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복의 근원 강림하사 2 (신 28:1-6)

첨부 1


복의 근원 강림하사 2 (신 28:1-6) 

 
❚공동체적인 복

지난 시간 우리는 “복의 근원 강림하사 ①”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과학자들이 연구해보니 사람이 설교를 기억하는 시간은 최대 72시간, 즉 사흘을 넘기 힘들다는데 1주일이나 지났으니 여러분이 지난 주 설교를 기억하고 계실지 걱정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신명기 28장 1~3절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방법 세 가지가 무엇인지 나누었습니다. 

맞지요? 첫 번째가 1절에 나온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고 두 번째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그리고 세 번째는 2절에 나온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이 세 가지 명령처럼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여 그대로 지켜 행할 때 받는 복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본문에서 우리가 받을 복이 3절부터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미 1절에서 복 하나를 선언하고 계십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여기 놀라운 복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신다”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는 복을 허락하십니다. 참 좋은 복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왜 뒤에 3~6절에 나오는 복과 이 복이 따로 나오는 것일까요? 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신다”는 복이 뒤에 나온 복들과 따로 떨어져서 1절에 먼저 나오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 까닭이 궁금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답을 찾았는데 그 이유가 기막혀요. 여러분도 성경 읽다가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 왜 이런 말씀이 나올까” 궁금해서 깊이 생각하다가 답을 찾으면 정말 기쁘지 않습니까? 말씀을 깨달을 때 느끼는 맛이 보통이 아니에요. 그래서 시편 119편에 “주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 달다”(시 119:103)고 한 모양입니다.

아무튼 제가 발견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여기 1절에 나온 복은 ‘공동체적(共同體的)인 복’이고, 뒤에 3~6절에 나온 복은 ‘개인적(個人的)인 복’이라는 겁니다. 무슨 뜻일까요? 뒤에 나온 복은 모두가 나 자신이나 가정에 대한 복입니다. 순수하게 개인적인 복이지요. 그런데 1절에 나온 복은 철저하게 공동체적인 복입니다. 여기서 ‘너’는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증거가 무엇일까요?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신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전체를 세계 모든 민족들보다 뛰어나게 하시겠다는 뜻 아닙니까? 세상에 수많은 민족이 있지만 하나님은 정말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 모든 민족보다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세계 67억 인구 중에 유대인은 1,700만 명 정도니 우리나라 인구의 1/3밖에 안 되는 소수민족입니다. 그런데 역대 노벨상 수상자 35%가 유대인이고 특히 노벨경제학상의 65%를 휩쓸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오늘날 세계 정치, 경제, 과학, 문화를 좌우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까닭이 뭘까요? 

학자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두뇌가 남달리 뛰어나서다, 상술의 뛰어나서다, 워낙 고생을 하다 보니 생존본능이 남다르다 등등... 하지만 우리는 그 근본적인 까닭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들을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어서 문제지만 그들이 복을 받은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개인이 복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족이 복 받고 공동체가 복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개인도 복을 받아야 하지만 대한민국이 복을 받고, 우리 민족이 복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개인은 잘 사는데 나라는 못 살고 민족은 형편없다면 우리의 삶이 복될 수 없습니다. 과거 일제시대 때나 대한민국이 가난하고 힘없을 때 우리가 얼마나 서러움 받고 괄시 받았습니까? 내가 Korea에서 왔다고 하면 “그건 대체 어디 있는 나라냐?”고 묻곤 했지요. 

그런데 이제 세계 10위권에 드는 경제대국이 되고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지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세계 어디 가서도 당당하게 어깨 쫙 펴고 다닙니까? 그래서 나 개인뿐 아니라 민족이 잘 되고 이 나라가 잘 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 개개인이 잘 되고 복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다니는 교회가 잘 되고 복을 받아야 합니다. 어디 가서도 “나 효자교회 다닌다” 하고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말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내 교회가 복을 받고 잘 되어야지요. 

가족 개개인도 잘 되어야 하겠지만 가정 전체가 복을 받아야 진짜 복 받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공동체적인 복이 중요하고, 그래서 뒤에 나온 개인적인 복을 나열하기 전에 1절에서 먼저 공동체적인 복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 민족이 다 복 받게 되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온 나라, 온 민족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아무쪼록 우리 효자교회가 복을 받게 되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만 전적으로 순종하고 하나님 마음에 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읍과 들에서

지금까지 공동체적인 복에 대해 말씀 드렸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본문 3~6절에 나온 개인적인 복에 대해 살펴봅시다. 제일 먼저 3절에 나온 복을 알아봅니다.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이 시대에 ‘성읍’은 사람들이 살던 거주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읍에서 복을 받는다”는 말은 우리의 거주지, 즉 가정에서도 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시대의 ‘들’은 사람들이 나가서 일을 하던 일터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들에서도 복을 받는다”는 말은 우리의 일터와 사업장, 직장에서 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는다”는 말은 종합해 보면 우리의 가정에서도 복을 받고, 일터도 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가정과 일터가 함께 복을 받아야 하는가?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은 복을 받았는데 일터가 복 받지 못했습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이 어려워지거나 문을 닫으면 곧바로 가정이 어려워집니다. 내가 하는 사업이 힘들어지면 가정도 당연히 곤란해집니다. 돈을 못 벌어오는데 어떻게 가정이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일터가 무너지는데 어찌 가정이 안 무너지겠습니까? IMF 때 수많은 사업체가 망하고, 수많은 가장들이 일터와 직장을 잃었는데 이 때 덩달아 이혼율도 최고로 올라가고, 집을 나와 노숙자로 전락한 가장도 가장 많았습니다. 

이때 해체되고 무너진 가정이 최고로 많았습니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는 우리 가정이 온전하고 건강하게 해달라고만 기도하지 말고 우리 가정이 바로 서기 위해서라도 일터가 든든히 서도록, 우리의 직장과 사업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직장도 축복을 받고 사업도 축복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일터나 직장은 복을 받았는데 가정이 복을 못 받았습니다. 남편 사업이 잘 돼서 돈을 아주 잘 벌어옵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돈 잘 벌어다 주고 명품 백도 턱턱 잘 사줍니다. 그런데 불행한 아내들이 너무 많습니다. 돈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집에 안 들어오고 어디 가서 누굴 만나고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남편이 돈만 잘 벌어다주면 다인 줄 알고 아내를 기쁘게 해주거나 자녀들에게 전혀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가정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여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차라리 옛날에 사업이 작을 때가 더 행복했습니다. 차라리 남편이 옛날에 말단직원일 때가 더 좋았습니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더 풍족하게 살고 더 큰 집에 좋은 차 타고 다니지만 정말 허전하고 외롭습니다.” 이렇게 되면 안 되지요. 그러니 사업과 직장도 복을 받아야 하지만 반드시 가정도 복을 받아서 행복한 가정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가정과 일터가 함께 복을 받아야 진정 복 받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성읍과 들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가 함께 복 받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자녀와 토지와 짐승이

이번에는 4절에 나온 복을 살펴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먼저 “네 몸의 자녀가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당시 자녀를 많이 낳는 다산(多産)의 복이 가장 큰 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창 22:17)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왠지 다산이 축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애를 잘 안 낳습니다. 아이를 두 명만 낳은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만 우리가 너무 자녀를 안 낳아서 출산율이 세계 꼴찌입니다. 이러다가 인구가 너무 줄어 아예 없어지는 것 아닌가 걱정입니다. 

그러므로 적절한 숫자의 자녀를 낳는 것이 축복인 줄 알고 자녀 출산의 복을 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또 잘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본문처럼 자녀가 잘 되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자녀는 낳았는데 자녀가 잘못되면 어떻게 부모가 행복하겠습니까? 평생 별 탈 없이 잘 살았는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는데 자녀 때문에 걱정하고 힘들어하는 가정을 많이 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 자녀가 반드시 잘 되는 복을 받아야 나도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을 꼭 받기 바랍니다.

그 다음으로 “네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농사를 짓는 농경민족에게는 풍년이 되어 농산물을 많이 수확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또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가축을 치는 유목민족에게 최고의 축복은 가축이 많은 새끼를 낳아서 소유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어떤 TV 프로그램을 보니 아프리카 깊숙한 오지에서 원시 상태로 사는 원주민들을 찾아갔는데 추장이 카메라를 보고 신기해서 하는 말이 “염소 몇 마리면 그것 살 수 있나요?” 합니다. 그만큼 유목민들에게 가축의 숫자는 곧 부의 척도요 축복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토지의 소산과 가축의 새끼가 복을 받는다는 말은 우리가 농사를 짓든, 목축을 하든, 어떤 직업을 갖든,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이 풍성하게 거두는 복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처럼 저는 늘 기도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사업을 하든, 직장을 다니든, 가게를 하든, 무엇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거기에서 소산이 풍성하고 소출이 넘쳐나는 복을 받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이 기도처럼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무엇을 하든, 어떤 일에 종사하든 풍성한 결과를 얻는 복을 주시마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길 축복합니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우리의 출입이
이제 5절에 나온 복을 살펴봅니다. 5절 함께 읽습니다.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여기서 ‘광주리’란 수확한 곡식이나 과일 등을 저장해 두는 데 그릇입니다. 또 ‘떡 반죽 그릇’이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식인 빵을 반죽하는 데 사용되는 그릇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의 생계와 경제문제를 하나님이 책임지고 풍성하게 복 주신다는 뜻입니다. 경제문제, 생계문제는 우리에게 너무나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무리 다른 게 좋아도 먹고 사는 것이 힘들고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삶이 행복할 리 만무합니다. 

서울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은행에 대출을 신청했는데 경상도 사람만 받았답니다. 서울 사람이 억울해서 이유를 알아보니 대출신청서의 ‘대출 사유’라는 곳에 자기는 아주 자세히, 길게 자신의 경제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썼는데, 경상도 사람은 딱 세 글자로 “쪼치서”(쪼들린다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라고 썼기 때문이랍니다. 얼마나 명쾌하고 간단명료합니까? 이런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요즘 우리 경제 참 어렵습니다. 살림이 참 쪼칩니다. 덩달아 우리 마음도 쪼치고, 불안하고 무겁습니다. 잠언 30장은 “나를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하게도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9절)

그렇습니다. 너무 부유해도 하나님을 멀리할 수 있지만 너무 가난하면 죄 짓기 쉽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 하나님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요즘 제가 봉헌기도 할 때마다 “드린 손길들을 축복하시고 드리고 싶어도 힘들어서, 어려워서 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손길도 똑같이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는 까닭이 이것입니다. 아무쪼록 성도 여러분 모두의 경제사정과 살림이 하나님 은혜로 풍성해져서 인생의 행복도 누리시고, 그렇다고 해서 그 풍족함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의 표현도 풍족하게 드릴 수 있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6절에 나온 복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6절 함께 읽습니다.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들어온다’는 말은 일을 다 마치고 집에 들어온다는 뜻이고, ‘나간다’는 말은 일을 하러 집을 나서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볼 일 보러 나갔다 들어오는 것도 해당되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우리의 사소한 일상생활 전부를 뜻합니다. 우리가 하루에도 일을 하러 출근하고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일 말고도 얼마나 많이 집을 나갔다 들어왔다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집에서 나갈 때도 복을 주시고 집에 들어올 때도 복을 주신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우리의 일상생활 전부를 하나님이 세심하게 지키시고, 보호해주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복 주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시편 121:8은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고 약속하는데 이 ‘출입’이 바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지금부터 영원까지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지키신다는 약속입니다.

아울러 이런 묵상도 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나갈 때 복을 들고 나가야 하겠구나. 집에서 나가서 내 직장에서,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을 전하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하겠구나. 또 집에 들어올 때도 복을 들고 들어와야 하겠구나.” 그 옛날 겨울날 아버지가 퇴근하실 때 들고 들어오신 귤 한 봉지, 호떡 몇 개가 소박하지만 온 가족을 기쁘게 해 준 것처럼, 우리가 집에 들어올 때 지치고 짜증 내면서가 아니라 웃으며 온 가족들에게 기쁜 소식을 들고 들어오고, 온 가족이 기뻐할 선물을 들고 들어와야 하겠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이런 출입의 복을, 이렇게 들어와도 복 받고 나가도 복 받는 역사가 여러분 모두와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축복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God Bless You, God Bless You, 축복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미국 사람들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데 그래도 복을 받는 이유가 만나는 사람마다 “God Bless You”라고 축복하며 서로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내가 복을 받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축복하여 복 받게 하는 아브라함 같은 ‘복의 근원’ 되기 바랍니다.

다음 주일은 계속해서 7~14절까지 나오는 복의 목록, 축복 리스트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인 3~6절에서 주시마 약속하신 복도 크고 좋지만 다음 시간에 주실 복은 더 크고 좋습니다. 이번 한 주간 오늘 본문에서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아 누리며 행복하게 사시다가 다음 주일에는 하나님이 주실 더 큰 복을 기대하고 기쁜 마음으로 교회 오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