들이 가진 능력을 찾아내서 발휘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선수들이 뛰었지만 그들이 가진 역량을 크게 발휘해서 4강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자기만의 재능의 분량, 즉 달란트(talent)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학은 못하는데 예술은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험성적은 안 좋은데 인간관계는 탁월합니다. 그처럼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재능이 있는데 그 재능은 빙산처럼 작은 부분만 드러나 있고 대부분은 감춰져 있습니다. 그런 감춰졌던 재능들이 언제 수면 위로 드러납니까? 열심히 땀을 흘리다가 때가 되면 드러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뜨는 사람들도 자세히 보면 이미 있었던 재능이 때가 되어 발휘된 것입니다.

이제 능력의 부족함을 한탄하기 전에 먼저 자신 안에 주어진 능력을 찾아내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다섯 달란트 가진 사람과 두 달란트 가진 사람을 보면 그들이 가진 기쁨과 그들이 받는 칭찬과 그들이 누리는 삶의 내용이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새로운 능력을 더 달라고 하기 전에 최선의 땀을 흘려서 자신 안에 있는 능력을 찾아내십시오. 그리고 그 능력을 활용해 성공하고 그 성공을 활용해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십시오. 

2) 사랑과 감동을 주고받으십시오  

일전에 한 기관에서 대학생 1천명에게 “당신이 제일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인가?”란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때 ‘자동차, 휴대폰, 애인 등’의 대답이 제일 많이 나올 줄 알았는데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설문에서 대학생들이 가장 받고 싶어 했던 것은 바로 ‘감동’이었습니다. 사람은 감동이 있어야 사는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동에 굶주려 있습니까? 그런 감동을 주고받으며 사십시오. 어떤 사람은 “나는 줄 것이 없어서 감동을 줄 수 없다.”고 하지만 적은 정성으로도 얼마든지 감동을 주고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11년간 쓴 수백 편의 사랑칼럼을 썼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반응이 좋았던 글은 제레미 얘기입니다. 미국 남부에 제레미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했지만 한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학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마침내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통지서를 받던 날, 그는 기쁨과 감격으로 평생 흘려도 모자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대학 근처로 거처를 옮기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근처 농장에서 일자리를 얻어 일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점심도시락을 싸올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점심식사 때마다 남들이 다 식사하면 그는 조용히 헛간 뒤쪽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이 “왜 점심을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는 “속이 좋지 않다. 배고프지 않다. 점심은 보통 안 먹는다.”고 변명하고 헛간 뒤쪽으로 가서 수돗물만 실컷 마셨습니다. 

어느 날, 점심식사 때 인부 조장이 큰 소리로 벌컥 화를 냈습니다. “이 놈의 마누라가 내가 돼진 줄 알아! 속도 안 좋은데 이렇게 많이 싸줘. 누구 내 도시락 먹어줄 사람 없어!” 제레미는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얻어먹는 것이 아니고 남는 것을 먹어주는 것이니까 부끄러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장 아저씨의 남은 도시락을 먹어 주었습니다.   

다음날도 조장 아저씨가 버럭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이 놈의 마누라가 도대체 정신이 없어! 왜 이렇게 항상 많이 싸주는 거야! 누구 내 도시락 먹어줄 사람 없어!” 그날도 제레미는 아무 부담 없이 조장 아저씨의 도시락을 먹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거의 한 달 동안 조장 아저씨의 남은 도시락을 매일 먹어 주었습니다. 

한 달 후,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그는 농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기숙사로 들어가던 날 그는 조장 아저씨 부부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넓은 농장에서 조장 아저씨를 찾을 길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경리 아가씨에게 조장 아저씨와 그 부인께 작은 선물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경리 아가씨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조장 아저씨 부인이요? 그분은 몇 해 전에 돌아가셨어요.“   

받는 사람의 자존심과 기분까지 생각하며 도시락을 나눠주려는 그 조장 아저씨의 모습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그런 감동을 위해 주님은 오른손의 봉사를 왼손조차 모르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가 선교헌금을 하고도 자기조차 얼마를 헌금했는지 잘 모릅니다. 가슴이 한 것을 머리가 모르게 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헌금하면서 “목사님! 조용히 하고 싶어요! 아무도 알리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그때마다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대개 보면 없어서 못 주는 것이 아니라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기쁨을 모르기에 못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을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부자도 없고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자도 없습니다. 삶의 감동은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형편에서도 충분히 감동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감동을 주고받을 때 그 이름이 아름다운 이름이 될 것입니다.   

3)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십시오

지식 중에 최고의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업적 중에 최고의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삶의 최고목적으로 삼아야 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모든 삶은 그 목적을 향해 공명해야 합니다.   

왜 돈을 열심히 법니까? 자녀에게 유산을 많이 남겨 주기 위해서입니까? 그러나 많은 유산은 오히려 자녀를 망칩니다. 사람은 땀과 은혜로 사는 것이지 유산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피땀으로 얻지 않는 재물은 언젠가 피눈물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버는 목적은 소유와 저축이 아닌 영혼구원과 이웃사랑을 위한 나눔에 맞춰져야 합니다. 그 목적을 이루는 것이 최고로 잘 사는 것이고 최고로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당하게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영적인 커밍아웃(coming out)을 하십시오.   

미국에서는 매년 10월 1일에 큰 행사가 벌어집니다. 그날은 동성애자들이 커밍아웃을 하는 날입니다. 그때 동성애자들이 “나는 동성애자다.”라고 자신을 드러내며 시위하고 데모하고 전국적인 행사를 합니다. 그처럼 동성애자도 자신을 드러내는데 성도가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신령한 시위를 통해 삶을 보람 있게 만들어 가십시오.

물론 “믿는다!”고 말만 하면 영향력이 없습니다. “믿는다!”고 고백하고 최선을 다해 이웃을 섬겨주어야 합니다. ‘말의 믿음’보다 ‘섬김의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처럼 믿음을 드러내고 최선을 다해 섬길 때 영향력이 생기고 전도도 되고 본인도 축복받습니다.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섬김 받는 사람보다 섬기는 사람이 축복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섬기는 것을 싫어하고 섬김만 받으려고 하는데 섬김만 받으려고 하면 어느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섬김 받기만 좋아하면 요새 “싸가지가 없다!”고 표현합니다. “싸가지가 없다!”는 말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싹수가 없다!”는 말의 사투리인데 어떤 분은 ‘싹과 가지가 없는 것’이 ‘싸가지가 없는 것’의 원래 의미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싸가지가 없다!”는 말은 “인물 되기는 틀렸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인물 되려면 섬기는 태도를 잘 체질화시켜서 싹과 가지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대개 천한 일과 섬기는 일을 가리지 않고 다 했던 사람들입니다. 요즘 취직이 안 된다고 아우성을 치지만 사실상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입니다. 기꺼이 종이 될 결심을 하고 구인광고에 “어떤 일을 맡겨도 종처럼 섬기겠습니다. 나를 써주세요!”라고 하면 당장 취직될 것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성공했습니까? 금식기도를 잘해서 출세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30세에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나 행운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13년 동안 노예로 보디발의 집을 섬겼고 감옥에 가서도 죄수로서 죄수들을 섬겼습니다. 그처럼 섬길 줄 알았기에 결국 총리가 된 것입니다. 항상 현재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열심히 섬겨주십시오. 그것이 교회를 세우는 비결이고 축복 받는 비결이고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비결입니다.  


< 죽음을 잘 준비하십시오 >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 <태신자 전도운동>을 시작하며 영적인 커밍아웃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성도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전도에 나서서 숨겨진 재능도 찾아내고 섬김의 훈련도 해보십시오. 전도 대상자가 사랑을 의심해도 끊임없이 섬겨주며 진실한 사랑을 주십시오. 장벽을 만나고 자존심이 상해도 포기하지 말고 잉태한 영혼이 출산될 때까지 끊임없이 기도하고 그 영혼을 하나님 품으로 이끄십시오. 

살다 보면 가끔 누군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받습니다. 그때마다 죽음이 엄중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더 인식하게 됩니다. 그렇게 남이 죽는 것을 보다 보면 어느새 사랑하는 사람 차례도 오고 마침내 자기 차례도 오게 됩니다. 그때 가장 후회가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그의 지옥행을 방치한 사실이 될 것입니다. 그런 회한과 자책이 없도록 사랑하는 사람부터 전도에 나서십시오.   

이제 우리는 곧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준비하며 최선을 다해 사십시오. 우리의 죽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지나온 나날의 삶과 믿음이 진실로 확인되고 또한 우리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멋지게 죽는 모습을 보고 존경하는 마음과 내일의 소망을 가지게 된다면 그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이 되겠습니까? 더 나아가 무엇보다 많은 영혼을 구한 실적을 가지고 주님 앞에 어엿이 선다면 그 삶이 얼마나 더욱 복된 삶이 되입니까?  

항상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영혼을 많이 구하고 교회를 잘 섬기며 아름다운 임종을 맞이하게 하소서.”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 삶도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장래에 주님 앞에 서게 될 날을 생각하며 오늘의 삶을 충실히 살 때 그 인생은 누구보다 행복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항상 열심히 땀을 흘리며 살고, 감동도 많이 주고받고, 복음을 힘써 전파하면서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고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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