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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겐 증인이 필요합니다 (빌 2: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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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증인이 필요합니다 (빌 2:19-30)

한번은 부흥회를 인도하고 나니 어느 교인이 질문하기를 "정말 목사님 교회에는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있나요?”하였습니다. 정말 감사한 것은 “선한목자교회 교인들은 다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나요?”하고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에게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제게 분명한 확신을 주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존하는 중에는 드러내 놓고 소개하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분들 중에 한분 한분 기록에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김대영 권사님, 이상춘 장로님 등입니다. 

우리에겐 올바른 증인들이 필요합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들은 말로 예수님을 전하는 증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는 증인이 될 사람이 너무나 필요했습니다. 사방에서 핍박하고 조롱합니다. 그런 중에 정말 예수님을 믿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정말 십자가의 도가 복음이며 구원의 능력인가? 갈등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증인입니다. 삶으로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증거할 증인입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증인이 필요합니다. 
한국교회의 어려움은 성경 말씀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성도들을 거의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성경을 보면서 신앙생활했으면 좋았을 것을 먼저 믿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당하고 순교하는 이들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다면 당연히 고난당하는 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적당히 믿는 이들을 보았다면 신앙생활 적당히 해도 되는 줄 알게 됩니다. 먼저 믿는 이들이 싸우면 싸워도 되는 줄 압니다. 성경은 참고 서적일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철저히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고 처음부터 생각하였다면 우리나라 복음화는 먼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성경 말씀대로 사십니까?
처음 믿는 사람에게 “나 처럼 신앙생활하면 됩니다!” 말할 자신이 있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사도 바울에게 “정말 십자가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정말 죽는 것도 기쁠 정도로 천국의 확신을 가지고, 고난도 특권이라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정말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소개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들이 중요한 것은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데모데 같은 마음으로 빌립보 교회를 염려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21절에서는 다 자기만 생각하지 예수님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고도 하였습니다.
무슨 일인데 이처럼 심각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지금 로마에서 빌립보까지 가려면 비행기로 갑니다. 자동차로 가기에 너무 먼 거리입니다. 그 길을 걸어서 가야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 길을 가라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이해되는 일입니다. 교리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말 살아계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길을 디모데는 갔습니다. 이것 하나 만 가지고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셨구나!”  

그것입니다! 주님이 지금도 역사하시는구나! 복음이 말만 아니고, 실제로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구나! 그런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디모데는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졌을까요?
디모데는 2차 전도여행 때 사도 바울을 만났습니다. 당시 사도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전도하다가 동네 사람들이 던지는 돌멩이에 맞아서 거의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실제로 죽은 줄 알고 끌고 가서 성 밖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살아났습니다. 그 현장을  디모데가 다 봤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일어나서 절뚝거리면서 다시 전도하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아마 그 때, 사도 바울에게서 주님을 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 나도 이 바울 선생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따랐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과 함께 봉사하였다고 말합니다.
22절 ,,,그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봉사하였습니다. 
여기서 봉사하였다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다 봉사 한번 했던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 봉사는 빌립보서 3장 7-9절 말씀을 보아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빌 3:7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이 삶에 디모데가 함께 하였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에서도, 데살로니가에서도, 베뢰아에서도, 고린도, 에베소, 지금 로마 감옥까지 함께 전도했고 함께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 말은 디모데도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에바브로디도도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본래 빌립보 교회 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인들이 헌금하여 에바브로디도에게 들려서 사도 바울을 찾아 전해드리라고 보냈습니다. 그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사도 바울을 찾아 로마까지 왔는데, 바울이 너무 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 겨울을 함께 지내기로 했는데, 그만 죽을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 만큼 이 여행이 힘들었고, 옥바라지가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은 정말 간절히 기도할 수 밖에 없었고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바울 사도를 위하여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헌신의 뿌리가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1절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살아계시고 함께 하시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가 진정 예수님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주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사역을 하시는 방선기목사께서 목사가 되려는 직장인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반드시 확인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성경에 대하여 말하면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까? 구원을 받고 삶이 변화되는 일이 일어나십니까? 아니면 아예 신학교 가지 마세요. 목사가 되고 나면 서로 괴롭습니다.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되는 것도 자기 흥분으로 결단으로 욕심으로 할 것 아닙니다. 공동체에 유익한지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당회를 앞두고 있는데, 교회 직분자도 세우고, 직책도 맡기는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만 직분과 직책, 욕심으로 할 것이 아닙니다.

3ㆍ1운동 선언문을 발표하려는데 남강 이승훈 선생이 어딜 갔다오니 분위기가 이상하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 33인 민족 대표 이름을 쓰는데 천도교 먼저냐, 기독교 먼저냐로 승강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 수가 제일 많으니 당연히 기독교인의 이름을 먼저 써야 한다는 이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이승훈 선생이“이 이름 순서가 무슨 순서인지 아세요? 죽는 순서예요.”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천도교의 손병희 이름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 직분, 일단 유사시에 죽는 순서입니다. 이 점을 알고 직분을 받아야 합니다.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는 이 점에서 검증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22절 그러나 디모데의 인품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공동체에 유익한 것일까? 이런 목적을 가진 자가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똑 같은 규모의 두 교회가 길 하나 사이로 있는데, 교인 의식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주일에는 교회 앞 도로를 주차장으로 사용하도록 허가를 받았는데, 한 교회 교인들은 먼저 온 사람이 교회 앞에 차를 세웁니다. 그러니 늦게 온 사람은 교회 앞까지 왔다가 다시 아주 먼 곳에 가서 차를 대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길 건너편 교회 교인들은 먼저 온 교인들이 교회에서 먼 곳에 차를 댄답니다. 그래서 늦게 온 교인들이 교회 앞 쪽에 차를 대고 예배 시간 맞추어 들어가기 쉽답니다. 앞 쪽 교회에 온 새가족이 차를 대지 못하여 빙빙돌다가 건너편 교회 앞에 차를 대고 들어간답니다. 공동체를 위하는 의식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 교회. 지상 주차장, 항상 빈 공간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곳에 차를 주차하신 분들은 오늘 처음 나오신 분들일 것입니다.
“권사님도 있던데”급한 볼 일 때문이거나 전도해 오셨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호칭하였습니다.
25절 그러나 나는, 내 형제요 동역자요 전우요 여러분의 사신이요 내가 쓸 것을 공급한 일꾼인 에바브로디도를 여러분에게 보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 같이 섬겨주는 자가 있었기에 사도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를 빌립보 교회에 다시 보내지 않습니까? 교회 공동체를 더 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도자가 되면 충성하여야 하겠지만 돕는 자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선교회장, 속장할 때는 열심히 하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열심히 한 것은 주님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리 한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헤르만헤세가 지은 `동방순례`라고 하는 단편의 주인공은 레오라고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돈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할 때 머슴입니다. 여행단의 잡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짐들고 빨래하고 허드레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부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지식 있는 사람들이 이 머슴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레오가 없어졌습니다. 갑자기 일이 생겼는데, 과연 이 짐을 누가 들고 갈지, 이 풀은 짐을 누가 싸며, 누가 밥을 하고, 빨래를 할지 누가 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여행이 실패합니다. 그 여행단 중 한 사람이 레오를 찾습니다. 그래서 그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이야기입니다. 섬기는 자가 리더입니다.

가정의 리더는 남편이 아니라 아내인 이유는 섬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없다면 좀 허전합니다. 주부가 없다하면 그 날부터 초상집입니다. 
김성묵 장로 이야기. 60 넘은 부부들에게 물어보았답니다. 
여자에게 있어야 할 것 5가지 - 돈, 건강, 딸, 친구, 개. 
남자들에게 물어봤답니다. 애엄마, 아내, 집사람, 처, 마누라 
섬기는 리더쉽이 진정한 리더쉽입니다.

세상에서 줄반장 작업반장이라도 해 보셨지 않습니까? 
선교회장과 속장이 되는 것 보다 돕는 자가 되는 것이 공동체에 더 유익합니다. 
돕는 자가 한 사람만 있으면 그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세 사람이 되면 부흥이 일어납니다.

증인이 없다고 실망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 주변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았지만 아직 주님을 위하여 완전히 헌신된 이들은 많지 않았지 않습니까?
초대 교회 때부터 그러했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디모데, 에바브로디도 같은 증인들을 통하여 교회는 부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증인된 사람을 찾지 말고 저와 여러분이 증인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부목사를 충원해야 할 상황이 되어서‘설교도 잘하고 신실하고 인물도 좋은 목사’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너 마저 그렇게 기도하면 어떻게 하니?’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렇다면“아무도 데려가지 않는 목사를 보내 주옵소서!“  기도해야 하나?  
그 때 목사를 보는 기준이 저와 하나님이 다름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능력을 보지만 하나님은“예수님 안에서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한 사람”을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사모님의 수기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남편을 하늘이라 말하고 아내를 땅이라고 말할 때 우리 남편은 비 한방울 내리지 못하는 원망스런 하늘이었고, 땅은 메마르고 갈라지고 있는데도 그 사정을 모르는 무심한 하늘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의 단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로부터 단비를 받았기에 저의 심령은 사막이 되지 않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땅이 되었습니다."

원망스러운 하늘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분이 내 부모이던, 내 자식이던, 그 분이 내 남편이던, 아내이던, 그럴 수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하늘이신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볼 때 그 분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쁨을 더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들 사이에서

‘다시 복음 앞에’말씀 집회이기도 하지만 증인들을 만나는 집회입니다. 기도해 주시고 참여해 보시기 바랍니다.

특별 기도 2달 동안, 주님의 증인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영성일기를 쓰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2개월을 살아봅시다.  

이 시간 주님, 나를 쓰소서! 나를 증인 삼으소서! 기도합시다.
우리 교회를 쓰소서! 우리 교회가 증인이 되게 하소서! 기도합시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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