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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 (창 6: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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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 (창 6:13-22)

(창 6:5-7)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당시는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실 정도로 불법과 불의로 가득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노아는 의로움으로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창 6:8-9)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의 증조부는 믿음의 사람 에녹입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또 그의 나이 252세 때에 손자 라멕이 태어났습니다. 에녹이 승천할 때 라멕은 113세였음을 쉽게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므두셀라와 라멕은 에녹이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하며 하나님과 동행하였는지를 삶에서 경험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할아버지 므두셀라와 아버지 라멕의 교육 속에 자라난 노아는 경건한 가정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으로부터 노아의 세 자녀 셈과 함과 야벳의 출생까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누가 몇 세에 누구를 낳았고 몇 년을 살다가 몇 세에 죽었더라...”는 형식으로 기록을 하였는데 두 사람에게서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에녹에 관해서입니다.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또 한 사람은 노아의 아버지 라멕에 관해서입니다.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본문을 통해 볼 때 라멕은 탄식하는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수고롭게 일하는 인생들이 되었음을 애통해 했던 것입니다. 즉 수고로운 삶 때문에 탄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인하여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탄식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의 위로와 안식이 다시 주어질 것을 소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좋은 신앙의 부모에게서 교육을 받았기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강교회 모든 성도님들도 자녀들을 의롭고 완전한 자로 키울 수 있는 믿음의 부모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오늘은 11월의 마지막 주일이자 강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이 시간 믿음으로 성장하여 세상과 구별된 모습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은 노아와 그의 방주 이야기를 통해 묵은해의 마무리와 새해의 결단을 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1.노아의 삶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이었습니다.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135m, 폭은 22.5m, 높이는 13.5m입니다. 한 층이 약 940평, 배수량은 약 20,000톤이 넘는데 한국 창조과학회 김 명현 박사는 노아의 방주 크기는 각 동물의 종을 대표하는 포유류 3,500여종, 파충류와 양서류 5,500여종 조류 8,600여종 등 17,600 여종을 한 쌍씩 태울 수 있는 적당한 공간이라고 말했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3층으로 돼있습니다. 그런데 창문을 3층 꼭대기 천장에서 한 규빗(45cm)되는 곳에 달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보통 창을 낼 때는 사람의 가슴정도의 위치에 내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인데, 하나님의 방법은 천장에 창문을 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위로 열린 창문, 하늘만 보이는 창문을 통해서 노아와 그 집 식구들은 하늘만 바라봄으로 위로와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면 위로와 소망, 새 힘이 넘칩니다. 만일 옆으로 낸 창문이 있었다면 보이는 것들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대홍수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근심, 걱정이 몰려 왔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끝없이 불안, 염려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옆에 창문이 달려 있어서, 세상을 향해 창문이 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 열린 창문을 닫아야 합니다.

(신 4:34-35)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환난의 홍수, 시험의 파도가 몰려올 때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느낌에 속지 말고 주님의 말씀과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믿음의 눈으로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노아의 방주는 돛과 노와 닻이 없는 배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라고 하시면서 주신 설계도는 예상 외로 간단합니다. 크기와 형태에 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노아에게 배를 훌륭하게 몰고 가는 기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120년간의 수고로 배를 만들게 하시면서 상식적이지 않은 모양의 배를 짓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노아의 방주는 전진을 위한, 그리고 항해를 위한 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방주에 타고 있었던 375일 동안 노아가 배의 운항이나 정박을 위해 취한 행동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물에 떠올랐고 움직였으며 아라랏산 꼭대기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시 23:1-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139:9-10)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삶을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권능의 오른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창 7:15-16)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는 그것을 완수하기까지 결코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순종한 12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늘 함께 하셨습니다. 또한 방주를 완성한 뒤 대홍수를 앞두고 방주에 오르자 그 문을 닫아주시며 끝까지 책임져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명을 받은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동행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2. 노아의 삶은 예배하는 삶이었습니다.

(8:7-12)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홍수가 시작된 후 일곱 달 17일이 지나서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러 섰으며, 또한 열 달이 지나자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8:4-5)

노아는 그 후 40일이 지나서 방주 밖의 상황을 살피고자 창문을 열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수차례에 걸친 실험 끝에 드디어 밖으로 날려 보낸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정결한 짐승과 새는 암수 일곱씩을 실으므로 제사에 사용할 제물들을 충분히 예비하였던 것과 더불어 10절과 12절에 거듭해서 기록 된 “또 칠 일을 기다려...”라는 표현에서 성경은 노아의 삶이 안식일을 지키는 삶이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돌아오지 않은 마지막 비둘기를 날려 보낸 것이 홍수 후 287일, 즉 41주가 지나서였습니다. 이것을 우연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들을 온전히 준행하였던 노아였기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으리라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장거리 여행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대학생 때 수원과 울산을 매주 한 차례씩 왕복했습니다. 거의 직각으로 세워진 당시 통일호 열차의 의자에서 다섯 시간을 꼬박 시달려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는데 처음엔 어찌 그리 더디게 느껴지던지... 하지만 반복될수록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깜빡 졸았을 뿐인데 서울역에 혹은 부산역에 내릴 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웬만한 두어 시간의 거리는 단거리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을 방문했던 2008년에는 직항노선이 없어서 프랑스를 경유해서 가야 했었는데 대기 시간까지 포함해서 총 36시간이 걸리는 세계에서 가장 장거리의 여행이었습니다. 물론 처음 이민 왔던 교민들은 배로 세 달이 걸렸다고 하니까 그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겠지만, 안락한 비행기 안에서의 여정이었음에도 마침내 브라질 상파울로의 과룰로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 안에서 벗어나 공항 로비로 나오면서 얼마나 후련해했는지 모릅니다.

하물며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어떠했을까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 둘째 달 열 이렛날에 방주로 들어가서 육백일 년 둘째 달 스무 이렛날에 나왔으니 장장 375일이라는 오랜 시간을 오직 방주 안에서만 생활했습니다. 1년 하고도 10일을 더 보탠, 어찌 생각해보면 지긋지긋했을 방주에서의 생활, 원망도 불평도 나올 법한데 그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을 통해 노아는 의롭고 온전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신앙의 위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 138:1-3)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응답받기를 소원하신다면, 환난 많은 세상 속에서도 승리하기를 원하신다면 예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노아의 삶은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6:5-9)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가 의인이라, 완전한 자라 칭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그와 그의 가족은.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던 타락한 세상 중에 살면서도 하나님께 은혜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동행(同行)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같이 길을 감’ 또는 ‘같이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7: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에게 주어진 사명은 결코 간단한 일도, 쉬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120년이라는 장구한 시간동안 온 가족이 사람들에게 온갖 조롱과 손가락질을 받는 것을 감내하며 감당해야 하는 너무나도 어려운 사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들을 다 준행하였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모두’ 지켜 행했던 것입니다.

또한 280일째 날려 보낸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잎사귀’, 즉 새롭게 피어난 푸른 잎사귀를 물고 왔다는 것은 사람이 살기에 충분한 땅이 드러났다는 반증임에도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만 기다릴 뿐, 언제 내릴지에 대한 고민도 질문도 하지 않고 그 후로도 95일 동안을 기다렸습니다.

(8:13-16)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둘째 달 스무 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특히 방주에서 나오기 57일 전, 노아는 모든 땅이 드러났음을 이미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노아를 방주에서 나오게 한 것은 비둘기가 물고 온 감람나무 새 잎사귀도, 뚜껑을 제치고 눈으로 본 결과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요즘의 신앙인들은 헛똑똑이들이 많습니다. 나름 영악하게 신앙생활 한답시고 명령이 떨어질 때를 기다리는 노아의 모습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아브라함의 삶을 미련하게 보는 성도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신에게 온 편지를 읽지 못하시고 우체부를 통해 들으시던 옛 어르신들이 경험하셨던 기적의 체험도, 은사의 체험도 점점 멀어지는 듯합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 70대 중반이신 할머니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성도들을 차에 태우고 온천을 가던 중 아침 뉴스 시간에 날씨예보를 못보고 나왔기에 문득 궁금해져서 함께 타고 계신 분들께 여쭤봤습니다. “혹시 오늘 비가 내린다고 하던가요?” 그때 그 집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고 참, 목사님께서도 모르시는데 우리가 어찌 아남유~”

집사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기 전, 그래도 목사님에게 먼저 말씀해 주시는 줄로 아셨던 것입니다.

조금은 미련해져도 좋습니다. 머리로 경험으로 믿는 성도들은 사탄의 올무에 걸리기 쉽습니다.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히 10:22-25)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처럼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상식보다 우선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세의 혼탁함 속에서도 하나님께 구별함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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