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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게 복을 주고 (창 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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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복을 주고(창 26:2-4)

1. 순종함으로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은 하란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란에서 서쪽으로 약 100 km쯤 가면 유브라데 강 본류를 만나게 되는데 큰 강입니다. 거기 유브라데 강 서안에 있는 도시가 바로 ‘갈그미스(Carchemish)’입니다. 고대에 유명한 도시였는데 현재는 시리아와의 국경 가까이 터키에 있습니다. 현재는 폐허로 변해버렸지만 옛날에는 고대 히타이트 제국의 한 왕국의 수도였다고 합니다. 후에 앗수르 제국의 중요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갈그미스는 지리적으로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대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그리고 소아시아, 애굽의 상인들이 낙타에 물건을 싣고 와서 여기서 물건을 풀거나 교역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 바로 이곳에서 유브라데 강을 건넜을 것입니다.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그리고 하란에서 얻은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그리고 소와 양들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걸어서 유브라데 강을 건넜을 것입니다. 종들이 수백명(적어도 100여명은 되었을 것임)이 있었다고 하니까 대부대였습니다. 조그만 한 부족이 통째로 이주한 것과 같습니다. 그 많은 가족들을 데리고 살기엔 갈대아 우르나 하란, 갈그미스가 제격이었지만 아브라함과 그 일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브라데 강을 건너 남서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세상의 안락보다 하나님의 명령이 우선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약 600km 정도의 여정 끝에 다메섹을 지나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창 12:5에 보면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통과하여 계속 내려가서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는데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가나안 사람’은 가나안 땅에 살던 사람들 전체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의 자손들을 가리킵니다(창 10:15-18). 구체적으로는 일곱 족이 있었습니다. 헷 족, 기르가스 족, 아모리 족, 가나안 족, 브리스 족, 히위 족, 여부스 족, 이렇게 일곱 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여러 족의 사람들이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행 7: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너무나도 힘든 여정 끝에 당도한 땅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아브라함이 소유로 삼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7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장 ‘아브라함’에게 주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미래의 약속, 약 700년 후에 이루어질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700년짜리 약속어음을 주셨습니다. 사실은 여기에 몇 년이란 말은 없고 그냥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낙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거기서 단을 쌓았습니다.

(창 6: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7절 끝에 보면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을 쌓았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돌을 가져다가 단을 쌓고, 그 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단을 쌓은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간구’의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 약속하신 대로 이 땅을 제 자손에게 주옵소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에서는 물론이요, 어려운 상황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처럼 흔들림 없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은 그곳에 정착하지 않았을까요? 당시 다메섹의 니콜라스(주전 1시기)가 쓴 책에는 아브라함은 갈대아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쳐들어온 침입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나 토착민들의 심한 경계를 당한 탓에 터를 잡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할 수없이 아브라함은 약 35 km를 남쪽으로 내려가서 벧엘과 아이 사이 산에다 장막을 쳤습니다. 8절에 보면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쳤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벧엘에 들어갈 수도 아이에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믿고 전적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은 형통은커녕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벧엘과 아이 사이의 산에다 장막을 치고, 거기서 하나님을 위해 또다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8절 끝에 보면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또다시 핍박을 받게 되고 아브라함은 또 장막을 걷고 짐을 챙기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그 일행은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다고 합니다(9절). 여기서 ‘남방’은 네게브인데, 남방을 뜻할 수도 있고 또 네게브 사막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사막 외에는 아브라함 일행이 머물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조금만 힘들어도 “나름 교회 열심히 다니는데 왜 나에게 이런 환난을 허락하십니까?” 쉽게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개되심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것을 알고 믿었기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는 어마어마한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심으로 범사에 복을 받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창 24:1)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2. 기도로 백배의 결실을 거둔 이삭

(창 24: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교육을 통해 기도로 복을 누릴 줄 아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아내 리브가를 맞이할 때도 어떤 여인일까 궁금해 하며 고민하기보다는 들에 나가 묵상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형통의 복을 더하셨습니다.

(창 25:5)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창 25:11)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창 26:28-29)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한 이삭은(창 25:20, 26) 20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때도 이삭은 기도했습니다.

(창 25: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들이 태중에서 다투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도 이삭은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창 25: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이처럼 이삭은 만사에 기도로 문제를 해결했던 것입니다.

(창 26:2-4)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모든 것을 종합해 유추해 볼 때 이삭이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가려다가 그랄 땅에 머물게 된 것도 기도의 응답 때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극심한 흉년이 든 그랄 땅에서 백배나 거두고 마침내 거부가 되는 놀라운 복을 받았습니다.

(창 26:12-13)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는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응답이 더디다고 실망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계속되는 우리의 기도에 마침내 응답하십니다. 마침내 이루어 주십니다. 마침내 승리하게 하십니다.
또한 이러한 이삭의 기도가 아들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켰습니다.


3. 최선의 충성으로 상황을 역전시킨 야곱

(창 25: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야곱은 가지고 있는 욕심에 비해 주어진 현실은 그리 평탄하질 못했습니다. 태중에서부터 장자가 되길 원하여 다툼을 벌였지만 차자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받을 복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창 25:3-34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장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을 절실하게 사모한 야곱은 그것을 받을 수 있었고 반면, 대수롭지 않게 여긴 에서는 그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가 잃어버린, 그래서 받기를 사모한 야곱에게 주어진 복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창 28:13-15)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떠난 결정적인 원인은 장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빼앗긴 에서의 분노를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창 27:42-44)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황급히 서둘러 에서를 피해야 했기에 변변한 준비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아버지의 풍요로운 집을 떠나 하란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한 야곱은 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습니다.

(창 28:10-11)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졸지에 부잣집 도련님에서 노숙자의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분명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너무나도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복을 베풀기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얼마나 대단한 축복입니까?

그 후 20년의 세월, 욕심쟁이 삼촌 라반의 계략과 착취에도 불구하고 브엘세바로 다시 돌아오는 야곱의 모습은 그 누가 보더라도 복 받은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창 30:43)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야곱은 고백합니다.

(창 32: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올림픽을 앞둔 대표선수는 조금이라도 향상된 기록을 얻기 위해 사력을 다해 훈련에 임합니다. ‘몬주익의 영웅’ 마라토너 황영조 선수도 선수시절 일주일에 2~3회 5시간씩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네 시간 정도 뛰면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지요. 거의 동물이 된다고 보면 맞습니다. 너무 힘들어 눈도 크게 못 뜨고 실눈 뜨고 뜁니다. 그러면서 끝없이 갈등하죠. 언제까지 뛰어야 하나. 내가 왜 마라톤을 했을까. 죽으면 편해지겠지. 죽으면 그만이고, 다치면 몇 달 쉬겠지.... 나중엔 정신이 몸을 따라가죠. 저 같이 정신력 강한 인간도 말입니다."

그렇게 고된 훈련의 반복으로 지친 황영조 선수는 갈등 끝에 차라리 죽어버리기로 마음먹고 양재동에서 달리는 트럭에 뛰어들었습니다. 다행히 운전사의 급제동으로 화는 면했으나 평생 먹을 욕을 한 번에 다 먹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도 두 번을 더 그렇게 트럭에 뛰어들었다고 하니 그 훈련의 강도가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됩니다.

신앙에도 선한 욕심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신앙적인 선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지팡이만 가지고 건넌 요단강에 20년 후 다시 이르렀을 때 두 떼나 이루는 엄청난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이 정도면 되겠지’하는 ‘자기만족’ 내지 ‘자아도취’입니다.

(마 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그래서 많은 신앙인들이 열심을 내는 것을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지금보다 적어도 백배는 더 복 받은 삶입니다.

1마일은 1,760야드로 약 1,609미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반세기 전만해도 1마일을 4분 안에 달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속도로 볼 때 440야드 트랙 네 바퀴를 4분 안에 달리는 일은 죽음에 도전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분위기였습니다.

당시의 통념으론 1마일을 4분 안에 달리려 고집하면 결국 인간의 폐와 심장이 파열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심한 스트레스와 긴장이 가해지면, 뼈가 부러지고, 관절이 파열되며, 근육과 인대, 힘줄이 찢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인간이 4분 안에 1마일을 달린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넘을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장벽이었던 셈입니다.

세계 최초로 '1마일 4분벽'을 깬 로저 배니스터는 전형적인 영국의 젠틀맨 아마추어 육상선수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엑서터칼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간 의대생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1마일 4분벽에 도전하는 것은 영혼의 도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의대생답게 인간이 견뎌낼 수 있는 최대의 고통과 최고의 라스트 스퍼트 방법을 연구하였습니다. 100야드 단거리 경주나 마라톤과 달리 1마일 경주를 위해서는 스피드와 스테미너가 최대한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로저 배니스터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 1,500미터 경기에서도 유력한 우승후보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성적은 예상을 깨고 기대에 턱없이 못 미친 4등에 그쳤습니다. 만약 그가 이 경기에서 우승했더라면 그는 아마도 '1마일 4분벽' 을 깨는 도전에 나서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는 헬싱키 올림픽에서의 패배를 만회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1마일을 4분안에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1954년 5월 6일, 25세의 로저 배니스터는 1마일 경주의 출발선에 섰습니다. 4분의 1마일 트랙을 60초안에 돌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돌다가 심장이 터질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그렇게 네 바퀴를 돌아 마침내 결승점에 들어온 뒤 의식을 잃고 격심한 고통으로 쓰러졌습니다. ‘3분 59초 4’ 인간의 능력으로는 주파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마의 '1마일 4분벽' 을 드디어 돌파해 낸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다음부터입니다. 로저 베니스터가 마의 4분벽을 깨고 난 후 잇달아 다른 선수들도 차례차례 4분벽을 돌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역사적 기록이 있은 지 한 달 만에 무려 10명의 선수들이 4분벽을 돌파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 후엔 37명이 4분벽을 넘었고, 이 년 만에 그 숫자는 3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아닙니다. 달리기 능력이 개선된 것이라기 보다는 결코 넘을 수 없다고 여겼던 마음의 장벽을 로저배니스터라는 한 젊은이가 깼기 때문입니다.
1마일을 4분안에 주파 하는 것은 결코 '인간이 할 수 없는 영역의 일' 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정작 마의 '1마일 4분벽' 이 깨지자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일단 봇물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는 법입니다. 결국 인간의 한계는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로저 배니스터가 돌파한 것은 단지 4분이라는 시간의 벽이 아니라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심리적 장벽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현재 1마일 최고 기록은 모로코의 히참 엘 구에로가 1999년에 세운 3분 43초입니다. 반세기 전 결코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라고 치부되었던 1마일 4분벽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더 이상 처음으로 4분벽을 깼던 로저 배니스터의 1마일 기록 자체를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로저 배니스터라는 한 젊은이가 남들이 불가능 하다고 여겼던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도전했고 마침내 끝장을 보고야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로저 배니스터는 후에 유명한 신경과 의사가 되었고, 명예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옥스퍼드 대학 펨브룩 칼리지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선한 욕심을 품고 달려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부어 주셨던 은혜, 못지않은 풍성한 복으로 우리에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감히 상상치도 못했던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뒤바뀌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어떠한 상황에도 순종하는 믿음, 환란을 당할 때마다 엎드려 기도함으로 해결 받은 이삭의 믿음, 그리고 선한 욕심을 품고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풍성한 복을 받은 야곱의 믿음을 소유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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