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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때가 이르면 이뤄집니다 (눅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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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이르면 이뤄집니다 (눅 1:18-25)  

< 기다림의 축복 >   

요새 다음(daum)과 같은 포털 사이트에 목회자의 성 추문 뉴스가 실리면 순식간에 댓글이 천 개 이상 달립니다. 특히 요새는 기독교인인 대통령에 대한 증오심으로 국민 절반이 기본적으로 교회와 목회자에 대해 안티가 된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댓글이 달리니까 거의 모든 댓글이 무서운 비난의 글입니다. 어떤 남편은 그런 댓글들에 영향을 받아 아내가 교회에 출석하면 바람이 날까봐 염려된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가면 정말 바람이 날 가능성이 많을까요? 확률적으로는 희박한 얘기입니다. 사실 인터넷 시대에는 집에만 있어도 더 무서운 유혹에 노출됩니다. 오히려 양지로 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남편은 아내가 교회에 나가면 자기로부터 마음이 멀어질 것을 염려합니다. 그러나 아내 입장에서는 그런 모습이 남편의 ‘속 좁은 태도, 불신하는 태도, 배려 없는 태도, 자신을 소유하려는 태도’로 느껴지면서 오히려 그 태도 때문에 더 마음이 멀어집니다.  

어떤 남편은 “아내의 교회출석을 막는 것이 무슨 소유하려는 태도냐?”라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나가려는 교회가 정상적인 바른 교회라면 그런 교회를 못나가게 하는 태도는 사실상 집착과 소유욕이 강한 태도입니다. 그것이 싫어 어떤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부부끼리 종교의 자유도 없어요?” 이 세상에서 공산주의 사회보다 더욱 무서운 사회는 종교의 자유가 없는 사회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벌어진 성 추문 뉴스를 보고 아내의 교회출석을 막는 것도 사실상 아내를 너무 불신하는 태도입니다. 저는 32살부터 만 19년 동안 목회하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성으로부터 말 유혹이나 눈빛 유혹조차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핀잔을 줍니다. “목사님은 교회가 작잖아요? 목사님은 키가 작잖아요? 키가 크면 다를 걸요?”  

아주 자존심 상하는 얘기입니다. 물론 그래서 유혹이 없을 수도 있지만 저도 알고 보면 꽤 매력적인 남자입니다. 저보다 키가 큰 미모의 아내와 결혼한 것으로 그 증명을 대신합니다. 물론 유머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본질적인 얘기는 결국 제가 외모가 못나서 지난 19년 동안 유혹에 전혀 노출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보통의 정상적인 교회에서는 기본적으로 그런 유혹의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유혹에 전혀 노출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서로를 최대한 믿고 배려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부부관계가 깊어지겠습니까?  

작년에 출석성도가 2만 명에 달하는 최고의 스타 목사가 성 추문으로 단번에 나락에 떨어졌습니다. 이유는 어떤 성도로부터 자주 마사지를 받았다는 이유였습니다. 그 목사를 가장 무섭게 공격하던 한 언론조차 깊은 관계는 없었던 것을 인정합니다. 결국 그 죄가 세상에서는 가볍게 여겨질 수 있어도 목회자에게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존재의 추락요건이 됩니다. 그 사실을 운명적으로 알기에 목사들은 그 문제를 누구보다 조심합니다.  

결국 그런 추문을 듣고 아내의 교회출석을 막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한 일에 대한 지나친 기우이자 집착입니다. 그런 남편은 아내가 자기만 바라보기를 원하기에 아내가 동창회 가는 것도 싫어하고 심지어는 친정 가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러면 점점 아내는 마음이 돌아서거나 한 맺힌 상태에서 참고 살게 됩니다. 결국 아내에게 남편만 바라보라고 강요하면 오히려 점점 남편을 속으로 혐오하게 됩니다. 엄청난 소탐대실입니다. 부부관계에서 제일 어리석고 못난 태도는 배우자를 소유하려는 태도입니다.  

아내는 그런 속 좁고 못난 남편에 대해 더 실망합니다. 아내가 건전한 모임을 가는 것을 같이 즐거워해주고 오히려 그런 곳에 가서 아내가 양지의 빛을 쬐도록 배려해주어야 하는데 속 좁은 남편은 아내가 그런데 가면 바람이 날까봐 염려합니다. 남편이 건전한 모임을 가도록 배려해주면서 막힌 감정의 배출구를 열어주는데 그런 남편을 두고 바람이 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남편은 아내의 사랑과 존경을 더 받습니다.   

어떤 분의 신혼 때 얘기입니다. 어느 날, 아내가 대학동창들을 만나러 갔다가 조금 늦게 귀가했습니다. 사실 아내는 기다리는 남편을 생각해서 빨리 온다고 왔는데 남편이 기다리다가 지쳐서 화가 난 것입니다. 그렇게 화난 상태에서 남편에게 한 가지 조선시대 속담이 떠올랐습니다. “마누라는 초장부터 잡아야 한다.” 자세히 보면 조선시대 속담 중에 간덩이가 붓다 못해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속담이 많습니다.

그 속담을 떠올리면서 그가 정색하며 퉁명스럽게 한 마디 했습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결혼하고 처음 만난 동창 모임이었으니 얼마나 할 말이 많고 얼마나 재미있었겠습니까? 그런 아내를 배려하지 못하고 결혼 초장부터 잡아야 된다는 속담에 속아서 아내에게 불신적인 언사를 표출한 것입니다. 

다행히 아내가 마음이 넓어서 그런 남편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의 깊은 신뢰관계가 형성될 때까지 기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도 점점 변화되어 나중에는 오히려 아내에게 건전한 모임을 가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결혼 10년쯤 지난 후 서로의 신뢰가 깊어졌을 때 어느 날 우연히 결혼 초창기에 동창회 갔다가 늦게 돌아온 그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때서야 아내가 비로소 남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여보! 그때 내가 얼마나 숨이 막혔는지 알아요?”  

이제 “마누라는 초장부터 잡아야 된다.”는 속담을 이렇게 바꿔야 합니다. “아내를 초장부터 존중해야 한다.” 남편도 초장부터 존중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초장부터 잘할 수는 없습니다. 작품을 만들려면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삶은 기다림의 시간들이 빚어낸 다양한 무늬입니다. 삶이 힘겨운 것은 아직 기다린 것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삶이 아름다운 것은 아직도 기다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방학을 기다리고 연인들은 첫 눈을 기다립니다. 부모들은 자식이 철들기를 기다리고 사업가들은 사업이 꽃필 때를 기다립니다. 구직자들은 입사소식을 기다리고 외로운 노인들은 자식들의 안부전화를 기다립니다. 또한 소외되어 한 맺힌 사람들은 평화로운 세상을 기다리고 성도들은 주님의 강림을 기다립니다.   

12월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이때 성탄절과 새해를 기다리면서 왠지 모르게 마음에 환함과 따뜻함이 생겨납니다. 복된 인생은 찬란한 내일을 기다리는 인생입니다. 그런 기다림이 없다면 삶이 얼마 힘들고 각박하겠습니까? 내일에 대한 기다림이 있기에 현실은 차가워도 마음은 따뜻해질 수 있고 힘과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 침묵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   

본문에는 회복의 때를 기다리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의 아버지 제사장 사가랴입니다. 그는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이었고 아내인 엘리사벳도 아론 가문의 후예였습니다(눅 1:5). 그런 고귀한 가정에 안타까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식이 없는 것을 저주로 여기던 때였으니 얼마나 근심과 상처와 수치가 컸겠습니까?  

어느 날, 사가랴가 제사장 직무를 이행하려고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며 기도할 때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아들을 주겠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 이름을 '요한(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그때 사가랴가 자기와 아내는 다 늙어서 그 약속을 잘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하자 그 불신적인 말로 인해 그는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말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편으로는 은혜와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그 기간에 듣기만 하면서 자신의 언행을 성찰하고 새로운 다짐을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수많은 의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의문들을 가지고 너무 대화를 많이 하면 의문이 풀리기보다 의문이 커질 때가 많습니다. 또한 요새는 교회생활이 흥미와 재미 위주로만 흐르고 말씀과 은혜를 깊이 묵상하는 일이 소홀히 취급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가장 복된 태도 중의 하나는 ‘내 말을 하나님이 듣게 하는 태도’를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듣게 하려는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조용히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과 소수의 길을 걷는 삶을 새롭게 다짐한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기도도 ‘하나님께 자기 요구사항을 속사포처럼 나열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진지하게 듣는 것’도 기도입니다. 또한 성경 말씀도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기준으로 삼아야지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삼으면 안 됩니다.  

결국 사가랴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조금 더 듣는 훈련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일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입이 잘 열리기 전에 먼저 귀부터 잘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입은 하나로 만들고 귀는 둘로 만드신 것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2배로 하라는 뜻은 아닐까요? 말이 많이 하다 보면 나중에는 그 말이 자신을 해치는 올무가 될 때도 많습니다.  

새 중에 부리와 날개에서 가장 소리를 많이 내는 새가 두루미입니다. 그 소리 때문에 독수리가 두루미를 쉽게 찾아서 두루미는 독수리의 가장 좋아하는 사냥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오래 산 경험 많은 두루미들은 멀고 낯선 지역으로 이동할 때 입안에 돌을 가득 물고 떠난다고 합니다. 침묵해야 산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터득한 것입니다. 성도들도 침묵시간을 잘 가져야 그 영혼이 올무에 걸리지 않습니다.  

옛날 권위주의 정부 때는 침묵이 강요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이 끝나고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선 후에 지나온 나날들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자발적인 침묵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사람들마다 다 목소리를 크게 내니까 문제가 더욱 커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때로는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계속 침묵만 하면 안 됩니다. 필요한 때는 입을 열어 믿음과 격려의 말을 열심히 해주어야 합니다.   


<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십시오 > 

본문 19-20절 말씀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는 약속의 말씀이 이뤄질 때까지만 사가랴가 말을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사가랴는 말을 못하게 되었고 나중에 요한이 태어나서 서판에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쓰자 비로소 사가랴의 입이 열렸습니다(눅 1:62-64). 이 말씀은 믿음 없는 말을 하려면 차라리 입을 다물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믿음의 말을 많이 하라는 도전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구원은 입으로 시인할 때 이뤄지듯이(롬 10:10) 찬란한 꿈과 비전도 입으로 시인할 때 이뤄집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고백을 하고 좋은 말을 해주는 훈련을 끊임없이 하십시오. 요새는 신앙고백을 쉽게 하지만 초대교회 때는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란 한마디 말 때문에 사자의 밥이 되고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들에게 신앙고백은 생명을 건 예수님을 향한 처절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요새는 그런 죽음을 각오한 신앙고백은 없습니다. 대신에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합니다.  

무디 목사님은 전도하는 성도가 혼자 믿는 성도보다 100배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영혼의 가치가 다르다는 말이 아니라 전도의 열정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상급은 얼마나 영혼을 구하고 얼마나 교회를 잘 섬겼느냐에 따라 받습니다.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그처럼 성도의 최대 관심도 영혼 구원에 있어야 합니다. 은혜와 축복도 그런 영혼 구원의 목적을 가지고 구하십시오.  

홍수가 나서 강둑이 터질 때 한쪽이 터지면 계속 그쪽만 왕창 터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물결도 한번 터지면 왕창 터집니다. 그런 은혜와 축복이 터지는 역사가 우리 가정과 교회에도 있기를 꿈꾸고 기대하십시오. 이제 조만간 북한에도 은혜의 둑이 터질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 준비하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희 교회가 많은 영혼을 구하는 기독교계의 쉰들러와 같은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게 하소서!”  

어느 날, 구세군 창설자 윌리암 부스대장이 영국 왕후를 만나 방명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평생 동안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다니겠습니다.” 왕후가 그 방명록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대장님! 그 일이 그렇게 좋습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예! 왕후님! 저는 어떤 고통과 수치가 있어도 한 영혼을 더 구원하려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해도 좋습니다.” 얼마나 단호합니까? 그처럼 영혼 구원을 삶의 최우선의 과제로 두십시오.   

어느 날, 한 교회에서 전교인 여름수련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캠프파이어 직전에 한 아이를 잃어버린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자 그날 밤 모든 행사가 취소되었고 전 교인들이 아이 수색에 나섰습니다. 산과 개울을 뒤지면서 전 교인이 밤잠을 설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아이가 서울로 가는 다른 교회버스를 잘못 타서 서울로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결국 찾았는데 그때의 경험을 통해 한 영혼을 찾는 삶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처럼 한 영혼을 찾기 위해서라면 세상일도 포기하고, 재미도 포기하고, 물질과 시간도 포기하고, 밤잠도 설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특출하게 전도를 잘합니다. 정말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격려해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도 영혼 구원에 나서십시오. ‘전도의 은사’는 다 없어도 ‘전도의 의무’는 다 있습니다. 그처럼 복음 전파의 열정과 목적을 가지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약속이 본문에 나온 가브리엘 천사의 말처럼 때가 되면 이뤄질 것입니다.
  

< 준비하면서 기다리십시오 >   

마지막으로 기다릴 때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열심히 준비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기간은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 기간에 예수 믿고 인물 되는 길을 위해 자기 달란트를 살려 힘써 준비하십시오. 요새 일자리가 없으니까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이 많지만 무작정 사업에 뛰어들면 안 됩니다. 사업을 잘하려면 사업적인 머리가 있어야 하고 사업적인 머리가 없으면 먼저 사업의 고단자가 되도록 잘 준비해야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가끔 아버님과 바둑을 두었습니다. 그때 아버님 바둑 실력이 6급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돌 아홉 개를 깔고 두어도 저의 말이 거의 잡혔습니다. 그때는 바둑 실력 6급인 아버님이 바둑의 신처럼 느껴지며 어떻게 바둑을 그렇게 잘 두실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바둑실력이 9급쯤 되니까 그때는 더 이상 아버님이 바둑의 신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약 1년 동안 바둑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받은 용돈을 거의 대부분 기원에 썼습니다. 시험 기간이 아닌 때는 거의 매일 학교에서 귀가하는 길에 기원을 들려서 바둑을 두었습니다. 그때 하루 기료가 어른은 100원, 학생은 50원이었습니다. 그때 일주일 용돈이 6백 원이었는데 용돈의 거의 절반을 기원에 썼습니다. 그러자 바둑 실력이 급속히 늘어서 2급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때부터 아버님은 저와 바둑을 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이 결코 저의 적수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 초까지 계속 기원을 다니면서 1급 실력을 넘보다가 더 이상 기원을 다니지 않으면서 2급 실력에서 멈췄습니다. 2급에서 1급으로 올라가는 것은 18급에서 2급으로 올라가는 것만큼 어렵고, 1급에서 프로 1단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습니다.  

깊이 보면 바둑은 전투나 사업과 유사합니다. 이기려면 고도의 전략과 전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바둑 실력에 큰 급수 차이가 있듯이 사업 능력에도 큰 급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9급 이하의 사업 능력으로 무작정 사업에 뛰어듭니다. 그러면 큰 성공 가능성이 적습니다. 그러므로 남들이 어떤 사업에서 성공했다는 말만 듣고 무조건 그 사업에 뛰어들지 마십시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그 분야에서 9급 이하의 사업 실력으로는 현상유지도 힘듭니다.   

타고난 바둑 천재는 누구보다 빨리 바둑을 이해하고 실력이 부쩍 늡니다. 그처럼 타고난 사업가는 사업의 생리를 이해하고 금방 사업 급수를 높여서 성공하지만 타고난 사업가가 아니면 끊임없는 기도와 연구와 노력으로 먼저 사업 전에 급수를 올려야 합니다. 또한 사업에 뛰어든 후에서도 계속 기도하고 연구하면서 급수를 올려가야 합니다. 그렇게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그 사업을 통해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바둑을 두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듯이 사업을 하거나 목표를 향해 나가다 보면 승리하는 날도 있고 패배하는 날이 있습니다. 그 패배하는 날도 필요합니다. 그때 기도하고 묵상하고 배우고 연구하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점점 실력의 급수가 높아질 것입니다. 살면서 패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패배를 교훈으로 삼아 실력의 급수를 높이고 준비하면 가장 적절한 때에 반드시 꿈과 비전이 이뤄질 것입니다. 
  

< 변화된 세상을 꿈꾸십시오 >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저의 사역에 두 가지 무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영권을 얻도록 <설교파일> 사역을 주셨고, 또 하나는 인권과 물권을 얻도록 <네트영어> 사역을 주셨습니다. 모두 미지의 영역을 개척한 것으로서 내일의 꿈과 비전의 도구로 하나님이 주신 콘텐츠입니다. 그러나 사업적인 머리는 없어서 며칠 전 새벽에 그 문제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것을 어떻게 사업화해서 선교와 구제를 위한 최선의 통로로 잘 만들 수 있을까요?”   

그때 하나님이 이런 음성을 마음속에 주셨습니다. “이 목사야! 정말 너를 사랑하고 네 사역을 이해하면서 도와줄 음지의 돕는 손길과 사업의 고단자를 예비했다.” 그때 계속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무리 사업의 고단자라도 돈 자체를 바라는 사업가는 내키지 않아요.” 그때 하나님이 다시 이런 음성을 마음속에 주셨습니다. “알고 있다. 계속 준비하면서 기다리라.” 기도 중에 그런 대화가 오고 가면 얼마나 마음에 힘과 위안이 넘치게 되는지 모릅니다.  

이제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십시오. 그러나 수동적으로는 살지 마십시오.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축복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십시오. 물론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이 지혜와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큰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과 ‘그 뜻을 이루려고 실천에 나서는 일’의 밸런스를 잘 맞추십시오. 그러면 찬란한 꿈과 비전이 이뤄질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축복은 대개 수고와 땀 흘림을 통해서 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열매를 거둡니다(시 126:5). 왜 세상에 소망이 있습니까? 어딘가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형이 크고 번듯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현재 부족한 점이 많아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최대한 활용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버팀목이 되어주려는 마음으로 살면 세상은 조금씩 변화될 것입니다.   

어느 날, 한 독지가가 유기농 쌀을 구제시설에 보내자 누군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일반 쌀을 사주면 곱절은 보내어 보다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잠시 고민하는데 그때 옆에 있던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어려운 사람들은 좋은 쌀 좀 먹으면 안 돼요?” 얼마나 순수하고 우직한 얘기입니까? 그처럼 계산적인 머리는 없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좁은 문의 삶을 선택해서 갈 때 그를 통해 세상은 조금씩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 변화된 세상을 꿈꾸며 서로를 최대한 품어주려고 하십시오. 성도는 현재의 시간과 위치에서 사랑의 영역을 넓혀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꿈과 비전은 결코 그냥 사장되는 법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그 꿈과 비전이 이뤄지는 모습을 반드시 보고야 말 것입니다. 이제 열심히 사랑의 씨를 뿌리고 거룩한 비전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달리면서 주님의 재림을 행복하게 기다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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