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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계 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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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델비아 교회에게 (계 3:7-13)

빌라델비아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

7. . .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빌라델비아 교회는 지난주에 상고한 사데지역에서 동남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 도시에 있었습니다. 그 곳은 "작은 에덴"이라고 불릴 만큼 문화적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던 도시였습니다. 특히 이곳은 포도가 특산물로서 유명한 고원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이곳은 서방세계와 동방세계가 문화와 무역을 쉽게 하기 위해 이를 연결시켜주는 도로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로마로부터 드로아, 버가모, 사데를 지나오는 당시 최고의 교통요지로 주목을 받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이 지역은 상업과 공업이 매우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습니다. 

빌리델비아 지역은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의 7개 지역 가운데서 가장 도시 역사가 짧은 곳으로서 버가모의 임금이었던 "아탈루스 2세"가 자신의 동생을 위하여 건설한 도시로서 처음에는 "필라델포스"라고 불렀습니다. 이 "필라델포스"라는 말은 "형제를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지역은 원래 지진이 많기로 유명한 지역인데 A.D 17년에 일어난 큰 지진으로 인하여 주위의 크고 작은 도시 10개 정도의 파괴되었을 때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에 의하여 새롭게 도시가 건설되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이 무너진 도시를 건설해준 로마 황제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였는지 도시를 "네오가이샤라" 라고 불렀습니다. 

이후에 도시 곳곳에 황제의 신상을 세워 그를 경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소아시아 교회와 더불어 신앙을 지키는 것이 무척 힘든 상황에서 이들이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황제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는 도시에서, 그들의 삶의 주님을 예수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화고한 믿음 말입니다.

먼저 빌라델비아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다음 구절을 풀어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전의 교회에 오신 무서운 심판의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기억하시죠?

에베소 교회에 편지할 때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으로, 이 땅의 모든 교회를 주관하고 보호하시는 권세가 있다는 의미.
서머나 교회에서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자"로, 모든 역사와 생명을 주관하시는 능력이 있는 분이었죠.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분"으로, 성도들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며 그들의 마음 상태를 환하게 알고 계시는 권세가 있음을.

사데 교회에는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진 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이 땅의 모든 교회를 주관하시는 완전하신 주님임을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빌라델비아 교회에 편지를 하시기를 "다윗의 열쇠를 가졌다고 말씀하시고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이라 하셨는데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다윗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열쇠라는 말은 권위 와 통치권자를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옛날에 집안에서 쓸 물건을 창고에 넣어두는데 그 창고 열쇠는 가지고 있는 사람이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때가 되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그것을 물려주는데, 그 열쇠를 갖고 있다는 것은 집안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은행의 통장을 쥐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다윗의 열쇠"를 가졌다는 말은 장차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모든 권세를 가진 이라고 해석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권세를 가진 그분 주님께서 오늘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8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는데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적은 능력이라는 말은 "능력이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사회적인 신분으로도 보잘 것 없는 미약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 서도 나를 간절히 사랑하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책망이 없는 칭찬과 권면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말씀을 자세히 보면 책망할 것이 없는 칭찬만 나와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본문 8절에 나와 있는 “열린 문”이라는 단어입니다. 어떤 주석 학자들은 이 부분을 “구원의 문”이라고 해석하는 데 여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열린 문은 “가능성의 문 혹은 선택의 문”이 아닐까요?

마태복음 7장 13-14절에도 보면 두 개의 문이 동시에 나와 있습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입니다. 하나는 좁고 협착하지만 생명으로 인도하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말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의미가 좀 더 선명해 지는 것 같습니다. NIV 성경에는 “I have placed before you an open door that no one can shut"라고 되어 있고,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셩경에는 ”opening doors no one can lock, locking doors no one can ope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먼저 시제입니다. 현재 완료형이죠. 이 문은 과거로부터 죽 우리들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의 문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열려진 문”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사람이 닫거나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문을 이야기 합니다. 

즉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이에게 이미 열려져 있는 가능성입니다. 구원은 그 열려진 문에 대하여 우리의 응답을 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구원의 문에 대하여 어떤 인간도 열거나 닫을 권세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하여 응답할 뿐입니다.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먼저 행하라

유대교 랍비인 힐렐에게 한 개종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쪽 다리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 전체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힐렐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자기 자신에게 하기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율법 전체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그 주해에 불과합니다. 가서 배우십시오.”

우리 사회에는 먼저 나중의 논리가 팽팽합니다. 한쪽은 이해해주면 존경하겠노라 하고, 다른 한쪽은 존경하면 이해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문제 해결보다 대립이라는 영원한 평행선이 있을 뿐입니다. 평행선의 분리와 충돌은 그 어느 쪽도 비극입니다. 이 같은 순환 논리에 빠지면 문제 해결이 불가능해집니다.
아름다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존경받고 싶으면 먼저 존경하십시오. 이해받고 싶으면 먼저 이해하십시오. 용서받고 싶으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섬김을 받고 싶으면 먼저 섬기십시오. 방법은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시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그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가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환경과 기회를 탓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의 문을 좋은 환경 가운데서 지킨 것 같지 않습니다. 

본문 8절에서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무슨 말일까요?
열린 문, 가능성의 문에서 이들은 하나님 앞에 옳은 선택을 했다는 것,
어쩌면 좁은 문을 향해 늘 선택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지요.


선한 영향력을 주었다. . .

10절에서는 이렇게 칭찬하고 계십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이 말씀을 보면서 여러분을 무엇을 느끼시나요? 때로 영어가 우리말보다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네요. “인내의 말씀”이 영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Since you have kept my command to endure patiently.. ." 인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기 때문에. . .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가 처한 상황이 그렇게 녹녹치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참으로 많이 인내해야할 상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잘 참아 낸 것입니다. 
인내의 공동체에는 늘 본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열하는 공동체에는 늘 그것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좀 전에 보았던 “열린 문”과 연결하여 본다면 이 모든 가능성이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에 속한 우리 모두에게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죠.
몇 달 전 중앙 성결교회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결교회의 모교회입니다. 그 교회에서부터 많은 교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목사님과 함께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가지려고 무척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역사와 관계없이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교회를 다시 쓰실 수도 있고, 하나님이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다시 쓰임 받을 수 있는 선택의 삶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향력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인내하며 지키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힘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본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앞서서 본을 보이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신다는 것이죠.

김장환 목사님의 큐티 365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부대가 전쟁 중 사막 한가운데에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물이라고는 한 병사의 수통에 남겨진 몇 모금의 물뿐이었습니다. 모두가 목을 축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 병사는 수통을 소대장에게 건네면서 말했습니다. 
“소대장님이 우리들의 지도자인 만큼, 이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려 우리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소대장은 물을 받아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수통을 바라보고 있는 소대원들의 간절한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태연히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물을 마시고는 옆에 있던 병사에게 수통을 건네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병사가 수통을 받아들었을 때, 수통에는 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곧 소대장의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역시 수통의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옆 병사에게 주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병사는 수통의 물을 마셨지만, 결국 수통의 물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들은 소대장이 보여준 행동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이에 용기를 얻어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무사히 오아시스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지도자가 됩시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위기 가운데도 항상 대기하는 십자가 군병이 됩시다.

저는 미국을 보면서 제일 부러운 것이 있다면, 존경할 대통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지도자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또한 미국에는 닮아가려고 하는 교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소박한 꿈이 있다면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세계 2차 대전 때의 일입니다.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영장을 받고 군에 가게 되었습니다. 큰 도시로 집결하여 기차를 타고 훈련소로 갑니다. 워싱턴 역에도 수백 명의 장정들이 몰려들었고 시민들은 기차역에 나와서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민들 가운데 다리를 절면서 뜨거운 코코아 잔을 받쳐 들고, 어떤 때는 친히 코코아를 끓이기도 하며 늦은 밤까지 봉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장정 하나가 그 노인을 자세히 보니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루즈벨트였습니다. 그는 육체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밤마다 기차역에서 훈련소를 떠나는 청년들을 위해 뜨거운 코코아를 나르며 봉사를 했습니다. 
누군가의 헌신은 감동을 주고, 그 감동은 다음 사람의 삶을 바꿔놓는 힘이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인내를 가지고 믿음을 지켰다는 것은, 당시 다른 교회에게도 그런 선한 영향력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선한 영향력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축복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인내했음으로 내가 이제 너희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작은 힘을 가지고도. . .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시는 8절 말씀에 다시 한번 집중해 보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8절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어를 하나 선택하라면 “작은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핍박하는 자를 누를 만한 능력이나 힘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서도 누가 봉사하려거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섬긴다는 말이 참 좋은데 좀 더 적극적인 의미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섬김' 보다는 '종'이라는 말인데요. 주인은 종이 가진 능력만큼 일을 시킵니다. 
그리고 종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가지고 할수 있다거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것이 참된 종의 모습입니다.

국민일보 겨자씨에 실렸던 글입니다. 
이탈리아 로마에 가면 바울순교교회가 있다. 교회에 들어서면 왼쪽 벽에 바울이 순교 당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고, 그 오른쪽에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베드로 부조가 있다. 안쪽 제단 오른쪽에는 바울의 목을 놓고 쳤던 돌이 있고, 바울의 목이 떨어진 자리에 분수가 솟았다 하여 그 곳에 세 개의 제단이 있다. 어떻게 죽음임을 알면서도 담담히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었을까? 어떻게 복음 때문에 감옥에 있으면서도 기쁨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리처드 포스터는 ‘영적훈련과 성장’에서 섬김을 선택하는 것과 종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의 차이를 설명한다. 섬김을 선택할 때는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내가 결정하지만, 종이 되기를 선택할 때는 누구라도 섬길 수 있기에 진정한 섬김은 ‘섬김’보다 ‘종’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라 하였다.
새해 첫날, 바울은 새해가 되었을 때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 로마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언젠가 여러분들과 함께 변화산을 통해 한 주간 나누었던 주제가 생각나시나요? “레몬 레몬에이드를 꿈꾸다”
우리의 가장 큰 적중에 하나는 “부족감”이라는 놈입니다. [레몬 레모네이드를 꿈꾸다]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젖소 두 마리가 초원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커다란 우유 트럭 한 대가 그 앞을 지나갔는데, 이런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비타민 A 첨가에 살균, 표준화된 칼슘 보강 우유!”
이를 읽은 한 젖소가 한숨을 쉬면서 옆에 있는 젖소에게 말했습니다. 
“대단하군! 어째 우리는 자격 미달 같네, 그렇지 않나?”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종종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작은 믿음"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들에게 만연한 큰 병이 있습니다. "큰" "많은" "좀 더 빠르게"라고 하는 것들이죠.
작은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어떤 큰 것도 바라지 못합니다. 그리고 조급해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너무 미약하기 때문이죠. 단지 최선을 다해 잠잠히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외도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곳의 주인이 권사님이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외도 전체를 안내해 주셔서 보게 되었습니다. 
커피를 먹을 수 있는 장소로 가게 되었을 때, '화장실' 표시를 보게 되었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조금은 구린내가 나는 것을 보고 위치가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봄철이 되면 구린내가 나는 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함께 했던 목사님이 자연과 예술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인데 이런 말을 합니다. 
"구린내가 난다면 분명히 이 근처 어디엔가 몸에 좋은 식물이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자연도 우연이란 없습니다. 본래 차밭에는 독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차를 따다 뱀에 물려 죽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차밭에는 절대로 농약을 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차가 효능이 좋은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차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비료를 주고 농약을 치기 시작하면서 뱀도 사라지고 항암작용을 하는 차의 효력도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참 의미있는 말로 들렸습니다. 
영향력은 "작은 것"에서 나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며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작은 것을ㅣ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오늘 빌라델비아교회가 그런 교회입니다. "작은 것으로 최선을 다 한 교회!"

우리가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슨 능력이나 권세를 가지고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시험의 때를 면하게 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작은 믿음과 능력을 가지고 믿음을 지킨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의 때는 이기는 것보다 "견디는 믿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베드로전서 5:8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때로 악의 세력이 우리를 덮는 것 같습니다. 그런 때는 묵묵히 견디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견디는 것이 하찮아 보여도 견디는 자들을 통하여 믿음과 하나님의 축복이 증명됩니다.
본질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악을 쓰지 않아도 보여집니다. 
선한 것은 결국 악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묵묵히 동행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 6:10,11을 보세요.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차근 차근 하나씩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을 말씀"인 하나님의 전신갑주(엡 6:14∼17)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엡 6:18).

에베소서 6:12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악의 영들입니다. 이 악한 영들과 싸워서 이기는 비결은 주 안에 있어야 됩니다(엡 6:10). 우리가 연약하고 어리석고 미련해도 예수 안에 있으면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예수 안에 있는가, 예수 밖에 있는가를 항상 생각해야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제1대 대통령 죠지 워싱톤과 제16대 대통령 에브라함 링컨은 독립전쟁을 할 때나, 남북전쟁을 할 때 이 두 분은 '내가 지금 주 안에 있는가'를 먼저 생각했다고 합니다. 전쟁의 위기 때에도 '내가 예수 안에 있는가, 예수 밖에 있는가' 이것을 늘 생각했다고 합니다.

예수 안에 거하면 우리가 시험을 때를 면하게 되는 때가옵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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