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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하나님의 비전 (사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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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비전 (사 9:1-7)
  

오늘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는 꿈, 비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꿈, 비전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이 말에는 미래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을 꿈, 환상, 계시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성경만큼 미래에 대한 약속과 꿈을 말한 책도 드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야곱에게는 천사가 사다리로 하늘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두가 꿈이고 비전이며 장차 그들의 인생에게 주어질 환상이었습니다.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꾼 꿈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모두 후에 그들의 인생에 나타난 일을 꿈으로, 비전으로, 환상으로 미리 보여주신 경우들입니다. 

그런 꿈들은 당대에 주어진 꿈이고 비전이었다면 오늘 성경에는 그 보다 더 큰 비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최대의 약속이고 꿈이고 비전입니다. 하나님은 그 비전을 이사야를 통해 인류에게 주셨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700여 년 전에 말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뉴스요 사건이요 비전입니다. 비전이라는 것은 10년이나 20년 후의 나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고 설정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대개 비전 혹은 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비전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힘씁니다. 그런데 그렇게 노력하고 힘쓰는 생활에는 기쁨이 주어지고 행복이 만들어집니다. 어느 날 그 꿈과 비전이 이루어질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래서 꿈과 비전이 있는 사람은 수고하게 노력하고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비전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는 나이에 상관이 없습니다. 노인도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노인은 앞날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종말 때에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주어질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렇게 비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비전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그 비전을 통해 오늘의 삶이 행복하고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꿈이 있고 비전을 가진 사람은 무언가 다릅니다. 젊은이도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젊은이는 더욱 구체적이고 확실한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꿈에도 구체적인 꿈이 있고 허황된 꿈도 있습니다. 허황된 꿈은 오히려 장애를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전은 구체적이어야 하고 확실한 꿈을 가져야 그 꿈을 기대하는 기쁨이 생기고 그 꿈을 이루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지는 것입니다. 

꿈이나 비전을 말하자면 성경만큼 말씀한 책도 없습니다. 성경 안에는 비전이나 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전들 중에서도 가장 큰 비전은 하나님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사야 7장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이사야 2장에서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나라들이 서로 치지 아니하고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비전들입니다. 그리고 요엘 2장 28절에는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에 성령이 임하시면 그렇게 꿈을 꾸고 환상을 보고 이상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모두가 꿈과 비전이 가득한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도 큰 약속이며 꿈과 비전의 말씀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평강의 왕이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꿈과 비전과 환상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유대인에게 주신 꿈 

당시 유대인들은 외세로부터 억압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나라도 일본으로부터 36년간 억압을 받아왔기에 이 억압의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억압을 받은 것과 달리 바벨론, 앗수르, 블레셋, 바사, 로마 등에게 굉장히 많은 압제를 받았습니다. 단지 한두 번 압제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매번 압제 당하는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누군가 와서 도와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항상 컸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에게 “장차 메시아가 오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장차 오실 메시아는 본문의 예언 내용처럼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평강의 왕”이라는 엄청난 약속입니다. 얼마나 기대하고 기다리고 소망했겠습니까? 그 메시아가 기묘자로 모사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평강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비전이고 꿈이고 약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꿈과 기대와 약속과 비전이 있으면 그 삶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그날의 고난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꿈과 기다림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가운데서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문제 앞에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생기는 것입니다. 희망도 기대도 없고 앞길이 캄캄하니까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장차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꿈이고 비전이고 희망입니다. 그가 오시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 했습니다. 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고 광야에 물이 흐르고 사막에 시내가 흐를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디까지나 은유적으로 평화가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이런 꿈과 비전 환상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 오시기를 학수고대 했던 것입니다. 이런 기대와 꿈과 약속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그것이 비전과 꿈, 기대가 주는 힘입니다. 하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런 비전과 꿈을 주셨습니다.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복음

당시 유대인들은 참혹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중 가장 처절한 고난은 압제생활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4천년 역사 중에 2500년이 압제생활이었습니다. 오늘도 그렇지만 당시 예루살렘은 지정학적으로 이방민족의 침략지가 되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이 민족 저 민족에게 휩쓸리고 압제당하며 살았습니다. 2절에서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흑암”은 당시 참혹하던 고난의 참상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메시아 탄생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약속도 그냥 약속이 아닌 아주 구체적이고 대단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는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 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그가 와서 평강을 무궁하게 하실 것이며 장차 다윗의 자리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구체적이고 대단한 약속이니 압제받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굿 뉴스였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정말 고난을 많이 당하고 온갖 수모와 압박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고난 속에서 나라가 와해되고 사람들이 세상으로 모두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유랑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히틀러 때는 구라파에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 중 600만 명이나 학살당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고난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메시아 탄생 약속은 비전이었고 꿈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그가 오시면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유대인들이 가장 흠모하는 왕이 다윗 왕입니다. 

그리고 오늘 유대인들이 가장 흠모하는 꿈도 다윗시대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7절 끝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유대인들은 이 꿈을 믿고 고난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오심은 고난 받았던 유대인들에게는 꿈이었고 비전이었고 환상이었던 것입니다. 

세계인에게 주어진 약속 

오늘 읽은 본문은 형식으로는 유대인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이것은 오늘의 모든 세계인에게 주어진 메시지이고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고 이방에서 온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당시 동방은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이라크입니다. 이라크에서 그 먼 베들레헴까지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얼마나 기다리고 고대하였으면 예수님의 탄생을 알고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겠습니까? 이는 세상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까지도 이 약속을 믿고 기다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 경배한 후에 복음의 소식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믿었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됨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굿 뉴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여 믿고 살아간 사람들이나 나라들은 하나같이 전향적인 삶을 살고 선진국을 이루었습니다. 기독교가 눈을 뜨게 하고 생각을 열게 하고 전향적 삶을 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들어오면서 먼저 내 자신이 변화되었고 내 가정이 변화되었고 내 나라와 민족이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 변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120년 전 우리나라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당시 우리민족은 세계는커녕 세상 물정도 모르고 살아갔습니다. 또한 모두 무속의 영향을 받아 살면서 운명에 길들여진 미개한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일본은 명치유신을 일으켜서 세계화를 이루어갈 때 우리나라는 어둑하게 쇄국정치를 펼쳤습니다. 또한 서양인들이 세계를 주름잡고 돌아다니며 살아갈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울안에 갇혀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들을 따라다니며 신기하게 생긴 모습에 재미있어 했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농촌에서 시골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할머니가 설교를 듣는 동안 계속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선교사는 할머니가 설교말씀에 은혜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난 뒤에 설교말씀 중 어떤 대목에서 은혜가 되어서 눈물을 흘리셨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당신 눈을 보니 얼마 전에 잃어버린 염소의 눈이 생각나서 울었다”고 대답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그 당시 우리민족의 실력이었고 자화상이었습니다. 그런 민족에게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복음을 전해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마침내 답답한 우리의 안목을 넓혀 주었고 닫혀 있었던 생각을 열게 하여 비로소 우리 민족의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 동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근대화를 이루어 우리민족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우리의 눈이 뜨이고 개척정신이 발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가 기독교의 영향입니다. 

오늘 세상이 기독교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안티도 발생했습니다. 물론 기독교가 잘못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기독교에 대한 질투와 질시가 깔려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단순히 타종교처럼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가 맨 파워가 강하고 역할이 많고 우리사회에서 너무 두드러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시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대통령이 장로입니다. 전 현직 국무총리, 여야 원내대표, 전 현직 대법원장, 연세대와 고려대학교 총장 등이 모두 장로입니다. 모두 나열하려면 끝도 없습니다. 

더 찾고 찾으면 정치계, 법조계, 교육계, 군계통에, 경제계에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조용히 믿는 것이 아니고 가는 곳마다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합니다. 게다가 옆에 사람에게까지 그 신앙을 나타내며 전도합니다. 이 세상은 그런 행동이 싫은 것입니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바로 그런 감정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세상이 기독교를 거세게 몰아붙이며 비난하고 꼬집는 것입니다. 

엊그제 기독교가 세운 교도소가 문을 연지 1년이 되어 1주년 기념예배를 드렸습니다. 원래 우리나라 교도소 출소자들의 재범률이 50%쯤 됩니다. 그래서 현재 법무부의 교정 목표가 출소자 재범률을 22%로 낮추는 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교도소를 짓기로 하여 정부의 허가를 받고 기독교는 교도소를 지으면서 재소자를 다 복음화해서 재범률을 5%로 내리겠다고 목표를 잡았습니다. 만약 그 목표대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목표를 보고 법무부 산하 교도관들 사이에서 모두 입을 삐쭉거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그동안 놀았다는 말이냐 하면서 어디 두고 보자 하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교도소에 전국의 중범죄자들만 골라서 다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잘 해보라, 목표대로 되는지 두고 보자는 모습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앉아서 도를 닦고 수도하며 침묵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학은 행동하는 신학입니다. 그래서 행동하는 것인데 세상은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축구선수들이 골을 넣고 세레머니로 기도하는 모습이 싫다고 하지 말라고 촉구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어디를 가도 간증을 하고 표현하니까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안티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도 조용히 도나 닦고 있지 않으셨습니다. 찾아다니시며 눈을 뜨게 하셨고 고치셨습니다. 복음을 전파하셨고 가르치며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대우만 받은 것이 아니고 숱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때로 영광도 받았고 박수도 받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고난도 받았고 비난도 받았고 방해와 핍박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모두 환영한 것이 아닙니다. 헤롯은 예수가 태어나자마자 죽이려고 혈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편하게 삶을 다 살고 가신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굿 뉴스였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더 큰 뉴스였습니다.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은 메시아였고 구세주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오심은 온 세계인들에게는 희망이었고 소망의 뉴스였습니다. 대림절은 약속하신 그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묵상하며 보내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주님을 알게 되고 그 주님으로부터 은혜 입은 것에 감격하며 보내는 기간입니다. 또한 마음 깊이 주님을 새기고 내 마음을 붉게 물들이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저 충실한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고민해 보고 스스로 충실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 다짐하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더 깊은 영적 바다로 들어가는 은혜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이 대림절에 이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동참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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