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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어린 양 (요 1: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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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어린 양 (요 1:29-34)


어느 추운 겨울날 항해하던 어선이 파도에 침몰됐습니다. 어선에서는 사람들이 구조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바람을 타고 어촌에까지 들렸습니다. 어부들이 구명보트를 가지고 파선된 배로 가서 표류하는 사람들을 구조해 태워 돌아오는데 침몰된 배에 또 한 사람이 남아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파도가 높고 구명보트도 만원이라 더 태울 수가 없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으면 다시 태우러오겠습니다.” 

노를 젓고 있던 젊은이가 소리쳤습니다. 구명보트가 간신히 육지에 와 닿았을 때 모든 사람들이 기진맥진하여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난파선에 남아 있는 사람과 약속한 젊은이는 혼자서 배를 저어 다시 난파선으로 가려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홀어머니가 극구 만류했습니다. 
“이놈아 너의 아버지도 익사했고 너의 형은 어선을 타고 나가 실종된 지 3년이다. 이제 너 하나만 남았는데 너마저 잘못되면 나는 어찌 살겠느냐?”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파도 속을 뚫고 힘차게 노를 저어 나갔습니다. 
“어머니 염려 말고 기도하세요. 나는 예수님을 모시고 갔다 오겠습니다.” 
청년은 무사히 난파선에 남은 사람을 구해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가 구해온 사람은 바로 실종된 그의 형님이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의 편에 서 있지만, 예수님은 한 마리의 양의 편에 서 계신다.
나는 숫자를 보지만, 예수님은 영혼을 보신다.
나는 의로운 군중 편에 서 있지만,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 편에 서 계신다
나는 죄를 보지만, 예수님은 영혼을 보신다.

나는 어른의 편에 서 있지만,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편에 서 계신다.
나는 부자의 편에 서 있지만, 예수님은 연약한 자들의 편에 서 계신다.
나는 재물을 보지만, 예수님은 영혼을 보신다.
나는 삯꾼 목자의 편에 서 있지만,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편에 서 계신다.
나는 직분을 보지만, 예수님은 영혼을 보신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생각을 닮아가기를 추구합니다. 주님의 생각과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영혼을 바라보십시오.
이 시간 그러므로 우리들이 드려야 할 기도는 “주님, 주님의 시각으로 다른 이들의 영혼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여야 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영혼을 바라볼 때 주님의 마음이 느껴집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 시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교회를 다니고 있고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한데 과연 우리는 그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요한이 예수를 누구라고 증거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진짜 저 사람이 누굴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때는 없습니까? 가장 가까운 친구,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인데 어느 날 문득 한 번도 생각지도 못했던 아주 낯선 느낌으로 다가올 때의 그 당황스러움을 뭐라고 할까요? 

그런데 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그러는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인가입니다. 나에 대해서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한데 어느 순간 이러는 나를 나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일에 자신만만했던 그 모습이 어디로 사라지고 갑자기 겁쟁이처럼 비겁한 사람처럼 변해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 내가 이러고 있는가 하면서 이런 내가 나도 싫다고 몸부림쳤던 기억들이 혹 있지는 않으신지요? 우리 어린 학생들 같으면 어머니에게 잘 해 드리고 싶고 아버지께 공손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마음과는 달리 그냥 신경질만 부리고 “싫어! 안 해!” 하면서 대들기도 하는 그런 내가 너무 싫지는 않나요? 마음으로는 미안한데 입으로는 죽어도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고 버티는 그런 내가 이상하게 느껴질 때는 없었던가요?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그런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데도 온통 불만으로 가득해서 입이 십리도 더 나온 것처럼 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데, 가진 것 하나도 없으면서도 그저 싱글벙글하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도 있는 것을 봅니다. 하여간 내 스스로 생각해 볼 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남들은 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데도 내가 볼 때는 아니에요. 

또 어떤 사람은 남들이 다 욕하는데 실상은 내가 과연 그렇게 욕먹을 짓을 했나 아냐 나는 절대 그런 적이 없어 그런데도 오해를 받아서 욕을 먹을 수밖에 없을 때 그 아픔은 또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다 잃고 나서야 후회하는 사람도 많이 있죠. 있을 때는 소중한 줄 모르고 함부로 대하다가 잃고 난 다음에야 땅을 치고 통곡을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늘 후회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내 딴에 잘 하는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는 몰라요. 그런데 어떤 어려움이 생기고 나면 그때서야 알죠. 하지만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그런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청개구리처럼 뒤늦게 후회하지만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은 다시 돌아오시지 않죠.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는 그 세월을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죽하면 있을 때 잘 하라는 노래까지 나오겠습니까?

하여간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그런 우리가 누구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내가 그 사람을 아주 오랫동안 잘 알아온 것도 아니고 이제 막 마주친 입장에서 그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한다고 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금 요한이 바로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한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그 요한에게 자신도 세례를 받겠다고 하십니다. 요한은 당연히 펄쩍 뛰죠.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지만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여 세례를 베풉니다. 

그때 요한이 무리들 앞에서 예수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자기가 전에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킨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도 그를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자기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도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누구냐 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지금까지 수고한 모든 것이 바로 이 분을 증거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아니 세상에 있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미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그 죄인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만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이 처음 만드실 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좋도록 만들었는데 그 아름다운 사람들이 영원한 불못으로 던져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픕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저 포항제철의 지글지글 끓는 용광로 불덩이 속으로 던져지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마음 아플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어제 평택의 한 가구 전시장에서 난 불을 진화하던 소방관 두 분이 순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분은 4살 난 쌍둥이 아들을 둔 가장으로 임신 중인 아내를 놓아둔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분들이 그렇게 될 줄을 알았다고 한다면 누군들 거기에 들어가도록 했겠습니까? 

바로 그런 아픔 끝에 하나님이 한 가지 결심을 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가도록 그냥 놓아둘 수 없는데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 줌으로 모든 사람들이 죄의 길에서 벗어나 영원한 속죄를 얻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만들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원래 양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죗값으로 드렸던 제물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제물로 드려지는 어린 양이라고 요한은 증거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면 처음부터 죽기를 작정하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기로 작정하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십자가는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사형을 집행하는 형틀입니다. 하지만 그 죽음의 형틀이야말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가 바로 나를 위해 죽으신 분이라고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함으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해야 하는 것이요 한 가지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그런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랑받을 어떤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온통 시커먼 마음으로 가득한 우리들이었습니다. 온갖 못된 짓은 다 하고 다니던 우리였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솔직히 내 안에 있는 그 시커먼 마음을 아니라고 하시겠습니까? 남이 갖고 있는 것 중에 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갖고 싶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누군가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가요? 아니 나 자신을 스스로 죽여 버리고 싶었던 때 그러니까 자살하고 싶었던 때는 또 없었습니까?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하는 분도 물론 계십니다. 열이면 아홉 적어도 한 번쯤은 그런 생각들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안 죽었죠? 그건 용기가 없어서이기도 하고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의 마음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누구를 생각해서라도 나는 죽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바꾸도록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정말 내 마음대로 다 할 수만 있다면 도대체 우리가 죽여 버렸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순전히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지금 더욱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여 이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고 또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품어 우리가 이 땅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전도자가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이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요한은 두 번씩이나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고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겠습니까? 요한이 그렇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그러니까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무는 것을 보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뭐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 위에 머물면 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가 그렇게 증언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나를 보내신 이 즉 하나님께서 이미 요한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보거든 알라고 하나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봤습니다. “내가 보매, 내가 보고” 요한은 봤다고 말합니다. 그냥 언뜻 본 것이 아닙니다. 여기 본다고 하는 헬라어는 단지 그냥 보는 것 그냥 의미없이 보는 것이 아닌 아주 관심을 가지고 똑똑하게 주목해서 본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see가 아니라 watch) 

요한은 자기 눈으로 분명히 봤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미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그 머리 위에 머물러 있는 이 분이야말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는 어디까지나 증인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주목하여 본 것을, 똑똑히 본 것을 증언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똑똑히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예수 그분이 누구냐 하면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것도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사실 죄가 무서운 것은 우리 사이를 갈라놓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이루고자 사람을 만드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결과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들이 동산 숲속으로 들어가 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야 하는데 이젠 이상하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이 땅에 충만하며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했는데 그랬던 사람이 뱀의 말을 듣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는 순종하고 뱀은 정복해야 될 대상인데 거꾸로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를 않고 뱀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하나님을 피하고 있습니다. 짐승이 머무는 숲속으로 스스로 들어가 숨습니다. 결국 존귀한 인간의 자리로부터 짐승의 자리로 스스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뭐라고 가르칩니까?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동물 가운데 하나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생령으로 만드셨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생령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아 결국 죽은 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우리도 다 알다 시피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예수를 나의 구주가 되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래 우리는 다 생령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다시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세상에 오신 그 예수를 우리가 확실히 믿고 붙잡고 그분만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복해서 우리를 특별한 소유가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이 내 안에 머무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성령이 내 안에 비둘기 같이 머무십니다. 나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단 말입니다. 그리고 비둘기는 또한 전달자입니다. 소식을 전하는 우체부입니다. 하늘나라의 소식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안에서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 마음을 그 말씀으로 어루만져 주시는 그 손길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마다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께서 설교자의 입을 통해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하고 모든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인 줄 알아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들을 때 다른 데로 생각이 나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요한이 주목하여 본 것처럼 우리도 주목하여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온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부딪치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잠이 안 와서 뒤척이는 그 시간에도 그저 잠이 안 온다고 괴로워만 할 것이 아니라 내게 잠을 주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렇다면 깨어 있는 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말씀으로 내게 말씀하기를 원하시는지 마음을 열고 들을 수 있어야 하고 그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아픔이 있다면 그 아픔의 이유가 무엇인지 그 이유가 내 안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어떤 바르지 못한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나로 하여금 누군가를 아파하며 돌아볼 수 있도록 깨우쳐주시기 위한 것인지 하나님께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생각해보면 요한은 이 날을 위해서 광야에서 낙타 가죽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음식 삼아 지냈습니다. 광야는 한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려쬡니다. 보통 40도 50도 기온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밤에는 영하로 떨어지기까지 합니다. 그런 곳에서 지내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렇다고 먹거리나 충분합니까? 광야에 무슨 먹거리가 그렇게 있겠습니까? 메뚜기인들 광야에 풀도 없는데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날이면 날마다 꿀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풀이 있고 꽃이 있어야 꿀도 있지 그렇지 않은데 무슨 꿀이 그렇게 많아서 날마다 그것을 먹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그 어려운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그렇다면 누구십니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우리는 귀를 기울여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의 사자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건 설교 말씀이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설교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내게 하고 싶어하시는지 그 하나님의 마음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니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했다고 하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별로 가슴에 와 닿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흔히 하는 투정처럼 “엄마가 나를 위해 해주는 게 뭐 있어? 밤낮 이거 하라 저거 하지 말라 잔소리만 하고, 그저 엄마가 아는 건 공부, 공부, 공부밖에 없지?” 결국 아이들은 날마다 어머니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을 부인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사랑이라는 걸 아이들이 몰라요. 아이들은 그저 단순해서 자기들 좋아하는 것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사랑인줄 알아요. 한데 어때요? 정말 그게 사랑인가요? 

사랑하기에 아이가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잔소리도 하고 공부 공부하라고도 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이제는 공부도 자원해서 할 수 있도록 분위기도 만들어 주고 공부가 재미있도록 만들어줄 책임이 부모에게 있는데 우리는 그런 방면에는 아주 서툴러요? 그래 어떤 때는 공부를 게임처럼 만들어줄 수는 없을까? 교과서를 전부 만화로 만들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날마다 함께 지내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도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 아이들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날마다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한번은 죽습니다. 어찌 보면 이 세상에 오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일하며 바쁘게 사는 것일까요? 모두 다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바보같이 삽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위하여 시간과 마음을 다 쏟아 붓고 살다가 죽는 순간에 후회합니다. 
“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했을까? 왜 용서하지 못했을까? 왜 나누어 주지 못했을까?”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에야 보이는 것이 있고 들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죽을 준비입니다. 언제 죽더라도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에게 열려지는 것은 영원한 불못의 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있는가? 예수님처럼 한 생명을 위해서 나를 죽이는 그 참 사랑이 내 안에 있는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로 와서 배우라”고 하셨는데 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가? 주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요한은 한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기를 주님이 원하시는가를 깊이 깨달아 마지막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정말 후회없도록 주님의 마음을 품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랑의 실천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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